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금된 성녀와 비밀의 밤-193화 (193/219)

0193 / 0219 ----------------------------------------------

감출 수 없는 마음

[193]

“ 저는, 당신을 속였습니다. ”

“ 히페리온 대신관님. 지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

“ 용서를 비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처벌을 내리시든, 달게 받겠습니다. ”

“ 그게 아니라……! ”

아리스텔라는 답답했다.

처벌. 처벌. 그녀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남자들은 늘 그 단어를 입에 달고 살았다. 로이드도 케인도, 클로비스도 히페리온도 마찬가지다. 어째서 그들은 아리스텔라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 그저 잘못을 저질렀으니 처벌해달라고만 하는지.

“ 저를 어떻게 속였는데요? 그걸 말씀하셔야지요. ”

아리스텔라의 질문에 히페리온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이번에는 멀리서 비치는 조명 때문이 아니다. 확실하게 알 수 있을 만큼, 그의 붉은 눈동자가 방황하고 있었다.

“ 저는 당신을 능멸했습니다. ”

“ 네? 어떻게……. ”

“ 당신을 속이고, 죄를 감추고, 아무 일도 없는 척 숨겨왔습니다. 가장 가까이에서 당신을 섬겨야 한다는 의무를 내던지고, 거짓과 기만을 일삼았습니다. ”

“ 그러니까 대체 뭐를요? ”

히페리온이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에 늘 이유모를 당혹감과 쓸쓸함, 불안함이 깃들어 있었던 것을 아리스텔라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자신에게 무언가 숨기는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분명 그럴 것이다.

아론이 그 자신의 과거를 밝히지 않았던 것처럼, 히페리온에게도 뭔가 숨기고 싶은 과거가 있을지도 모른다. 성녀는 신전의 주인이었지만 아리스텔라는 독재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그들의 것이다.

속이는 것은 물론 불쾌하지만, 자신의 상처를 감추기 위한 거짓말을 금지한다면 결국 치부가 드러나 더 큰 상처를 입을 뿐이다. 누구에게나 밝히기 싫은 부분은 있을 것이다. 아리스텔라는 거짓말 자체가 나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 히페리온 대신관님. ”

“ 예. ”

부르면 대답한다. 그녀가 물어보는 것을 대답하지 않을 뿐.

아리스텔라는 상대가 말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캐묻는 것이 폭력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히페리온이 이토록 창백해진 얼굴로, 손마디가 하얗게 되도록 성의를 부여잡고 괴로운 표정을 짓는 것은 분명 그녀에게 말해야 하는 것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리라.

억지로 말할 필요가 없다고 하고 싶지만, 그래서는 그가 원하는 < 처벌 >도 내릴 수 없다.

“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은 처벌할 수 없어요. ”

“ 성녀님. 저는 당신을 속이는 죄를 범했습니다. ”

“ 어떻게 속였는지 제가 모르니까, 무효예요. ”

“ 성녀님……. ”

“ 이 신전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은 저니까. 전 모르는 일에 대해서 판단하고 싶지 않아요. ”

아리스텔라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팔짱을 꼈다. 클로비스도 이상했지만, 히페리온도 정말로 이상했다.

“ 왜 솔직하게 말씀해주시지 않는 거죠? 어쩌면 제가 용서할지도 모르는 일인데. ”

“ 용서를 바라지 않습니다. ”

뜻밖의 말에 아리스텔라의 입이 벌어졌다. 히페리온은 진심으로 그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믿고, 처벌을 바라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적어도 히페리온 자신의 기준에서는 큰 죄를 범했다는 말이 사실이리라. 차라리 벌을 받아 편해지고 싶을 만큼.

“ 히페리온 대신관님. 제가 당신을 처벌하기를 원한다고 말씀하셨죠? ”

“ 예, 성녀님. ”

“ 당신이 저를 속이는 죄를 지었다고 말씀하셨고요. ”

“ 그렇습니다. ”

“ 그럼 처벌할 수 없어요. ”

“ 예……? ”

“ 당신이 죄를 지었고, 당신이 처벌을 원하는데, 진짜로 처벌을 내리면 그건 벌이 아니잖아요? ”

처벌을 원하는 인간에게 처벌을 내린다. 그건 벌이 아니라 오히려 상일 것이다. 그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 제게 감추는 사실을 말씀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대신관님이 원하시는 처벌은 드리지 않을 거예요. ”

“ ……. ”

히페리온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밤하늘을 닮은 그의 긴 머리카락이 차가운 바람에 흔들렸다가 가라앉았다. 달빛 아래서도 윤이 나는 찰랑찰랑한 머리카락을 보자, 아리스텔라는 문득 그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아름다운 긴 머리를 가진 신전의 대신관. 그때의 이 남자는 무척이나 엄격하고 딱딱해 보였다. 덧없이 사라질 것처럼, 건드리면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운 모습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은.

