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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출 수 없는 마음
[192]
저벅저벅. 히페리온은 여전히 아리스텔라에게 걸음을 맞춰주지 않고 성큼성큼 복도를 건너갔다. 아리스텔라는 거의 반쯤 뛰듯이 그를 따라가야 했다.
‘ 대신관님. 화가 나신 것 같아……. 어쩌지? ’
아무리 아리스텔라가 음욕의 여신을 품은 몸이라 해도 사제란 본디 금욕과 절제를 중시하는 삶을 사는 이들이다. 그녀의 시중을 드는 신전 안의 사제나 성기사라면 몰라도, 외부인인 클로비스와 섹스하는 것은 그녀에게 관대한 히페리온의 기준에서마저 벗어난 행동일지도 모른다.
‘ 해명을 해야 할까? 아, 하지만 결국 변명이 될 텐데. ’
처음 클로비스와 몸을 섞은 일은 사고였다. 의식을 잃고 여신 위그멘타르에게 몸을 빼앗겼을 때의 일이니 그것은 그녀의 책임이 아니었다. 그러니 변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리스텔라 자신의 의지로 클로비스와 몸을 섞었다. 그가 외부인이라는 것을 알면서, 사제가 될 수도 성기사가 될 수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 이 신전 밖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서 무책임하게 몸을 섞었다.
히페리온은 그녀에게 욕구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참지 말고, 욕망을 느낀다 하여 자신을 경멸하지 말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아리스텔라의 몸 안에 깃든 여신을 다스리기 위해서였다.
여신 위그멘타르는 욕구를 참지 못했지만, 상대를 가리지는 않았다. 다른 남자가 아닌 클로비스와 몸을 섞어야만 하는 당위성은 어디에도 없었다. 성녀답지 못한 행동을 해버렸다. 아리스텔라는 성녀로서 자신을 믿고 따라준 사제에게 뭐라고 사과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 히페리온 대신관님, 저기……. ”
“ 죄송합니다. ”
“ 죄송…… 네? ”
히페리온에게 사과하려던 아리스텔라는 그가 먼저 사과의 말을 꺼내자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가 갑자기 멈춰선 탓에 아리스텔라는 히페리온에게 부딪힐 뻔했다. 히페리온이 몸을 돌려 아리스텔라를 바라보았다. 부딪힐까봐 엉겁결에 한걸음 물러난 아리스텔라를 보고는, 다시 얼굴을 찌푸렸다.
“ 대신관님……. ”
“ 죄송합니다. ”
히페리온은 한 번 더 사과했다.
무엇을 사과하는 것일까. 보폭을 맞춰주지 않고 혼자서 걸어간 것을? 아니면 클로비스와의 관계를 방해한 것을?
아리스텔라는 조심조심 히페리온의 표정을 살폈다. 파르스름한 신전의 공기 때문에 완전히 어둡지는 않지만, 밤이기 때문일까. 히페리온의 표정을 잘 파악할 수가 없었다. 멀리 보이는 복도의 불빛이 어른거려, 그의 붉은 눈동자가 불빛을 따라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 클로비스 경을 차셨다고요. ”
“ 아, 그, 그건요! ”
화아악. 아리스텔라의 얼굴이 귀 끝까지 새빨개졌다. 어둠 속에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 아우, 정말! 그건 크, 클로비스가 농담을 한 거예요. 저를 곤란하게 하려고! ”
“ 농담, 입니까. ”
히페리온은 타인의 감정에 무심했다. 남의 감정을 일일이 신경 쓰고 눈치를 보는 것이 피곤하다고 여긴 탓이었다. 그는 조슈아 같은 방관자는 아니지만, 무리 속에서도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는 무심할 뿐, 결코 둔감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클로비스가 진심으로 아리스텔라를 사랑하고, 그녀에게 마음을 거절당한 일로 상심했다는 것을.
‘ 성녀님은 어째서 그 자의 마음을 거절하셨을까. ’
아리스텔라는 로이드가 그녀를 사랑하는 것을 알고 받아주었다. 크리스가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미쳐버린 것을 알고도 구해주었다. 아마도 이 신전 안에서 그녀에게 반한 남자는 더 있을 것이다.
히페리온은 아리스텔라가 다른 누군가를 내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축복을 내려줄 수 없다며 미사실에서 내쫓은 이자크조차도 결국 받아들이지 않았나.
