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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방자와 도망자
[187]
아리스텔라에게 카루스 엔타타의 꽃차를 마시게 한 것은 성녀를 시험하기 위해서였다. 진실을 듣기 위해서였다.
분명, 그녀와 몸을 섞은 것은 사고였다.
그러나 그녀의 몸에 흠뻑 빠져버린 것은 운명이었다.
다시 한 번 아리스텔라를 만나기 위해 가문의 힘이 필요했다. 지위가 필요했다. 재물이 필요했다. 교황을 설득하여 다시 한 번 이 신전으로 들어와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
아리스텔라를 데리고 신전을 빠져나오면 성녀가 아니게 된 그녀에게 가짜 신분을 만들어주고, 자신의 부인으로 만들 셈이었다.
새하얀 성의 대신 새햐안 웨딩드레스를 입히고, 백금과 다이아몬드로 만든 티아라를 씌우고, 흰 레이스 장갑에 반지를 끼우는 순간을, 꿈에서나마 잠깐 상상했다.
사춘기 소년도 하지 않을 법한 허황된 망상이다. 그런데도 클로비스는 그녀와 결혼하는 상상을 할 때마다 가슴이 뛰고 행복해졌다.
사랑하는 여인이, 눈부시게 빛나는 미소를 지으며 제 품에 안기는 장면을 몇 번이나 그려보았던가.
◇ ◆ ◇ ◆ ◇
“ 절더러 당신을 배려하지 않았다며 화를 내셨지요. ”
“ 그건 당신이, 제게 묻지도 않고 교황 성하를 데려오고, 그런 짓을 했으니까……. ”
“ 하지만 배려했다한들 어차피 이룰 수 없는 꿈이었을 겁니다. ”
“ ……. ”
그녀는 신전을 떠나지 않는다. 자신을 따르는 사제와 성기사들을 두고는, 이 폐쇄된 신전의 문이 활짝 열리고 자유를 얻게 된다 해도 나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알고 있기에 클로비스는 아리스텔라의 의견을 고려하지 않고 발레리아누스를 설득했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그녀의 대답은 거절일 테니까, 강제적인 방법을 쓰더라도 어떻게든 자신의 곁에 둘 셈이었다.
그러나 계획이 틀어졌다. 클로비스는 아리스텔라를 억지로 끌어낼 수 없었다.
“ 당신을 만나기 위해 선택한 길이, 당신과 함께 하는 길을 막아버리는군요. ”
이는 어떠한 모순인가.
“ 클로비스 공작님. ”
아리스텔라는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클로비스의 손을 잡았다. 굳은살이 박인 단단한 손은 무척 크고 뜨거웠다. 클로비스는 본래 체온이 높은 것일까. 아리스텔라는 그의 손등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 당신이 앞으로 걸어갈 길은 무한히 넓고, 당신의 미래에는 수많은 행복이 있을 거예요. 그것을 벌써부터 포기하지 마세요. ”
“ 그렇군요. ”
한숨이 피식 나온다.
권력을 가지고도, 지위를 가지고도, 그가 가장 원하는 것은 손에 넣을 수 없었다. 오히려 그 권력과 지위가 사랑하는 여인의 곁을 지키는 일을 방해한다.
“ 저에게는 분명, 가문과 영지를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
황제 다음가는 권력을 지닌 신성제국의 대공에게는 그만큼의 의무가 따랐다. 결혼하여 후계를 만드는 것이 그것이다.
“ 성녀님이 제게 오시지 않는다면, 결국 저는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해야겠지요. ”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와 정략결혼을 하고, 형식적인 부부관계를 가진다. 그래서 아이를 낳으면 역할을 다했으니 부부 사이는 다시 소원해진다. 그래서 과연 행복할까. 자신도, 부인이 될 여인도,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도. 과연 행복해질 수 있을까.
클로비스의 부친은 정숙한 본처를 두고도 창부와 불륜을 저질렀다. 그런 아버지를 클로비스는 경멸했다.