“ 성녀님. 당신께서 이 신전에 처음 오신 날을 기억하시는지요? ”

“ 기억해요. 대신관님께서 제게 방을 안내해 주셨으니까. ”

히페리온이 천천히 눈을 떴다. 촉촉하게 물기어린 붉은 눈동자가 새하얀 아리스텔라의 모습을 비추었다.

“ 성녀님이 신전에 오신 첫날 밤, 저는 당신을 범했습니다. ”

“ 네……? ”

“ 대미사를 치르기도 전에, 아직 < 인간 >이었던 당신을 제가 강제로 범했습니다. ”

기도실에서 기도를 올리던 그에게 여신 위그멘타르가 찾아왔다. 성녀의 자살을 막기 위해 만든, ‘ 남자의 손으로만 벗길 수 있는 성의 ’는 뜻밖에도 여신의 음행을 막는 족쇄가 되었다.

그러나 그 족쇄는 장난감에 불과했다.

단 한 번도 계율을 어긴 적 없다는 고결한 대신관인 그는 여신의 매혹적인 손짓과 음란한 애무에 계율을 깨고 그녀를 범했다.

남자가 만져주기만 하면 좋다는 듯 교성을 지르며 허리를 흔드는 그녀를 안고, 아직 한 번도 남자를 받아들인 적 없는 여성의 몸을 무참히 범했다.

“ 성녀님의 허락도 없이 계율을 깨고 말았습니다.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리라 자만했습니다. 그 교만이 불러온 결과입니다. ”

“ 대, 대신관님? 그러니까 그건, 저……. 혹시 제가 위그멘타르 여신님에게 몸을 빼앗겨서……. ”

“ 아닙니다. ”

유혹에 넘어갔다는 것은 변명이었다. 오로지 음욕의 여신을 잠재우기 위한 행위였다면 그녀에게 봉사하는 것으로 끝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 욕망을 참지 못했던 것은 제 쪽입니다. ”

그때, 여신 위그멘타르는 분명 처음이니 성급하게 넣지 말고 기다려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히페리온은 기다리지 못했다.

성교에 서투른 히페리온이라도 준비되지 않은 여성의 몸이 남자의 성기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특히나 작고 가녀린 아리스텔라의 몸이라면 더욱 그랬다.

알면서도, 일부러 그랬다.

그렇게 하고 싶었으니까.

신전의 대신관이라는 자가 제 욕망 하나 다스리지 못하고 짐승처럼 여인을 범했다. 그것도 자신이 평생을 섬겨야 할 주인을.

“ 로이드가 아닙니다. ”

성녀를 겁간한 죄로 구금되어, 집행관의 칼에 목이 잘려 마땅했을 죄인은.

“ 참형을 받아야 했던 것은, 저입니다. ”

처음으로 경험한 섹스는 이성을 잃을 만큼 강렬하고 짜릿했다. 신의 명령을 의무적으로 따랐다고 변명하기엔 너무 큰 쾌락을 느껴버렸다. 정신없이 쾌락을 추구하며 절정에 올랐다.

그녀의 음부에서 흘러나오는 피 섞인 정액을 목도했을 때 히페리온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천국을 엿보고 내려온 지상의 풍경은 지옥 그 자체였다.

“ 성녀님께 욕망을 참지 말라 말씀드렸던 것, 성욕을 느끼는 자신을 혐오하지 말라 말씀드렸던 것, 당신을 위해 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

“ 히페리온 대신관님……. ”

“ 저 자신을 향한 변명이었습니다. ”

기회는 몇 번이나 있었다.

성녀가 알몸으로 복도에 웅크리고 앉아 눈물을 흘리던 밤은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 할지라도, 그 뒤에도 몇 번이나 진실을 말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마다 히페리온은 속으로 자신을 합리화하며 그녀에게 진실을 말하기를 주저했다.

아니, 주저하지도 않고 그냥 미루었다.

성녀를 강제로 범해놓고 후세에 발견될 것이 두려워 자기변명으로 가득한 기록을 남겨둔 전대 대신관과 자신이 대체 무엇이 다른가.

