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금된 성녀와 비밀의 밤-194화 (194/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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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시험의 밤

[194] 마지막 시험의 밤

히페리온은 늘 아리스텔라를 안고 싶어 했다. 달콤한 몸을 끌어안고 향기로운 입술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그녀의 눈이 욕망에 젖고 단 한숨과 함께 자신의 이름을 부르기를 간절히 바랐다.

아리스텔라가 원하지 않아도 그는 여전히 그녀를 원했다.

아니, 아리스텔라가 자신을 원하길 바랐다.

그의 세계를 창조한 여신은 자신을 기만한 종에게 마음의 자유를 빼앗는 벌을 내렸다. 아리스텔라를 사랑하게 된 뒤로, 히페리온은 내내 죄책감에 시달려왔다.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느끼지 않았을 죄의 무게에 눌려 숨이 막혔다. 괴로웠다. 그래도 필사적으로 버텼다.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아니었다. 그의 숨통을 조이며 어깨를 짓누르던 무거운 감정들은 여신이 선사한 벌이 아니었다. 자기 자신이 만든 허상이었다.

“ 성녀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

덜덜 떨리는 입술을 벌려 꼭꼭 감춰두기만 했던 진심을 고백한 후에야 히페리온은 알게 되었다. 제 안의 음험한 감정들은 결코 강하고 순결한 그녀를 더럽힐 수 없다는 사실을.

마음이 흘러넘치는 순간 그녀에게 독이 되리라 생각했던 것이 착각이었다. 그녀의 종이라 자처한 주제에 믿지 않고 있었다. 새하얀 성의를 입고 있는 작은 여신은 그 어떤 더럽고 추잡한 감정도 정화해버릴 터인데, 어째서 몰랐을까.

“ 이제야 대답을 들었네요. ”

아리스텔라가 작게 미소 지었다. 보랏빛의 눈동자를 가늘게 하고, 한걸음 다가와 그의 앞에 선다. 더 이상 가까워질 수 없다고 생각했던 거리가 단숨에 좁혀졌다. 그가 다가가기 어려웠던 한걸음을 그녀는 너무도 쉽게 내디뎌 다가온다.

“ 진작 당신에게 물었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네요. ”

“ 성녀님……. ”

“ 대신관님이 저를 볼 때마다 왜 그렇게 불안한 눈빛을 했는지, 억지로라도 말하게 할 걸 그랬어요. ”

아직도 난처한 얼굴로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그의 손을 작은 손이 감쌌다. 분명 따스한 손인데, 히페리온은 마치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움을 느껴 움찔 몸을 떨었다. 하지만 뿌리치지는 않았다.

“ 성녀님. 저는 당신을 속였습니다. ”

“ 알고 있어요. ”

아리스텔라는 천천히 히페리온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히페리온은 그녀의 손을 잡지도 못하고, 피하지도 못하고, 바보처럼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 당신을 기만했는데, 화를 내지 않으시는 겁니까? ”

“ 으음, 그러네요. 화를 내야 하는데……. ”

화를 내고 벌을 줘야 하는데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지를 않았다.

그녀가 건드린 적조차 없는데 그는 이미 혼자서 너무 많은 상처를 입어버렸다. 온몸을 난도질당해 피를 흘리며 쓰러진 사람을 향해 채찍을 휘두를 만큼 아리스텔라는 가혹한 사람이 아니었다. 히페리온이 아무리 간절하게 처벌을 바라더라도, 아리스텔라는 그를 처벌할 수 없었다.

“ 히페리온 대신관님. ”

“ 예, 성녀님. ”

“ 이제는 제게 거짓말을 하지 않을 거죠? ”

“ ……예. ”

대답은 짧았다. 하지만 그 짧은 한마디에는 흔들리지 않는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아리스텔라는 맞잡은 손에 힘을 주고 그에게 물었다.