그러나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첫사랑을 가슴에 품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니, 이제까지 더럽다며 경멸하던 아버지가 부러워졌다. 적어도 그는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있을 수 있었고, 자식까지 보았으니까.
‘ 그런 남자가 부러워지다니. ’
클로비스는 자신이 단단히 망가졌다고 생각했다. 이런 망가진 인간과 결혼하는 여인과 아이의 인생 또한 망가질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또 어떤 비극일까.
“ 인생이란 참으로 얄궂군요. 차라리 영원히 사랑을 모른 채로 있었더라면, 적어도 불행해지지는 않을 텐데. ”
“ 불행해질 리가 없잖아요. 당신을 따르는 사람도 많을 거고, 존경하는 이들도……. ”
“ 성녀님 당신 없이는, 어떤 행복도 의미가 없을 겁니다. ”
“ 그렇지 않아요. 분명……. ”
아리스텔라는 클로비스에게 그가 그녀를 알려 하지 않는다고 화를 냈다. 그리고 클로비스는 지금 정확하게, 그녀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었다.
“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
클로비스가 아리스텔라에 대해 몰랐던 것과 마찬가지로, 아리스텔라 또한 클로비스에 대해 몰랐다.
“ 당신이 아닌 여자를 사랑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
자신의 감정을 모를 만큼 어리석은 남자가 아니다. 그의 인생에 처음 찾아온 사랑이라는 따스하고도 애달픈 감정은, 이 신전을 떠나는 순간 영원히 잠들어 다시는 깨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리스텔라가 난처한 듯이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잡은 손을 놓지는 않았다. 클로비스가 손을 잡아끌자, 아리스텔라의 몸이 그쪽으로 기울었다.
“ 클로비스……! ”
“ 성녀님. 당신이 진정 여신의 현신이라면, 대답해 주십시오. ”
“ 뭐, 뭐를요? ”
“ 제 몸이 당신의 곁에 있지 못해도, 마음을 두고 가는 것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
사람의 몸은 육신, 마음은 혼을 의미한다고 한다. 마음만이라도 그녀의 곁에 있다면, 영혼을 잃고 껍데기가 되어버린 자신의 몸뚱이 따위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지 않을까.
“ 클로비스, 이러지 마세요. ”
“ 보답해주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부디 받아주십시오. ”
“ 하지만 그건, 으응. ”
거절의 말을 봉쇄하려는 듯, 뜨겁고 탄력 있는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달콤한 숨결을 모조리 빨아들이듯 성급하게 혀를 밀어 넣고 그녀의 입안을 샅샅이 훑었다. 숨이 막히는지 코로 작게 기침하는 소리가 들려도 놓아주지 않았다.
아리스텔라의 등을 쓰다듬던 손이 아래로 내려가 엉덩이를 쥐자, 그녀의 몸이 움찔 떨렸다. 여전히 작고 말랑말랑한 몸이다. 피부에 찰싹 달라붙어 사르르 녹아버릴 듯 부드러우면서도, 안개처럼 사라져버릴 듯 덧없었다.
“ 하아. 응……. ”
아리스텔라의 팔이 허우적거리다가 클로비스의 옷소매를 붙들었다. 매달리듯 안겨오는 그녀의 팔에 저항의 기색은 없었다. 아침에 그녀를 난간으로 밀어붙여 범하려 했을 때는 무서워하며 꺼려하는 기색이 있었는데, 지금은 당혹스러워하면서도 클로비스를 받아들이려 하고 있다.
“ 이제는 저항하지 않으시는군요. ”
“ 흣. 하으……. ”
“ 저를 동정하시는 겁니까? ”
눈가에 고인 눈물을 속눈썹을 깜박여 떨구어낸 뒤, 말을 잇지 못하고 시선을 돌리는 아리스텔라의 뺨에 입을 맞추며, 클로비스가 속삭였다.
“ 동정이라도 좋습니다. 지금 이 순간, 제 사랑을 받아주신다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