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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욕의 여신에서, 사랑의 여신으로
[199]
“ 아마도 그건, 내 목표가 당신의 소망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겠죠. ”
아리스텔라는 아론을 향해 손을 뻗었다. 가느다란 팔에 자그마한 손은 누구에게도 해를 입히지 못할 만큼 연약해 보이는데도, 아론은 본능적으로 허리를 뒤로 당겨 그녀의 손을 피했다.
어째서일까. 이제는 성녀가 타락하지 않았다는 것도, 그녀에게 닿는다고 타락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는데. 아론은 여전히 아리스텔라에게 닿는 것이 두려웠다.
“ 아론. 당신은 분명 내가 여신 위그멘타르를 담는 그릇일 뿐이라고 말했죠? ”
“ 그렇습니다. ”
“ 나 혼자의 힘으로 여신 위그멘타르를 정화하는 건 불가능할 거예요. ”
“ 잘 알고 계시는군요. ”
무모한 짓이다. 교만하게 신의 자리에 서려 한 죄로 천벌을 받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까는 그저 오기에 차서 실언을 한 것뿐이겠지. 아론은 조금 안도한 듯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 그래서 당신의 힘이 필요해요. ”
무릎을 세워 일어나려던 아론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단정하던 미간이 좁아지며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 진정 신의 노여움을 살 생각이십니까? ”
“ 나 혼자서는 여신 위그멘타르를 정화할 수 없어요. 이 신전의 사제와 성기사들의, 나를 따르는 모든 이들의 도움이 필요해요. ”
“ 제가 성녀님께 도움이 될 일은 없을 겁니다. ”
“ 명령을 따르지 않을 건가요? ”
성녀의 입에서 나온 < 명령 >이라는 단어에 아론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는 이제까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누군가를 속박하서나 행동을 강제한 적이 없었다.
“ 저는 < 종 >이라는 표현을 좋아하지 않지만……. 당신에게는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겠네요. ”
로이드에게 기대고 있던 아리스텔라가 몸을 일으켜 바로 앉았다. 정화를 하지 않은 탓에 그녀의 머리카락은 여전히 흐트러진 채였고 옷은 땀에 젖어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만은 여전히 맑고 투명했다.
그 어떤 속세의 더러움도 정화해버리겠다는 듯이.
“ 당신은, 저의 종인가요? ”
이 신전의 사제와 성기사들은 모두 여신에게 육신과 영혼을 바치기로 맹세한 이들이다. 성녀가 음욕에 물들어 다른 남자들과 성관계를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은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그러나 성녀가 자신의 신성을 증명한 순간, 그들은 다시 성녀에게 복종을 맹세했다. 신뢰가 흔들리는 위기가 있었을 뿐 그들은 처음부터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녀의 종이었다.
하지만 성녀가 타락했다고 생각했던, 성녀와 관계하는 남자는 타락하게 될 거라고 믿어왔던 아론은 과연 진심으로 그녀에게 자신의 전부를 바치기로 맹세했나.
아론은 대답하지 못했다.
“ ……이자크 이후로, 이런 일이 또 있을 거라곤 생각 못했는데. ”
아리스텔라는 입술을 샐쭉 내밀고 토라진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아직 다리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아 비틀거리자 양 옆에서 로이드와 히페리온이 부축해주었다.
“ 고마워요. 로이드, 히페리온. ”
“ 성녀님. 아론의 처우는 어찌 하시겠습니까. ”
히페리온의 말에 아리스텔라의 시선이 아론에게로 향했다. 그는 여전히 그곳에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있었다. 또다시 그녀는 그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었다.
“ 아론의 처벌은 하지 않습니다. ”
세 번의 밤을 보내겠다는 내기는 아리스텔라 쪽에서 제안한 것이었다. 강제적인 방식을 사용했다고는 하지만 아리스텔라는 구태여 아론을 처벌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아론은 사제였지만 성녀 아리스텔라에게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는 맹세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아론은 성녀 아리스텔라의 종이 아니다. 교황청의 사제인 그를 처벌할 이유가 없다.
“ 아론. 당신은 내일 교황 성하와 함께 이 신전을 떠나도록 하세요. ”
“ 성녀님? ”
굳은 얼굴의 아론 대신 교황 발레리아누스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되물었다.
“ 성녀님. 한번 이 신전에 소속된 자는 결코 신전 밖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
“ 여신 위그멘타르의 신전에 들어오는 사제와 성기사는 성녀에게 복종하기로 맹세한 이들이라고 알고 있어요. 나를 진심으로 따르지 않는 이 남자는 내 신전의 사제가 아닙니다. 외부인이죠. ”
외부인.