“ 이 신전의 모든 것이 제 소유라고 하셨잖아요. ”

“ 물론입니다. ”

“ 그럼 대신관님도 제 사람인 거죠? ”

뜻밖의 질문에 히페리온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눈가를 붉히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 저 히페리온은 당신께 몸과 마음을 바치기로 맹세한 자. 저의 모든 것이 성녀님의 것입니다. ”

“ 대신관님의 몸과 마음이 정말로 제 거라면, 그걸 당신이 함부로 상처내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

“ ……. ”

히페리온은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히페리온을 ‘ 자신의 것 ’이라고 말해주었다. 경솔한 행동을 했다며 잘못을 지적받았는데도 수치심은커녕 기쁜 마음이 차오른다. 정말로 어떻게 되어버린 것 같다.

“ 다시는 자기 자신을 상처 입히지 마세요. 명령이에요. ”

“ 예. 그리 하겠습니다. ”

처음 아리스텔라의 앞에 무릎 꿇고 가장 먼저 맹세의 언약을 한 것이 히페리온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언약을 이행하지 못했다.

진심을 밝히지 않은 히페리온은 늘 아리스텔라로부터 한걸음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가갈 수 없도록 가로막던 벽을 세운 것은 그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다.

추악한 거짓의 벽이 무너져 내린 후에야, 비로소 히페리온은 진실한 자신을 그녀에게 바칠 수 있게 되었다.

가장 먼저 자신을 바치겠다 맹세한 그가, 가장 마지막으로 성녀의 종이 된 것이다.

“ 어느 누구도 제 사람을 함부로 상처 입히게 두지 않을 거예요. 그게 당신 자신이라 하더라도. ”

성녀 아리스텔라는 히페리온을 벌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주인에게 거짓을 고한 종을 용서해서가 아니다. 히페리온의 몸과 마음은 온전히 그녀의 소유였다. 그녀는 자신의 소유물을 망가뜨리지 않고 소중히 가꾸길 원했다.

< 이 신전 안에서는, 모든 것이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

히페리온은 확신을 담아 그렇게 말했다. 자신이 한 맹세를 지켜야 했다.

모든 것을 바치기로 결심한 종은 더 이상 죄책감에 처벌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처벌을 요구할 자격이 없었기 때문에.

“ 성녀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작은 손을 감쌌다. 여전히 보드랍고 따스한 그 손등을 어루만지며, 히페리온은 이번에야말로 진심을 담아 맹세했다.

“ 결코 함부로 상처 입히지 않겠습니다. 몸도, 마음도. ”

“ 약속, 꼭 지키셔야 해요? ”

생긋 웃으며 맞잡은 손에 힘을 주는 아리스텔라의 얼굴은 여전히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히페리온은 무심코 손을 당겨 그녀를 끌어안았다.

‘ 아……. ’

밤공기에 살짝 차가워진 옷자락 너머로 느껴지는 가녀린 몸은 여전히 부드럽고 따스했다. 간절히 바라면서도 차마 손을 뻗을 수 없었던 < 행복 >을 끌어안자 가슴이 벅차올랐다.

감정의 바다에 잠겨버린 마음 속 세상은 종말을 맞이하지 않았다. 어째서 바보같이 두려워했을까. 모든 것이 물에 잠겨버린 후에도 여전히 태양은 떠오르고 빛이 쏟아지는데.

“ 성녀님. 제 이름을 불러 주십시오. ”

“ 히페리온 대신관님. ”

“ 이름으로, 불러 주십시오. ”

그녀는 이 신전의 모든 이들을 이름으로 불러왔다. 오직 히페리온 한 사람만을 제외하고. 히페리온은 늘 그 점이 마음에 걸렸다. 그녀에게 이름으로 불리고 싶었다.

“ 히페리온. ”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어색한지 그녀가 머뭇거리며 그를 부른다.

