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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욕의 여신에서, 사랑의 여신으로
[200]
성녀의 방문 앞에 다다른 로이드는 아리스텔라를 한 손으로 고쳐 안고, 다른 쪽 손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넓기만 한 성녀의 방은 주인이 부재중이었던 탓에 조금 싸늘했다.
“ 성녀님. 바로 주무시겠습니까? 아니면 간단하게 몸을 닦는 쪽이 좋으신지요? ”
“ 로이드는 이제 제 시종이 아니잖아요. ”
“ 성녀님의 시중을 드는 것은 제 기쁨이니까요. ”
아리스텔라를 침대에 앉히고 자연스럽게 시중을 드는 로이드는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발레리아누스와 아론에게 농락당하는 모습을 보인 탓에 그가 불쾌해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로이드의 표정은 어디까지나 다정하기만 했다. 그가 이제 자신의 화를 다스리는 데 능숙해진 것인지, 아니면 단지 참고 있는 것뿐인지는 모르겠지만.
“ 바로 잘 생각은 없어요. ”
“ 그럼 목욕을 하시겠습니까? ”
“ 으음……. 히페리온에게 정화를 부탁할래요. ”
아리스텔라는 문가에 서 있는 히페리온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간이 테이블의 조명등을 켜고 아리스텔라의 앞에 무릎을 꿇자, 로이드는 히페리온이 정화를 하기 용이하도록 자리를 조금 옆으로 비켜주었다.
히페리온은 아리스텔라의 왼쪽 방을 살며시 잡고 신성력을 흘려보냈다. 그의 손끝이 하얗게 빛나더니, 안개처럼 스미는 신성력이 피부 위를 미끄러지며 체액과 땀을 닦아내고 열 오른 피부를 진정시켰다.
“ 후우우……. ”
히페리온의 신성력은 조금 서늘하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정화를 마치고 개운해진 아리스텔라는 침대에 길게 누우며 기지개를 켰다. 아리스텔라가 잘 거라고 생각했는지, 로이드는 침대 시트를 정리하고 히페리온은 이불을 그녀에게 덮어주려 했다.
“ 히페리온. 나 바로 잘 생각은 없다니까요. ”
“ 예? 그러면……. ”
아리스텔라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한 두 남자를.
“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는 건가요? ”
아리스텔라는 아론을 처벌하지 않았다. 발레리아누스를 쫓아내지도 않았다. 그런 일을 당했는데도 자신은 태연하게 방으로 돌아와 몸을 정화하고 침대에 눕는다. 그러나 그것은 익숙해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 물을 수 없습니다. ”
히페리온과 로이드가 동시에 대답했다. 두 남자는 놀란 눈으로 서로를 쳐다보고는, 곧 고개를 돌렸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로이드였다.
“ 제게는 그것을 여쭐 자격이 없으니까요. ”
로이드는 아리스텔라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며 강제로 그녀를 안았다. 몸집만도 배 이상 차이나는 남자에게 처음 범해졌을 땐 너무나도 무서웠다. 연이은 절정에 기절하고도 그녀는 한참을 앓았다. 온몸에 열이 나고 통증으로 고생하는 것을 치료해준 것이 히페리온이었다.
“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부터 성녀님을 속이는 죄를 저질러놓고, 다른 이를 벌하지 않는다하여 불편한 감정을 품을 처지가 되지 못합니다. ”
아리스텔라는 히페리온에게 늘 고마워했지만, 그는 내내 그녀를 속이고 있었다. 여신 위그멘타르에게 의식을 빼앗긴 아리스텔라의 첫 경험을 빼앗고도 진실을 감춘 것이 그였다. 아리스텔라는 자신의 기억에 없는 일로 히페리온에게 화를 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죄책감이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 반성하라고는 했지만, 죽은 사람처럼 지내라고는 하지 않았어요. ”
“ 하지만 저는 처음부터 성녀님을……. ”
“ 음, 그러고 보니 클로비스가 그런 말을 했죠.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고. ”
히페리온의 표정이 침울해졌다. 아리스텔라는 생긋 웃으며 그의 손을 붙잡았다. 남자다운 커다란 손이지만, 히페리온의 손은 참으로 매끄럽고 섬세했다.
