소설리스트

감금된 성녀와 비밀의 밤-204화 (204/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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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욕의 여신에서, 사랑의 여신으로

[204]

사제가 아닌 자라니, 아론이 사제직을 그만두었다는 말인가. 아리스텔라는 발레리아누스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 크리스. 아론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었나요? 성의를 태우라고 당신에게 지시했잖아요. 다른 이야기는 없었어요? ”

“ 성녀님, 진정하세요. 저는 지시를 받은 게 아니라 부탁을 받은 거예요. ”

“ 부탁이든 뭐든요! ”

달려들 듯이 묻는 아리스텔라의 모습에 크리스는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상냥한 성녀 아리스텔라는 자신을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친절했지만, 크리스는 그녀의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처럼 대화를 나누게 되었는데 화제가 다른 남자의 이야기라는 것도 은근히 열 받는 일이었다.

“ 아침부터 성의를 태우는 귀찮은 부탁을 들어줬는데, 선행을 베풀어봐야 돌아오는 거 하나 없네요. ”

“ 크리스. ”

“ 그렇게 궁금하시다면, 제게 묻기보다는 당사자에게 묻는 편이 빠르지 않을까요? ”

크리스는 양손을 들어 아리스텔라의 어깨를 다독여주고는, 그녀의 몸을 살짝 옆으로 돌렸다.

그곳에는 아론이 서있었다. 여전히 새하얀 성의를 입고서. 하지만 그 성의는 신관복이 아니었다. 아론은 크리스와 같은 수습사제의 성의를 입고 있었다.

“ 아론……? ”

“ 여신 위그멘타르의 현신이신 아리스텔라 성녀님을 뵙습니다. ”

아론은 담담한 어조로 말하고는 아리스텔라의 앞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 위대한 여신의 현신이시여, 부디 당신의 어린 양을 용서하시고 당신의 종으로 삼으소서. ”

“ 어린 양은 아니지. 나보다도 나이가 많으면서……. ”

클로비스가 불만스러운 듯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 불평은 아리스텔라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리스텔라의 눈에는 오직 제 앞에 무릎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아론의 모습만이 들어왔다.

“ 아론……. ”

“ 저의 모든 것을 당신께 바치겠나이다. ”

그것은 처음 수도원에 들어간 아이들이 처음 수습사제가 될 때 제단에 나아가 신 앞에서 하는 서약이었다.

성녀 아리스텔라에게 모든 것을 바치는 종이 되지 못했던 아론은 자신이 이 신전의 사제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신관직에서 물러났다. 교황 발레리아누스는 아론에게 수도로 돌아가 교황청에서 자신을 보필해달라고 요구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아론은 이번에야말로 성녀의 종이 되기 위해, 다시 한 번 수습사제로서 처음부터 맹세의 서약을 올리기로 했다.

“ 성녀님. 제가 당신의 종이 되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

낮은 목소리임에도 귓가에 또렷하게 들리는 분명한 어조.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올곧은 눈빛. 동료에게 추대 받아 신관이 된 남자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지위와 명예를 버리고 신 앞에 홀로섰다.

“ 허락……합니다. ”

아론처럼 담담하게 대답하고 싶었는데, 역시 목소리가 떨리고 말았다.

가슴이 벅차오르면서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아리스텔라는 옷자락을 움켜쥐고 몇 번이나 숨을 골라야 했다. 아론은 보채지 않고 조용히 눈을 내리깐 채로 성녀의 축복을 기다렸다.

“ 당신이 저의 종이 되는 것을 허락하겠습니다. ”

이번에는 목이 메지 않고 분명히 말했다. 아리스텔라는 제 앞에 무릎 꿇은 아론의 어깨에 양손을 짚었다. 여전히 시선을 내리깐 채로 아론이 고개를 들었다.

“ 저의 육신과 영혼이 모두 당신의 것입니다. ”

“ 여신의 은총이 당신과 함께 할 거예요. ”

허리를 굽혀 그에게 입을 맞췄다. 스스로 축복을 내리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자신을 바라보는 황금색 눈동자에 눈이 멀 것 같아서, 아리스텔라는 눈을 감고 천천히 입술을 부비며 아론을 느꼈다.

단단하고 넓은 어깨. 남자다우면서도 단정한 생김새. 코끝에 걸리는 숨결과 탄력 있는 입술, 맞닿은 피부 너머로 스며드는 시원한 신성력에 날아오를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 이제 당신은 저의 종이 되었습니다. ”

아리스텔라는 아론의 코에 제 코를 비비며 생긋 웃었다. 그녀가 몸을 일으키자 아론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바로섰다. 큰 키에 커다란 체구인데도 자세가 반듯해서일까, 아론은 그 자리에 서있는 것만으로 의지가 되었다.

