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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욕의 여신에서, 사랑의 여신으로
[198] 음욕의 여신에서, 사랑의 여신으로
여신 위그멘타르는 질투와 탐욕의 여신이며 또한 재앙의 여신이었다. 사랑을 모르는 이들이 무조건적으로 한 여자를 사랑하게 만들어놓고, 그들이 서로를 시기하고 질투하며 결국 미쳐 서로를 죽이게 만들다니. 그런 악취미가 또 있을까.
신이라는 이유로 인간에게 이토록 끔찍한 재앙을 내리는 여신을 아리스텔라는 용납할 수 없었다.
성녀로서도, 여자로서도, 이 신전의 주인으로서도.
“여신 위그멘타르를, 내가 정화할 거예요!”
끼긱.
아론이 신성력으로 만든 결계에 무언가 긁히는 소리가 들렸다. 로이드가 성검을 휘두른 것일까? 아니, 성검은 분명 신성력의 결계를 베어내지 못한다고 했는데.
의아함에 고개를 돌린 아리스텔라의 눈에 들어온 것은 결계 밖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히페리온의 모습이었다.
“ 성녀님. 어째서 말씀하지 않으십니까? ”
히페리온의 목소리가 들린다. 표정은 보이지 않아도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낭랑하면서도 또렷하게, 마치 높은 곳에서 흘러 떨어지는 물처럼 귓가를 적신다.
“ 제가 부족하여, 말씀해주시지 않는 것입니까. ”
“ 하읏, 무엇을……. ”
“ 어째서 저희에게는 그저 물러나라 말씀하시고, 모든 시련을 혼자서 감당하려 하십니까. ”
히페리온의 목소리에 깃든 것은 분노가 아니었다. 원망도 아니었다. 서글픈 음성이 담고 있는 감정은 자신에 대한 한탄이었다. 그 감정을 아리스텔라는 언젠가 다른 사람에게서 느낀 적이 있었다.
< 저 자신이 너무도 무력하여, 화가 납니다. >
아론과 처음 밤을 보내던 날, 케인은 아리스텔라를 안고 북쪽 탑을 내려오며 탄식했다. 그녀가 케인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고 스스로 시험에 응한 것에 화가 났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분노의 대상은 제멋대로 행동한 아리스텔라가 아니라 그녀에게 신뢰를 주지 못한 무력한 케인 자신이었다.
“ 성녀님. 저는 당신을 보필하는 종입니다. 당신에게 보호받는 종이 아닙니다. ”
“ 히페리온, 하지만……. ”
“ 괴로워하는 당신을 두고 도망칠 수 없습니다. ”
히페리온이 다가와 투명한 막 앞에서 멈춰 섰다. 아리스텔라는 다시 시야가 흐릿해져 눈을 몇 번 깜박였다.
시야가 흐릿해진 것이 아니었다. 늘 고요한 물 같았던 히페리온의 주위에 무언가 안개 같은 것이 일어났다. 어떻게 보면 연기 같기도 했고, 어떻게 보면 가느다란 실이 뭉쳐있는 것 같기도 했다.
바람이 부는 것일까? 히페리온의 새하얀 성의가 펄럭였다.
“ 당신의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
그가 성호를 긋자 주위를 감싸고 있던 안개에서 무수히 많은 빛의 사슬이 튀어나왔다. 그물처럼 촘촘하게 짜인 빛의 사슬이 신성력의 결계를 휘감았다. 그것이 무엇으로 이루어진 것인지 아리스텔라는 직감할 수 있었다.
설마 결계 안의 아론과 발레리아누스를 공격하려는 건가. 아리스텔라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 히페리온, 잠깐만요! 이 사람들을 해쳐서는……. ”
“ 해치지 않습니다. ”
히페리온의 표정은 여전히 잘 보이지 않았다. 단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만이 들려왔다.
“ 저는 그저 당신의 명을 따를 뿐입니다. 성녀님, 부디 제가 무엇을 하면 좋은지 말씀해 주십시오. ”
아리스텔라는 히페리온과 로이드에게 추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발레리아누스와 아론에게 능욕당하는 것도 고통스럽지만, 그 모습을 자신을 사랑하는 두 남자에게 보이는 것이 더욱 괴로웠다. 그들이 상처받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의 모습을 보지 말고 차라리 도망치기를 바랐다.
과연 그것이 정말로 두 사람을 상처 입히지 않는 선택일까.
