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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출 수 없는 마음
[191] 감출 수 없는 마음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침대에 앉아 서로를 끌어안고 있던 두 남녀는 그 소리에 흠칫 놀라 몸을 일으켰다.
“ 시종이 데리러 온 모양이군요. ”
“ 조슈아가요? 무슨 일일까……. ”
조슈아는 눈치가 없는 남자가 아니다. 아리스텔라는 클로비스와 몸을 섞을 목적으로 찾아온 것이 아니지만, 한참을 돌아가지 않으면 조슈아도 대강 돌아가는 상황을 짐작하고 기다려주었을 것이다. 클로비스와 몸을 섞는 상황을 짐작했으리라는 것도 좀 부끄럽긴 하지만. 그런 조슈아가 일부러 이렇게 부르러 온 거라면, 뭔가 다른, 급한 일이 생긴 것일지도 모른다.
아리스텔라가 문을 열기 위해 일어나려 하자, 클로비스가 그녀를 붙잡았다.
“ 성녀님. 가지 마십시오. ”
“ 클로비스? ”
“ 다른 사람들은 언제든 당신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
목덜미에 꾹 입술을 억누르며, 그가 아리스텔라를 도로 침대에 눕혔다.
“ 오늘 밤이 지나면 저는 돌아가야 합니다. 조금만 더 제 곁에 있어주세요. ”
“ 클로비스, 하지만…… 으응. ”
간절한 빛을 띠는 검은 눈동자를 본 아리스텔라는 밀어내려던 손을 멈칫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클로비스는 아리스텔라에게 키스했다. 뜨거운 입술이 꽃잎처럼 부드러운 입술을 빨아들여 제 타액으로 적셔갈 무렵, 또다시 똑똑, 하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 크, 클로비스, 잠깐만요. 정말로 급한 일이면……. ”
“ 후우……. ”
아리스텔라의 목소리가 곤혹스럽게 높아지자, 클로비스는 아쉬운 듯이 한숨을 쉬며 살짝 고개만 돌렸다.
“ 어지간히도 성질이 급한 종을 두셨군요. ”
클로비스는 손을 뻗어 침대 맡의 종을 한번 울렸다. 땡―하는 맑은 소리가 울렸다. 기다리라는 신호를 보내고, 클로비스는 다시 아리스텔라를 끌어안았다.
“ 으응! 아으응……! ”
문을 열라고 할 줄 알았던 그가 대기 신호를 보내자 아리스텔라는 당황했지만, 귓바퀴를 핥던 혀가 귓속으로 파고들자 가늘게 신음하며 클로비스의 옷자락을 부여잡았다. 얇은 성의 너머로 몸을 더듬던 커다란 손이 밑으로 내려가 엉덩이를 움켜쥐자, 아리스텔라의 몸이 움찔 떨렸다. 새어나오는 신음을 입술로 틀어막고 옷자락 사이로 손을 밀어넣으려던 순간, 이번에는 노크 대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성녀님. 교황 성하께서 성녀님을 부르십니다. ”
두 사람의 몸이 움찔 굳었다. 안쪽의 소리는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아도, 밖의 소리는 여전히 잘 들린다. 자신을 부르러 온 목소리의 주인공은 조슈아가 아니라 대신관 히페리온이었다.
“ 후우, 이런……. ”
“ 클로비스, 비켜주세요! ”
아리스텔라가 당황해서 그의 어깨를 탁탁 두드리자, 클로비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몸을 일으켰다. 또다시 그에게 붙잡힐까 후다닥 침대를 빠져나온 아리스텔라는 다리에 힘이 풀려 잠시 비틀거렸지만, 넘어지지 않고 무사히 문까지 뛰어갈 수 있었다.
“ 대신관님. ”
“ 죄송합니다, 성녀님. 오늘 밤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하여……. ”
“ 아, 아뇨! 저는 괜찮아요. ”
뒤에서 “ 저는 괜찮지 않습니다만. ”하는 클로비스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아리스텔라는 그를 흘겨보고는 얼른 고개를 돌려 히페리온에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딱딱할 뿐이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무뚝뚝해도 아리스텔라에게는 부드러운 눈빛을 보내던 히페리온의 얼굴은, 마치 처음 만났을 때처럼 굳은 표정으로 돌아가 있었다.
“ 대신관님……? ”
“ 제가, 방해를 한 모양이군요. ”
히페리온의 눈길이 제 얼굴이 아닌 목 언저리에 고정된 것을 파악한 아리스텔라는 깜짝 놀라 목을 가렸다. 관계 중에 클로비스가 뒷덜미를 물고 빨고 훑어놔서 온통 붉은 자국으로 가득했던 것을 깜박했다. 아리스텔라는 울상을 지으며 변명하려 애썼다.