“ 그랬……군요. ”

당황을 숨기지 못하고 그녀의 눈빛도 이리저리 흔들렸다. 서로를 향하지 않은 시선이 어두운 밤의 신전을 배회했다.

“ 아, 음. 뭐라고 해야 하나. 확실히 이상한 기분이네요. ”

아리스텔라는 이제까지 조슈아와의 섹스를 첫경험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를 특별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 이전에 벌써 히페리온과 하룻밤을 보냈다니.

‘ 아픈 경험이 기억에 없는 건 다행일지도 모르지만……. ’

아리스텔라는 황당하게도 조금 분한 마음이 들었다. 여신 위그멘타르에게 첫경험을 빼앗긴 일이 말이다.

‘ 나 정말 이상한 여자가 되어버렸나 봐. ’

뜻밖의 진실을 알게 된 충격은 아리스텔라의 마음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마음속에 인 분노는 히페리온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이 상황을 만들어낸 여신 위그멘타르가 원망스러웠다. 이제까지 죽 히페리온을 괴롭혔을 그날 밤의 진실이 원망스러웠다. 차라리 그녀가 잠든 것처럼 히페리온도 잊어버리고, 꿈으로 여겼다면 좋았을까.

“ 히페리온 대신관님. 그날 일을 제게 말하지 않으셨잖아요. ”

“ 예……. ”

“ 그동안 제게 다정하게 대해주셨던 게……. 죄책감 때문이었나요? ”

“ 예? ”

문득 내리깔았던 시선을 올리자, 자신을 바라보는 보랏빛 눈동자가 보였다.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맑으면서도, 무척 곧았다. 지상을 꿰뚫어보는 신의 눈처럼, 일직선으로 향하는 눈동자는 거짓이라는 방패를 깨고 감춰둔 마음 속 깊은 곳까지 침투했다.

“ 제게 거짓말하는 것이 미안해서 계속 신경써주신 건가요? ”

신전에 도착한 첫날, 분명 히페리온은 딱딱한 태도로 일관했다. 대신관으로서 해야 할 직무를 할뿐, 그 이상의 감정은 없어 보였다. 그때는 분명 그랬다.

대미사를 올릴 때, 눈이 마주친 한순간 그의 눈빛이 흔들렸던 것이 기억난다. 미사 중 갑자기 성욕이 일어 흥분해버린 그녀의 상태를 알아채고 다가와 축복을 나눠받았던 것도. 지하실에서 촉수괴물에게 붙들렸을 때, 그녀를 구하고 방까지 바래다주었던 것 또한, 전부 죄책감 때문에 한 행동이었을까.

“ 저를 속인 죄를 갚기 위해서, 제가 원하는 대로 따르겠다고 말한 건가요? ”

“ 성녀님……. ”

“ 미안해서, 죄책감에, 동정심에, 변명의 수단으로,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저를 안아주신 건가요? ”

“ 아, 아닙니다! ”

히페리온은 답지 않게 소리를 높이며 부정했다.

“ 아닙니다, 성녀님. 그렇지 않습니다. ”

처음 그녀에게 사실을 숨기기로 결심했을 때, 히페리온은 그것만이 성녀를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성녀를 위한 거짓말이 자신을 위한 거짓말로 변한 순간은, 바로 그가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긴 순간이었다.

종은 주인의 명령을 따른다. 아리스텔라가 밤 시중을 명령한다면 언제든 따르겠다고 히페리온은 맹세했다.

그것 또한 거짓말이었다.

그가 속이고 있던 것은 아리스텔라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을 속이고 있었다.

“ 제가 당신을 섬기는……, 당신을 안은 건……. ”

가슴 속을 채우는 감정의 물이 불어날 때마다, 히페리온은 서둘러 둑을 쌓았다. 그것이 흘러넘치지 않도록 두텁게, 아주 높이 쌓아올렸다. 그 둑의 높이는 어느새 성벽을 넘어서고 산을 넘어서며 구름으로 가려진 하늘에 닿았다.

하늘까지 쌓아올린 거대한 둑은 마치 신의 권위에 도전하기 위해 인간이 세운 욕망의 탑처럼 보였다. 자신을 속이는 데 급급했던 어리석은 남자는 제 행동이 신에 대한 기만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신은 오만하고 어리석은 남자의 탑에 벼락을 떨어뜨렸다.

둑이 무너졌다.

하늘에 다다랐던 감정의 물이 폭포처럼 쏟아진다.

“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

지상은 물에 잠겨버렸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