“ 히페리온. 날 여기서 꺼내주세요! ”
“ 알겠습니다. ”
히페리온이 만들어낸 하얀 빛의 사슬이 아론의 투명한 결계를 꽉 옭아맸다. 그것이 서서히 조여들자, 그물에 걸린 투명한 결계는 사슬의 틈새로 올록볼록하게 튀어나와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검으로 베이지 않는다면 사슬로 감아 쥐어터뜨린다. 제아무리 신성력의 컨트롤에 능숙한 아론이라도 압도적인 힘의 차이에는 버틸 수 없었다.
―퍼엉!
풍선이 터지듯 요란한 소리와 함께 결계가 깨지고 투명한 신성력의 막이 사라졌다.
“ 이런. ”
발레리아누스가 짧게 탄식하며 성녀의 몸을 문지르던 손을 멈추었다. 몸 안에서 요동치던 발레리아누스의 신성력이 잠잠해졌다. 허리를 안아 받쳐주던 팔에 힘이 빠지자, 아리스텔라는 주르륵 미끄러져 바닥에 주저앉았다.
“ 하아, 하아……. ”
바닥에 반쯤 엎드린 자세로 숨을 몰아쉬던 아리스텔라는 호흡을 갈무리하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아론의 모습이 보인다. 발레리아누스에게 안겨있을 때는 아론을 내려다봐야 했는데, 바닥에 양손을 짚고 있는 지금은 아리스텔라가 그를 올려다보는 모양새가 되었다.
“ 아론……. ”
“ 성녀님! ”
아리스텔라를 부르며 달려온 로이드는 발레리아누스를 밀어내고 바닥에 떨어진 성의를 주워 그녀의 몸에 걸쳐주었다. 옷자락이 몸을 덮은 감촉에도 예민해진 피부는 자극을 받았는지 따끔거렸다.
“ 흐으읏……! ”
“ 성녀님. 괜찮으십니까? ”
아리스텔라가 작게 신음하자 로이드가 그녀의 몸을 안아주었다. 넓은 품과 단단한 팔. 오늘 이 품에 구원받은 것이 몇 번째일까.
“ 로이드……. 으응, 괜찮아요……. ”
아직도 음부가 욱신거리면서 옅은 쾌감이 몸속을 배회하고 있지만, 이 정도는 버틸 수 있었다.
어느새 다가온 히페리온이 그녀의 오른쪽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정화하려는 손을 거부하자, 히페리온은 말없이 그녀에게 옷을 입혀주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발레리아누스는 한 걸음 물러나 어깨를 으쓱했다.
“ 이렇게 간단히 깨질 줄이야. 이제 저와 아론 신관의 목숨은 바람 앞의 등불이군요. ”
“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세요. ”
로이드에게 기댄 채로 아리스텔라가 눈살을 찌푸렸다. 발레리아누스는 그 시선을 회피하듯 고개를 기울이며 비뚜름하게 미소 지었다.
“ 성녀님을 능욕한 것은 사실이니까요. 이 자리에서 심판을 하시더라도 변명의 여지가 없지요. ”
“ 아론이 보낸 사제와 세 번의 밤을 보내겠다고 약속한 것은 저예요. 심판은 하지 않습니다. ”
“ 호오. ”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감탄하는 발레리아누스를 살짝 흘겨보고는, 아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여전히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 아론. 약속을 지키세요. ”
“ ……. ”
“ 저는 타락하지 않았고, 교황 성하께서도 제 신성을 인정하셨어요. 그리고 마지막 시험에서 로이드도 히페리온도, 당신들을 해치지 않았어요. ”
“ 그건 성녀님께서 말리셨기 때문입니다. 타락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
“ 두 사람이 제 말을 듣고 따랐다는 게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가 아닌가요? ”
아리스텔라의 질문에 아론은 입을 다물었다. 성녀는 타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성녀와 관계한 사제들도 타락하지 않았다. ‘앞으로는 어떨지 모른다’라는 것은 가정일 뿐 현실이 아니다. 성녀와 사랑에 빠진 두 남자는 마지막까지 사람을 해치지 않고 성녀의 뜻을 따랐다. 진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 성녀님께서는 이 신전이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
“ 이 신전을 나간다면 무엇이 달라지나요? 제가 교황청으로 가면 도리어 교황청의 사제들까지 말려들지 모르는 일 아닌가요? ”
성녀가 천수를 다하기 전에 죽으면 몸 안에 봉인된 여신이 해방된다. 여신 위그멘타르를 세상에 풀어놓는다면 어떤 재앙이 일어날지 모른다. 여신이 풀려날까 두려워 그녀를 위협하거나 이용하려는 자들이 나타날 것이다. 아리스텔라는 히페리온만큼 두뇌가 명석하지도 못했고 아론처럼 사람을 부리는 일에 능숙하지도 못했다. 그렇다면 차라리 폐쇄된 신전에 있는 쪽이 더 안전하지 않을까.