그저 글자의 나열일 뿐이었던 이름이, 그녀가 부름으로써 진정한 의미를 가진다. 처음 사제 서품을 받고 신의 종이 되었을 때도 느낀 적 없는 환희가 가슴에 차올랐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히페리온은 눈을 깜박여 흐릿해진 시야를 정리하고는 품안의 아리스텔라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세계를 창조하고 구원하며 의미를 부여해준 작은 여신은 바로 이곳에 있다. 그의 품안에.

“ 아리스텔라 성녀님. ”

“ 히페리온……. ”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입술을 겹쳤다. 교황 발레리아누스의 요청으로 성녀를 데려가는 중이었다는 사실을 어느새 잊어버린 그는 지금 두 사람이 서있는 장소가 사위가 탁 트인 회랑이라는 것도 개의치 않고 입을 맞췄다. 입술을 핥고 한숨을 섞었다. 만약 혀를 섞는 방법을 알았더라면 그렇게 했을 터였다.

“ 응, 히페리온……. ”

“ 사랑하고 있습니다. ”

짧은 고백을 마친 붉은 입술은 답변을 요구하지 않았다. 살며시 아랫입술을 빨아당겨 마치 사탕을 빨 듯 정성스럽게 핥아주자, 온몸의 힘이 쭉 빠져 아리스텔라는 그에게 매달렸다.

“ 흐응, 응……. ”

그만 하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이참에 그에게 혀를 섞는 키스를 가르쳐 줄까. 몽롱해진 머릿속으로 그런 어이없는 고민을 하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 이거……. 어쩐지 늦는다 했더니만, 여기 계셨군요. ”

“ 꺄아아! ”

키스에 열중하느라 누가 다가온 줄도 몰랐다. 소스라치게 놀란 아리스텔라는 엉겁결에 히페리온의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그의 입술이 찢어져 붉은 피가 배어나왔다.

“ 미, 미안해요. 히페리온, 괜찮아요? ”

“ 괜찮습니다. 그보다……. ”

당황한 아리스텔라가 손을 뻗었지만, 히페리온은 얼른 입가를 가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뒷짐을 지고 있는 교황 발레리아누스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아론과…… 로이드가 있었다.

기사단에서 중앙 건물까지 호위를 하던 것이었을까. 느긋한 발레리아누스와는 달리 아론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다. 그리고 로이드는 뭐라고 설명하기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 너무 늦어지는 듯하여, 혹 무언가 사고라도 일어났나 싶어 돌아가던 중이었습니다. ”

“ 죄, 죄송해요! ”

그러고 보니 처음 히페리온을 보내 성녀를 데려오라 한 것도 교황 발레리아누스였다. 회랑에 서서 이야기하느라 깜박 잊고 말았다.

“ 많이 기다리셨죠, 정말 죄송해요! 제가 대신관님과 이야기를 하다가, 그만……! ”

“ 아닙니다. 딱딱한 회의실보다 이렇게 탁 트인 회랑에서 이야기하는 것도 신선해서 좋군요. 밤공기도 시원하고. ”

발레리아누스는 느긋하게 웃으며 아리스텔라에게로 다가왔다. 아론이 마치 로이드를 막아서듯 회랑의 입구에 서 있었기에, 그는 그녀에게 다가오지 못했다.

“ 폐쇄된 신전에 젊은 남녀를 가둬두었을 때부터 이런 일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했습니다만, 설마 로이드 기사단장에 이어 히페리온 대신관까지 성녀님께 흑심을 품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

무척 의외라는 듯이 말하면서도, 그의 눈빛이나 어조에는 전혀 놀라운 기색이 없었다. 마치 두 사람의 관계를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 흑심 같은 것이 아닙니다. ”

“ 주인을 따르는 종의 자세와는 거리가 멀지요. 남녀 간의 애정이라는 것은. ”

발레리아누스가 쿡쿡 웃으며 아리스텔라를 바라보았다.

“ 그렇지 않습니까, 성녀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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