“ 히페리온은 매일 입고 벗으면서도 자각이 없었나 보네요. ”
“ 예? ”
“ 신전의 성의에는 단추가 없잖아요. ”
남자의 신성력으로 벌리고 여미는 성의에는 단추도 매듭도 없다. 허리에 두른 허리띠조차 옷을 고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장식적인 의미였다.
“ 그러니까 잘못 채울 일도 없죠. ”
잘못 여몄다면 옷자락을 정리하면 된다.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사제들은 처음이라는 단어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지만 아리스텔라는 자신의 첫 경험을 기억하지 못한다. 아까운 한편 그래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 다시 바로잡으면 돼요. 중요한 것은 지금이잖아요. ”
“ 그렇……군요. ”
성의에는 잘못 채울 첫 단추가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말장난일 뿐이지만, 그것은 히페리온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 저, 성녀님. 제 옷에는 단추가 있습니다만……. ”
로이드가 곤혹스러운 듯이 말끝을 흐렸다. 아리스텔라와 히페리온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자, 로이드는 자신이 바보 같은 말을 했다는 것을 자각하고 고개를 숙였다.
고고한 성기사 로이드는 결코 남 앞에서 기죽는 일 없이 당당했다. 오로지 성녀의 앞에서만 냉정을 잃는다. 처음에는 그런 로이드가 무서웠지만, 더는 무섭지 않았다.
더는 당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해줄까, 입속으로 위로의 말을 되뇌던 아리스텔라의 머릿속에 문득 나쁜 생각이 스쳐갔다.
“ 어라, 그러네요. 그럼 로이드는 확실히 첫 단추를 잘못 채운 걸지도. ”
움찔. 로이드의 어깨가 떨렸다. 괜한 말로 그를 상처 입힐 생각은 없었다. 나쁜 짓을 하고 있다는 자각도 있었다. 그런데도 아리스텔라는 자신의 가벼운 말 한 마디에 진지하게 반응하는 로이드가 귀엽게 느껴졌다.
“ 로이드. 단추를 잘못 채웠을 땐 어떻게 하나요? ”
“ 다시……. 채워야 합니다. ”
자신을 다잡고 돌아온 이제는 더 이상 마음에 거리낌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리스텔라의 말에 로이드는 가슴이 뜨끔했다.
설마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거리를 두자고 할 요량으로 자신을 기사단장으로 복직시킨 것은 아니겠지. 더는 자신이 필요 없다고 말하면 어떻게 하나. 갑자기 아찔해졌다.
“ 로이드. ”
“ 예, 성녀님. ”
“ 단추를 다시 채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
“ 예……? ”
로이드가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해사하게 웃는 성녀의 얼굴이 보인다. 밤의 그녀는 언제나 매력적이지만, 오늘 밤은 한층 유혹적이었다.
“ 우후후. ”
아리스텔라는 침대에 누워있던 몸을 옆으로 돌려 상체를 조금 내밀었다. 로이드는 침대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기에, 누운 자세로 팔만 뻗어도 그의 어깨에 손이 닿는다. 셔츠 너머로 느껴지는 근육의 형태를 확인하듯, 가느다란 손가락이 어깨선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쇄골을 더듬어 내려간 손이 로이드의 목깃을 붙잡았다.
“ 옷을 벗어야죠. ”
그 말과 함께 꽃잎처럼 부드러운 것이 입술에 내려앉았다. 아리스텔라는 로이드의 입술에 제 것을 비비면서 셔츠의 단추를 풀어나갔다.
신전의 성의는 여자의 손으로 벗을 수 없고, 로이드도 케인도 관계할 때는 늘 스스로 옷을 벗었기에 남자의 옷을 벗길 기회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클로비스와 관계하면서 아리스텔라는 남자의 옷을 벗기는 것이 은근히 재미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로이드가 스스로 벗으려 했지만 아리스텔라는 제 손목을 잡으려는 로이드의 손등을 찰싹 쳐내고는 옷을 탈의해나갔다. 손끝으로 옷깃을 붙잡고 구멍을 벌려 단추를 빼낸다. 셔츠의 옷깃이 벌어지며 탄탄한 맨가슴이 드러났다.