“ 제 안의 여신 위그멘타르를 정화하기 위해서는 이 신전이 적당하다고 생각해요. ”
“ 성녀님. 당신이 인간의 굴레를 벗어났다고는 하나 성녀는 어디까지나 여신을 봉인하기 위한 < 그릇 >입니다. ”
“ 알고 있어요. ”
“ 신은 교만한 인간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여신 위그멘타르께서 성녀님의 말씀에 노여워하며 저주를 내리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정말로 돌이킬 수 없게 됩니다. ”
아론의 목소리가 한층 낮게 가라앉았다. 평소의 무뚝뚝한 말투가 아니었다. 그녀를 꾸짖는 어조도 아니었다.
여신 위그멘타르는 순결하지 않은 성녀 밀리아리아에게 앞이 보이지 않고 제 다리로 걸을 수 없다는 저주를 내렸다. 감히 신을 정화한다는 오만한 발언을 한 성녀 아리스텔라에게도 그런 저주를 내릴까.
“ 아론. 나를 걱정하는 거예요? ”
“ ……. ”
“ 나는 저주 같은 건 두렵지 않아요. ”
사실은 두렵다. 이제까지 빛으로 가득하던 시야가 새까만 암흑으로 물들고, 몸의 주도권을 빼앗긴 채 그저 쏟아지는 쾌감에 속수무책으로 빠져들기만 했던 경험은 돌이키고 싶지 않을 만큼 끔찍했다.
하지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신 위그멘타르를 정화하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이 폐쇄된 신전의 저주는 대를 이어 되풀이될 것이다. 다음 대의 성녀, 또 그 다음대의 성녀가 자신의 종에게 범해지며 괴로움에 몸부림칠 것이다.
“ 아론. 당신은 이 신전의 비밀을 밝혀내고 성녀와 사제들의 타락을 증명하기 위해 왔다고 했지요? ”
“ 그렇습니다. ”
“ 이 신전의 모든 이들을 저주받은 굴레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들어온 거군요. ”
내버려둘 수도 있었다. 신전에서 그 어떤 재앙이 일어나든, 외면하고 자신의 인생을 사는 데 열중할 수도 있었다. 아론은 습득이 빨랐고 신성력의 컨트롤에도 능숙했으며, 동료 사이에서 인기도 높았다. 분명 교황청에 남았으면 사제로서 높은 지위에까지 오를 수 있었을 것이다.
교황청에 있었더라면 고위사제로서 뭇 사람의 존경을 받았을 것이다. 창창한 미래가 예정되어 있음에도 아론은 그것을 거부하고 여신 위그멘타르의 신전으로 왔다.
이 신전의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 사제가 성녀와 잠자리를 하면 타락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나와 밤을 보냈지요. ”
“ 다른 사람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
“ 당신 자신이 타락할 위험이 있는데도 피하지 않았어요. ”
아론은 성녀와 몸을 섞은 사제가 타락할 거라고 추측했다. 아니, 확신했다.
그 자신이 성욕을 느끼지 못하는 몸이라 해도 성녀와의 관계에서 타락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실패하면 타락하고, 타락을 증명하더라도 성녀와 사제들에게 사로잡히면 결국 비밀을 밝히지 못하고 한평생 이 신전에서 죽은 듯이 살아가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망설이지 않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 스스로 몸을 던졌다.
진실을 밝히고 사람들이 타락하지 않도록 구해내는 것이 옳다고 믿었기 때문에. 자신의 출세와 영예보다도 성녀와 사제들이 타락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 아론. 당신은 나를 모욕하고 매도했어요. ”
“ 알고 있습니다. 화를 내셨지요. ”
“ 네. 하지만 당신을 미워하는 마음이 들지는 않았어요. ”
아론은 아리스텔라에게 미움 받고 원한을 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정말로 성녀가 타락했다면 그를 심판대로 올려 처형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데도 망설이지 않았다. 명예보다도 목숨보다도 중요한 것. 신념 때문이었다.
“ 아마도 그건― ”
아리스텔라는 천천히 한숨을 내쉬며 눈을 깜박였다. 싸늘한 밤공기가 열 오른 피부에 닿자 저절로 몸이 부르르 떨렸다. 덕분에 쾌감과 열기로 흐릿했던 시야가 차츰 분명해진다. 아론의 단정한 얼굴이 보였다.
“ 내 목표가 당신의 소망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겠죠. ”
============================ 작품 후기 ============================
도입부에 빠뜨린 문단이 있어 추가하고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