‘ 그런데 그 남자의 마음은 거절하다니. ’
클로비스는 유능한 집행관이었고, 신분 또한 이 신성제국에서 황제 다음가는 권력을 쥔 대공이었다. 황실보다도 많은 재산을 가진 그가 성녀에게 반했다면 신전에 온갖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옷이든 보석이든 진귀한 사치품이든, 그녀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구해내 선물할 것이다. 게다가 그 자신도 번듯한 미남자였다.
그런데 성녀 아리스텔라는 그의 마음을 거절했다.
어째서일까.
< 첫 단추를 잘못 꿰었다고 말하지요. 그런 겁니다. >
클로비스의 그 말을 듣는 순간, 히페리온은 가슴이 뜨끔해서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 심장이 옥죄는 것 같아 그 자리에 있기 어려웠다. 성녀를 모셔야 한다는 임무조차 잊고, 도망치듯 중앙 건물을 빠져나왔다.
첫 단추.
자신과 그녀의 관계에 있어 첫 단추는 어떠했나.
히페리온은 아리스텔라에게 이 신전에 온 첫날밤의 일을 아직 이야기하지 않았다. 아리스텔라는 분명, 히페리온과의 첫 섹스를 훨씬 이후의 일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녀가 괴로워하고 그가 달래준, 서로가 서로를 연인처럼 대하며 사랑을 나누던 그 밤을 처음으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만약 첫 경험이 그보다 더 전이었다는 것을 안다면, 그녀가 기억하지도 못하는 강제적인 행위였다는 것을 기억해낸다면, 어떻게 될까. 히페리온을 경멸할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유혹에 빠져 강제로 그녀를 범한 것보다도, 이제까지 그녀에게 진실을 숨긴 사실에 더욱 그를 혐오하게 될지도 모른다.
< 대신관님도 자신의 행복을 찾으셨으면 해요. >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에게 그 말을 했던 것을 후회할지도 모른다.
거짓에 거짓을 거듭하여 꿰어진 단추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내려와 마지막을 앞두고 있다. 이제 와서 밝힐 수 있을까. 차라리 모르는 채로, 한평생 그녀를 속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 아니, 아니다. ’
히페리온은 그저 두려웠다. 왜 속였냐고, 왜 거짓말을 했냐고 원망하는 말을 듣는 것이 두려울 뿐이다.
조금은 머뭇거리면서도 다정하게 그를 바라보던 보라색의 눈동자가 경멸로 가득 차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일이 아니면 함께 있어주지 않을 거냐며 애처로운 목소리로 유혹하던 그날 밤의 기억을 후회할 것이다.
당신 같은 남자와 몸을 섞는 것이 아니었다며 화를 낼 지도 모른다. 히페리온은 그것이 너무나도 두려웠다. 차라리 사슬로 목을 조르고 가시달린 채찍으로 등을 휘갈기는 쪽이 더 편안하다고 생각될 만큼.
“ 어째서 거절하셨는지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
“ 네? ”
아리스텔라가 당황한 얼굴로 히페리온을 바라본다. 그것은 클로비스와 아리스텔라 두 사람만의 일이다. 결코 제삼자에게 말할만한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마음을 거절했다 하더라도, 그 상황을 타인과 공유하는 것은 클로비스에 대한 실례였다.
“ 대신관님. 혹시 제가 성녀로서 행실을 바르게 하지 못한 일로 나무라시는 거라면……. ”
“ 아니, 아닙니다. ”
두 사람은 한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에 서서 마주보고 있었다. 비록 성녀와 대신관의 관계에서 더 나아가지는 못하더라도, 지금 두 사람의 거리는 나쁘지 않았다.
아리스텔라는 히페리온을 바라보고 미소 지으며, 그에게 축복을 나누어 준다. 그녀의 보라색 눈동자가 호의적인 빛을 띠고 그를 바라본다. 비록 이름을 불러주지는 않더라도, 그녀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부드럽고 상냥해서 듣기만 해도 가슴이 따스해졌다.
진실을 숨긴 채 겨우 여기까지 왔다. 결코 이 이상은 가까워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지금 이 거리가 멀어지는 것을 히페리온은 원치 않았다.
“ 바르지 못한 것은 저입니다. ”
“ 네? ”
처음은 그녀를 위한 것이라 생각했던 거짓말이 어느새 그를 위한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히페리온은 여전히 두려웠다. 아리스텔라는 상냥하고 정이 많았지만 자신을 능멸하는 일에 있어서는 가차 없었다. 성서 대신 전대 대신관의 일기를 바꿔놓은 일에 화를 냈고, 그녀를 시험하려 든 사제들에게 화를 냈다.