“ 으응, 하……. ”
상의의 단추를 전부 풀고 나서야 키스가 끝났다. 마무리로 살짝 입술을 핥고 몸을 일으키자, 완전히 욕망에 가득 찬 자주색의 눈동자가 저를 향해 애타는 눈빛을 보내는 것이 느껴진다.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열렬한 눈빛이 기분 좋았다. 아리스텔라는 후후 웃으며 히페리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로이드와 아리스텔라를 보지 않으려 고개를 돌린 채였다. 말없이 자리를 피하는 것이 예의인지, 인사라도 건네는 것이 예의인지 고민하는 것처럼 무릎 위에 놓인 왼손이 옷자락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 히페리온. ”
“ 예, 예……. 성녀님. ”
“ 아까는 보지 말라고 해도 보고 있더니, 이번에는 말도 안했는데 눈길을 돌리네요? ”
“ 예? ”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코앞에 아리스텔라의 얼굴이 있었다. 움찔 뒤로 물러나려던 남자의 목 뒤로 가느다란 팔이 둘러졌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당혹스러운 듯이 벌어진 붉은 입술에 꽃잎처럼 부드러운 것이 억눌렸다.
기사의 옷은 벗길 수 있어도 사제의 성의는 벗길 수 없다. 아리스텔라는 아쉬움을 담아 얇은 성의 너머로 느껴지는 매끄러운 남자의 몸을 더듬었다. 남자의 몸은 확실히 여자와는 달랐다. 로이드처럼 단단한 근육은 아니라도, 미끈한 피부아래의 탄력 있는 근육과 두근거리는 심장의 고동이 느껴진다.
“ 읍……! ”
갑자기 입술 틈으로 밀려들어온 작은 혀에 놀라 히페리온이 눈을 크게 떴다. 아리스텔라는 히페리온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양팔로 그를 꼭 끌어안고, 매끄러운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았다. 작은 혀를 바쁘게 움직여 한 번도 맛본 적 없는 남자의 입안을 훑었다.
“ 응, 흐으응. ”
애처롭게 콧소리를 내며 혀를 움직이는 아리스텔라의 입맞춤에 당황한 히페리온은 그녀의 허리를 안아야 할까 침대 시트를 붙잡아야 할까 고민하다가, 결국 무릎 위에 가지런히 양손을 올려둔 채로 혀를 움직여 키스에 응했다.
작은 혀가 제 것과 끝을 비비다가 얽혀들 때마다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히페리온은 아리스텔라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눈을 뜨고 있었다. 시선을 느꼈는지 파르르 떨리는 긴 속눈썹이 올라가고 보랏빛의 눈동자가 드러났다. 남자의 시선을 마주한 여자의 눈이 가늘게 휘어지더니, 서툴게 쫓아가던 긴 혀를 두고 냉큼 도망쳐버렸다.
두 사람의 입술이 떨어지자 그 사이로 가느다란 은사가 늘어졌다. 아리스텔라는 손등으로 입술을 닦으며 몸을 일으키고는 후후 웃었다.
“ 하아……. 히페리온, 의외로 능숙하네요. ”
“ 성녀님. 저는, 그……. ”
“ 로이드는 어때요? ”
멍하니 두 사람의 키스 장면을 바라보던 로이드는 정신이 든 듯 허리를 바로 세웠다. 그 정직한 반응이 만족스러웠다. 누군가의 눈앞에서 키스한 것이 처음은 아니지만, 두 남자의 앞에서 번갈아가며 키스하는 것은 꽤 배덕한 기분이 들었다.
‘ 나 정말 이상해졌나 봐. ’
가슴이 콕콕 쑤시는데도 그 두근거림이 기분 좋았다. 나쁜 짓도 자꾸 하면 중독된다는 말의 뜻을 알 것 같았다. 로이드는 얼른 표정을 평소처럼 가다듬었지만, 흔들리는 눈빛만은 감출 수 없었다.
“ 성녀님. 지금 그것은, 저기, 어떤 뜻으로 물으신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
“ 제가 히페리온과 키스하는 걸 봤잖아요. 기분이 어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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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 201화 연참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