감격한 눈으로 아론을 바라보는 아리스텔라의 모습에 발레리아누스는 조금 민망해져 헛기침을 했다.

“ 커흠. 성녀님. 당신의 새로운 종에게 이름을 지어주셔야지요. ”

“ 세례명을 새로 짓는 건가요? ”

“ 보통은 수습사제가 될 때 지도 사제가 세례명을 붙여줍니다만, 아론의 서약에 응한 것은 성녀님이니까요. 직접 지어주시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

“ 그렇군요. 새로운 이름이라……. ”

아리스텔라는 입술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아는 이름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다양한 민족이 모여 사는 신성제국에서는 이름과 마찬가지로 세례명 또한 각 문화권의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선지자, 혹은 성인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 아론은 이 신전에서 태어났지. ’

타락한 성녀의 배를 빌어 태어난 저주받은 아이. 아론을 키운 사제들은 늘 그를 매도했다고 말했다. 그 기억은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아론을 옭아매고 있다.

아리스텔라는 아론이 더 이상 괴로워하길 원하지 않았다. 자신의 종에게 새로운 미래를 주고 싶었다.

“ 당신에게 새로운 이름을 드릴게요. ”

아리스텔라는 아론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그의 황금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 에녹. ”

◇ ◆ ◇ ◆ ◇

아리스텔라는 에녹을 자신의 새로운 시종으로 삼았다. 수습사제를 관리하는 것은 지도사제의 역할이지만 신관 출신인 그에게는 지도사제가 없었다. 그래서 그에게 세례명을 지어준 아리스텔라가 에녹을 관리하고, 에녹은 시종으로서 아리스텔라를 보필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이제까지 성녀가 직접 시종을 선정하면 사제들은 늘 석연치 않은 눈빛을 보냈으나, 이번에는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아론, 아니 에녹의 인망이 높다는 것을 새삼 느끼며 아리스텔라는 오전 회의를 마치고 신전의 성문으로 나갔다. 교황 발레리아누스와 클로비스 공작을 배웅하기 위해서였다.

두 사람이 도착했을 때와는 달리, 배웅할 때는 모든 사제와 성기사들이 나와 있었다. 아리스텔라는 신전의 모두가 두 사람을 배웅하러 나온 일에 순수하게 기뻐했지만, 클로비스와 발레리아누스의 눈에는 아무리 봐도 순수한 배웅이 아니었다. 그들의 눈빛에서는 외부인인 자신들이 제대로 나가는지 두 눈으로 확인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만이 느껴졌다.

흑심을 품고 방문한 클로비스야 둘째치더라도 발레리아누스는 교황인데 사제들로부터 이런 눈빛을 받는 것이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았으나, 굳이 입 밖에 내서 분위기를 불편하게 만들 필요도 없었기에 모르는 척 흘려 넘기기로 했다.

“ 그럼 저희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성녀님, 당신의 종에게 은총을. ”

“ 교황 성하. 클로비스 스프라우트 공작님. 두 분께 여신의 은총이 있기를. ”

발레리아누스와 가볍게 목례를 나눈 아리스텔라가 클로비스에게 목례하기 위해 고개를 돌리자, 클로비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양 팔을 벌렸다. 다들 보고 있는데 설마 자신에게 안기라는 뜻인가. 아리스텔라는 조금 당황했으나 클로비스가 노골적인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손을 뻗어 가볍게 클로비스를 껴안았다.

“ 제 마음을 두고 가겠습니다. ”

“ 클로비스. ”

“ 대신 축복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성녀님. ”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일흔 명의 따가운 시선은 느껴지지도 않는다는 듯, 만면에 미소를 띠운 클로비스는 아리스텔라에게 얼굴을 가까이하고 씩 웃어보였다.

“ 당신의 미래에 행운이 가득하기를. ”

“ 감사합니다. ”

스치듯 입맞춤을 나누고 떨어지는 순간, 클로비스는 아리스텔라에게 사랑을 속삭였다. 늘 능글능글한 태도를 보이던 그의 말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달콤한 고백에 가슴이 뜨끔한 아리스텔라는 얼른 한 걸음 물러나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도 그녀의 귀가 붉어진 것은 알 수 있었다.