히페리온에게도 화를 낼까. 아니면, 화를 낼 가치조차도 없다며 돌아설까.
“ 부정한 것은 저입니다. ”
“ 대신관님? ”
“ 죄송합니다, 성녀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
“ 대신관님, 왜 갑자기 사과하시는 거예요? ”
아리스텔라가 물어도 히페리온은 대답하지 않고 무의미한 사과만을 반복했다. 잘못을 저질러놓고, 무엇을 잘못했는지 밝히지 않고 이유도 말하지 않고 그저 덮어놓고 사과하는 것은 최악의 사과다.
고해성사는 반드시 신 앞에서 자신의 죄를 스스로 털어놓고 회개해야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신은 인간이 어떠한 죄를 저지르더라도 진심으로 뉘우치면 용서하였지만, 자신의 죄를 감추려 드는 행동은 용서하지 않았다.
“ 용서받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
“ 히페리온 대신관님. 대체 왜 이러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무슨 일이 있는 건가요? ”
아리스텔라가 난처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히페리온을 바라보았다. 히페리온은 입을 다물고 가만히 그녀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주시했다. 보라색의 눈동자에 비친 제 모습은 꼴사납기 그지없었다.
‘ 나는 이제까지 이런 추악한 얼굴로 성녀님을 바라보았던 건가. ’
자신이 저지른 죄를 고해할 용기조차 없는 비굴한 자의 모습이다. 히페리온은 자신이 환멸스러웠다.
이런 추악한 모습으로, 추악한 마음을 숨기고, 사랑하는 그녀에게 다가가려 했던가. 상냥하고 다정한 그녀를 속이고, 제 진짜 모습을 감추면서, 어긋난 첫 단추를 보지 못하게 덮어버리고 정갈한 모습만을 꾸며 보여주면서 그녀를 능멸했던가.
클로비스가 말한 < 잘못 채운 첫 단추 >가 어떤 형태인지 히페리온은 모른다. 그러나 그 어떤 것일지라도 히페리온이 저지른 죄보다 더 음험하지는 않을 것이다.
“ 성녀님. 이것을 돌려드리겠습니다. ”
히페리온이 소매 속에서 붉은 꽃을 꺼냈다. 어제 아리스텔라가 건네준 제라늄이었다. 아리스텔라는 늘 그녀와 신전의 모든 이들을 위해 애쓰는 히페리온에게 감사함과 미안함을 담아, 그의 행복을 비는 마음으로 이 꽃을 건넸다.
“ 대신관님……. ”
신성력으로 보존 마법을 걸어둔 건지 꽃은 여전히 싱싱했다. 아리스텔라는 히페리온이 그것을 소매에 넣어 가지고 다닌다는 사실에 놀랐다.
“ 아, 혹시……. 선물을 거절해야 해서 죄송하다고 하신 거예요? ”
꽃이 마음에 안 든다고 말하는 것이 미안해서 사과하는 걸까. 히페리온의 속을 모르는 아리스텔라는 그가 그녀의 성의를 거절하는 것이 미안해서 그러는 거라고 넘겨짚고, 작게 미소 지으며 꽃을 받아들었다.
“ 대신관님이 꽃을 싫어하시는 줄 알았으면 다른 것을 준비했을 텐데, 제가 눈치가 없었네요. ”
“ 아닙니다. ”
“ 이렇게 말씀을 꺼내기까지 힘드셨겠죠. 저야말로 죄송해요. 미리 알아보지 않고 막무가내로 집무실에……. ”
“ 그런 것이 아닙니다……! ”
히페리온의 목소리가 떨렸다.
“ 저는 이 꽃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
아리스텔라는 붉은 제라늄을 히페리온에게 건네주면서, 그가 자신의 행복을 찾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향기로운 꽃은 그녀의 마음과도 같았다. 이제까지 줄곧 그녀를 속여 왔던 주제에, 자신은 분수도 모르고 그녀에게 마음을 고백하려 했다.
사랑하는 여인을 기만하려 했다. 히페리온은 그런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 성녀님, 저는……. ”
어긋난 첫 단추를 감추어도, 단추를 채워나가다 보면 언젠가 옷자락의 끝에 다다른다. 남은 것은 메워지지 않는 구멍일까, 아니면 메울 곳이 없는 단추일까.
“ 저는, 당신을 속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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