“ 저기, 대신관님. 그게 아니라, 저는……. ”
“ 제 솜씨가 형편없다고 성녀님께 차였거든요. 그래서 화풀이를 좀 했습니다. ”
“ 클로비스! ”
어느새 다가온 클로비스가 빙긋 웃으며 아리스텔라를 제 품으로 끌어들이자, 히페리온의 표정이 조금 더 딱딱하게 굳었다.
“ 차였다고요……? ”
“ 어떤 여자든 녹여버릴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과연 성녀님은 인간의 굴레를 벗어난 분이라 그런가, 무리더군요. ”
“ 클로비스, 그만! ”
대신관 히페리온 앞에서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며, 아리스텔라는 있는 힘껏 클로비스의 팔을 꼬집었다. 하지만 클로비스에겐 그조차 간지러웠는지 쿡쿡 웃으며 아리스텔라를 한번 꼭 껴안고는 놓아주었다.
“ 자애로운 성녀님께서 이렇게 매정하게 거절하실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신전을 바라보며 구슬프게 우는 한 마리 새가 되었을 것을. ”
“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제가 거절한건 클로비스 당신이 무리한 요구를 했기 때문이잖아요. ”
클로비스의 능글능글한 태도에 아리스텔라는 새초롬한 얼굴로 불평을 하면서도, 진심으로 싫어하는 기색은 내비치지 않았다. 예전에 보았던 두 사람의 분위기와는 확연히 달라진 것을 깨달은 히페리온의 미간에 주름이 조금 더 깊게 잡혔다.
“ 성녀님. 클로비스 경과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신 거라면, 교황 성하께는 내일 출발을 늦춰달라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
“ 아, 아니에요! ”
아리스텔라가 얼른 문을 빠져나와 히페리온의 옆에 섰다. 클로비스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 자신의 방을 나와 히페리온의 옆에 서는 아리스텔라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 아무리 품에 가두려 해도, 당신은 금세 날아가 버리는군요. ”
“ ……. ”
“ 가세요, 성녀님. 교황 성하께서 부른다고 하시지 않습니까. 당신을 모시려 대신관께서 직접 오셨는데. ”
“ 클로비스, 당신은 같이 가지 않는 건가요? ”
클로비스는 교황 발레리아누스의 수행인으로 온 것이 아닌가. 곁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아리스텔라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어도, 클로비스는 빙긋 웃을 뿐이었다.
“ 애석하게도 저는 감정에 초연한 사제가 아니라 평범한 인간이라서 말이지요. 교황 성하께는 실연의 아픔에 몸져누웠다고 좀 전해주시지요. ”
“ 무슨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
“ 후후후. 아, 이런. ”
클로비스는 무심코 손을 내밀어 아리스텔라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 닿기 직전에 딱 멈추었다. 잠시 허공에서 방황하던 손을 되돌린 그는 히페리온을 향해 씩 웃어보였다.
“ 성녀님을 부탁드립니다, 대신관. ”
“ ……예. ”
히페리온의 대답은 간결했지만, 그 안에 스민 불쾌감을 모를 정도로 클로비스는 눈치가 없지 않았다.
‘ 이 남자도 성녀님을 마음에 두고 있는 건가. ’
성에 무지한 신전의 사제들이나 성기사라면 몰라도, 숱한 사람을 보아온 클로비스는 눈빛만으로 상대의 의중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인간을 미워할 리 없는, 가장 사제답다고 평하는 대신관 히페리온이 자신을 보며 얼굴에 불쾌함을 내비친다.
그런데도 클로비스는 히페리온의 불쾌한 표정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기분 좋았다.
“ 정말이지, 당신이 부럽네요. ”
“ 예……? ”
“ 제가 성녀님의 곁에 있을 자격을 얻어 태어났다면, 이렇게 쉽게 물러나지 않았을 텐데. ”
“ 클로비스 경.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전혀 모르겠습니다만. ”
“ 흔히들 첫 단추를 잘못 꿰었다고 말하지요. 그런 겁니다. ”
움찔. 히페리온의 어깨가 흔들렸다. 그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클로비스의 시선을 피했다. 성녀를 모셔오라는 임무를 받았음에도 히페리온은 아리스텔라를 돌아보지 않은 채 먼저 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 가시지요, 성녀님. ”
“ 네, 네에. ”
아리스텔라는 클로비스에게 살짝 인사하고, 히페리온을 따라갔다. 클로비스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복도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성녀에게 보폭을 맞춰주지 않는 매정한 대신관과 그를 열심히 쫓아가는 성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니 어쩐지 가슴에서 울컥, 뭔가가 치밀어 올랐다.
“ 쯧……. 복에 겨운 줄 모르고. ”
구시렁거리면서, 클로비스는 방문을 닫았다.
============================ 작품 후기 ============================
191,192화 연참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