“ 이자크. 성녀님을 잘 부탁한다. ”

“ 어? 어……. ”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인 이자크를 보고 클로비스는 만족스러운 듯이 웃었다. 클로비스는 아리스텔라와 함께할 수 없지만 그를 닮은 동생은 일생 그녀와 함께일 것이다. 클로비스는 그것으로 대리만족을 하기로 했다.

‘ 아이가 생기면 좋을 텐데. ’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욕망을 다시 한 번 속으로 되뇌며, 클로비스는 등을 돌렸다.

교황 발레리아누스는 자신의 수행인으로 온 주제에 자신보다 먼저 성문을 나서는 클로비스의 모습에 살짝 미간을 찌푸렸지만, 곧 표정을 고치고 성문을 나섰다.

천천히 닫히는 무거운 철문 사이로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의 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벗어나기 전에 철문이 닫혔다. 아리스텔라는 굳게 닫힌 철문을 응시했다.

“ 이제 정말로 폐쇄된 신전으로 돌아왔네요. ”

“ 성녀님……. ”

교황 발레리아누스의 방문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신전이 처음 세워진 초창기를 제외하면 이 신전에 외부인이 방문한 사례는 없었다고 했으니. 집행관으로서 왔다고는 해도 클로비스가 두 번이나 방문한 것조차 전례에 없는 일이다.

그 특별하고도 우연한 만남이 끝났다.

외부와 단절된 신전에 갇힌 아리스텔라는 뒤돌아 저를 따르는 종들의 모습을 보았다.

대신관 히페리온과 신관 조슈아, 기사단장 로이드와 부단장 케인. 휘하의 사제들과 성기사들. 그녀를 위해 일생을 바친 일흔 명의 남자들.

‘ 내가 여신 위그멘타르를 정화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도움이 필요해. ’

질투와 탐욕의 여신, 그리고 음욕의 여신 위그멘타르. 그녀를 정화하고 이 신전을 저주받은 장소가 아닌 신의 처소로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사제와 성기사들을 화해시키는 것이 급선무다.

“ 에녹. 이제부터 스케줄이 어떻게 되나요? ”

“ 오늘 성녀님의 일정은 정오 미사뿐입니다. ”

정오 미사.

사제와 성기사들과 함께 하는, 하루에 한 번뿐인 귀중한 시간.

아리스텔라가 신관들과 함께 단상에 오르면 좌측엔 사제들이, 우측엔 성기사들이 모여 성가를 부른다. 아리스텔라는 먼저 그 팽팽한 긴장감이 웃도는 상황부터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 오늘부터는 사제와 성기사분들이 구역을 나누지 않고, 섞여 앉도록 하세요. ”

“ 예? ”

아리스텔라를 바라보던 사제와 성기사들이 황당한 얼굴로 되물었다.

“ 오후의 성서 공부에는 성기사분들도 참여하고, 저녁 순찰에는 앞으로 사제분들도 동행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

“ 성녀님? 잠깐……. ”

“ 이자크. 당신에게는 특별 명령을 내릴게요. ”

아리스텔라는 생긋 웃으며, 황망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젊은 기사에게 특명을 내렸다.

“ 사제분들에게 종이꽃을 만드는 방법을 가르치세요. 오늘 이후로 제례에 쓰이는 꽃은 생화가 아닌 조화로 대신합니다. ”

신전의 마른하늘에, 때 아닌 날벼락이 떨어졌다.

============================ 작품 후기 ============================

마무리 챕터는 현재까지의 연재분과 성격이 조금 다를 것 같아 에필로그로 빼겠습니다. 해서 본편은 우선 여기서 완결입니다.

이후의 이야기는 작품의 배경설정이 되는 부분을 마무리하는 내용입니다. 대략 3~4챕터로 10~15화정도 연재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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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한 설문조사를 추가했습니다. 작중 인물 중 가장 좋아하는 남성 캐릭터를 골라 투표해주시면 외전 작성시 참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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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일로부터 45일후, 1월 18일에 조아라 프리미엄으로 전환됩니다. 프리미엄 전환 전에 이북이 발매되는지라 어쩌면 월말에 일부 편수가 삭제될지도 모릅니다. 확정이 되면 다시 공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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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북이 나온다고 합니다. 본편 설정오류를 수정하고 각 캐릭터 비중을 맞추기 위한 추가 에피소드가 들어갑니다. 외전도 이북이 나오는데 본편과 같은 날 나오는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12월 말에 나온다는 것 말고는 달리 아는 것이 없어서…. 뭔가 알게 되면 공지하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원고료 쿠폰 모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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