그 말에 아론의 표정이 불쾌하게 일그러졌다.
“ 방으로 돌아갈래요. 로이드, 부축을 부탁해도 될까요? ”
“ 물론입니다, 성녀님. ”
아리스텔라가 내민 손을 살짝 잡고 끌어당긴 로이드는 그녀를 안아들었다.
“ 손만 잡아줘도 되는데요. ”
“ 이 편이 빠릅니다. ”
로이드는 그대로 뒤를 돌아 중앙 건물로 향했다. 성녀를 능욕한 아론도 발레리아누스도 쳐다보지 않았다. 두 사람에게 분노를 느끼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로이드의 첫 번째는 언제나 성녀 아리스텔라였다. 그녀의 명령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 ……저도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
히페리온이 발레리아누스를 향해 가볍게 목례하고는 로이드와 아리스텔라의 뒤를 쫓았다. 회랑에는 아론과 발레리아누스만이 남았다.
◇ ◆ ◇ ◆ ◇
“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예 상대도 하지 않는군요. ”
순식간에 조용해진 사위를 둘러보고 발레리아누스는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로이드와 히페리온의 반발은 예상하고 있었다. 사랑에 미친 성기사와 대신관을 도발하는 일이다. 아론처럼 목숨을 건 것은 아니라도 부상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다. 여차하면 신성력으로 보호막을 둘러 몸을 보호하려고 내내 긴장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전부 헛일이었다.
“ 그나저나 성녀님을 모셔가는 건 어렵게 되었습니다. ”
아론은 여신 위그멘타르의 신전을 없애고 싶어 했다. 그는 발레리아누스에게 사정을 밝힘으로써 그가 신전의 사제와 성기사들을 해방해주길 원했다. 성녀를 교황청에서 관리해주길 원했다. 여차하면 일생 깊은 잠을 자는 마법을 걸어 교황청의 지하에 재울 생각도 하고 있었지만, 이것만은 발레리아누스에게 말하지 않았다.
교황 발레리아누스는 성녀가 교황청으로 오는 것이 별로 달갑지 않았다. 신성제국의 교황은 황제 이상 가는 상징적인 존재다. 야심이 가득한 발레리아누스는 신의 첫 번째 종이라는 사실보다도 인간 가운데 가장 신에 가까운 위치라는 사실 때문에 교황의 자리를 원했다. 명예와 권력이 필요했다.
그런 발레리아누스에게 여신의 현신인 성녀가 교황청으로 오는 것이 반가울 리 없다. 가장 높은 지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갑자기 상전이 생기는 셈이니 달가울 리도 없다. 아리스텔라를 클로비스에게 보내고, 대역을 만들어 가짜 성녀를 세우려던 배경에는 바로 이런 계산이 있었다. 그런데 모든 계획이 틀어졌다.
아리스텔라는 클로비스의 청혼을 거절하고, 이 신전을 없앨 < 성녀와 사제가 타락했다 >는 명분 또한 막아버렸다.
“ 교황청으로 돌아가서 새로이 계획을 짜지 않으면 안 되겠군요. ”
발레리아누스는 아직도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아론의 어깨를 살며시 짚었다.
“ 마침 성녀님께서도 당신이 신전을 나가는 것을 허락하셨으니 가서 천천히 논의하도록 하지요. 갑시다, 아론. ”
“ ……. ”
“ 아론? ”
말없이 일어난 아론은 교황 발레리아누스의 손을 뿌리쳤다. 자신의 성의를 툭툭 털자 바닥에 무릎을 꿇느라 달라붙어 있던 흙먼지가 떨어지고 깨끗한 상태로 되돌아왔다. 아론은 눈을 천천히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 성의는 아무리 오물이 묻어도 오염되지 않습니다. ”
“ 아론? 그야 당연한 소리를……. ”
“ 당연한 것을 미처 몰랐습니다. ”
성의는 신성력을 입힌 옷이다. 그 자체에 주문을 걸어 간단한 술법을 각인시키는 것도 가능하지만, 본래는 정화의 기능만을 가진다. 더러움을 정화하는 그 능력을 성서에서는 신의 축복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사제들은 모두 신의 축복을 받은 성의를 입는다. 그러면 신은 성의에 깃든 정화의 힘으로 사제들이 더러움에 물들지 않도록 지켜준다.
“ 어린 수습사제들도 아는 당연한 사실을 잊고 있었습니다. ”
아론은 제 옷소매를 꽉 쥐었다. 얇은 옷자락이 구겨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구겨진 옷자락도 분명 한번 털어내면 반듯하게 펴질 것이다.
“ 교황 성하. ”
“ 아론……. ”
“ 저는 사제가 아닙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