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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방자와 도망자
[186]
“ 로이드를, 기사단장으로 복직시키겠어요. ”
“ 성녀님……! ”
성기사들이 놀라워하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리스텔라는 빠른 속도로 말을 이어나갔다.
“ 로이드가 기사도를 어긴 일로 기사의 직위를 잃었지만, 제 시종으로 일하면서 그 죄를 갚았다고 생각해요. 이 신전 안에서 누구를 어떻게 처벌하고 용서할지가 오로지 제 뜻에 달린 거라면, 그가 잃어버린 기사도 또한 제 손으로 돌려줄 수 있겠죠. ”
이 신전 안에서는 성녀가 바라는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세상을 창조하고 다스리는 신. 비록 인간의 몸에 봉인된 처지라고는 하나, 이 신전 안은 여신의 현신인 그녀가 다스리는 작은 세계와도 같았다.
“ 로이드를 기사단장으로, 케인을 기사단의 부단장으로 재임명하겠습니다. 이견이 있는 분은 지금 말씀하세요. ”
방금까지는 웅성거리던 성기사들도 아리스텔라의 말에는 이견을 제시할 수 없었다. 성녀의 뜻은 절대적이었다. 성녀가 조화를 생화로 만드는 기적을 베푼 것을 목격한 그들은 자신들의 창조주이자 한 평생을 섬기며 살아야 할 여신의 현신에게 마음으로부터 복종했다.
“ 성녀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
성기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성녀의 명에 따라 기사도를 회복한 로이드를 다시 기사단장으로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유달리 이자크의 얼굴이 기뻐 보이는 것 또한 아리스텔라의 마음을 흐뭇하게 했다.
물론 아리스텔라는, 기사들이 로이드의 복직을 받아들인 사적인 이유가 존대한다는 것을 몰랐다.
‘ 로이드 단장이 기사의 직위를 잃은 채라면 계속 성녀님의 시종 자리를 독점할 테니까. ’
‘ 복직하게 되면, 우리에게도 성녀님의 곁을 지킬 기회가 오겠지. ’
성기사들은 기사도를 회복한 로이드를 다시 그들의 단장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기사도를 잃은 그가 계속해서 성녀의 옆자리를 독점하게 두는 것보다 백배 낫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기에, 아리스텔라는 감격한 얼굴로 순수하게 제 말을 들어준 성기사들을 향해 인사했다.
“ 제 뜻에 따라주어서 고마워요, 여러분. ”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승자를 위한 축하연과도 같았다. 훈훈한 미소를 주고받는 아리스텔라와 성기사들을 뒤로하고, 클로비스는 조용히 연무장을 나왔다.
◇ ◆ ◇ ◆ ◇
방으로 돌아온 클로비스는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성녀를 만나기 위해 교황을 설득하여 방문한 것이었다. 그녀에게 마음을 거절당하고 곁을 지키는 것 또한 실패로 돌아간 이상, 이제 그가 이 신전에 머물 이유는 없었다.
그녀를 만나고 싶다는 일념만으로 가문으로 돌아가 작위를 이어받고, 교황청을 드나들며 교황과 친분을 쌓아 비밀한 거래를 했다. 겨우 신전에 들어와 그녀와 재회할 수 있었는데, 클로비스의 마음은 혼자서 그녀를 생각하며 열병을 앓을 때에 비해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았다.
‘ 나는 도망치고 있는 건가. ’
마음을 거절당했다고 하여, 이렇게 도망치듯 달아나버리는 것은 비겁한 일이다. 다정한 그녀라면 클로비스에게 상처를 주었다며 자책할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클로비스는 달아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곳에 계속 있으면 자신이 비참해질 것 같았다. 사랑하는 아리스텔라가 상처받는 것보다도 자신이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나약한 태도에 깊은 자조가 흘러나왔다.
‘ 나는……. 참으로 약하고 어리석고, 철없는 남자였구나. ’
클로비스는 아리스텔라를 위해 전부를 바칠 수 없었다.
로이드는 그녀에게 자신의 전부를 바쳤다.
승패를 가른 것은 마음의 차이였다. 생사의 기로에서는 언제나 모든 것을 걸고 전력으로 싸운 자만이 승리를 쟁취했다. 클로비스의 패배는 당연한 결과였다.
승부의 세계에서 패자는 죽는다. 이제 자신에게 허락된 길은 꼬리를 만 도망자가 되어 이곳에서 떠나는 것뿐이다.
“ 클로비스……. ”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급히 짐을 꾸리느라 문을 미처 닫지 않았던 것이 떠올랐다. 클로비스는 뒤에서 들린 아리스텔라의 목소리에 돌아보지 않은 채로 조용히 답했다.
“ 승리의 영광을 거머쥔 당신의 기사를 축복하러 가셔야지요. 패배자의 몰골을 구경하러 오셨습니까? ”
무심코 날카로운 말이 나와 버렸다. 제 혀에서 튀어나온 칼날이 연약한 그녀를 상처 입힐 것이다. 자신의 상처를 감추려는 추악한 거짓말이 그녀의 가슴을 가르고 심장을 찌를 것이다.
마음에 상처를 입어 고통스러워하는 그녀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클로비스는 등을 돌린 채로 눈을 감았다.
“ 저는 외부인입니다. 당신의 종이 아니지요. ”
처음부터 가까워지는 것이 무리였다. 그녀에게 흥미를 보인 것이 잘못이었다.
“ 당신을 능멸한 죄를 묻고자 하신다면, 정식으로 재판을 청구하십시오. 제 죄는 명백하니 판결이 나오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어떤 처벌이든 겸허히 받아들이겠습니다. ”
“ 클로비스. 저는 당신을 처벌하려는 게 아니에요. ”
“ 성녀님의 종이 아니니까, 처벌조차도 하지 않겠다는 거로군요. ”
날카로운 말은 비수가 되어 상대의 가슴에 꽂힌다. 자신이 상처 입었다는 이유로 무고하고도 연약한 상대에게 칼날을 향하는 남자의 모습은 얼마나 비겁한가. 클로비스는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 클로비스. ”
아리스텔라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그녀가 자신의 옷자락을 붙들려는 것을, 클로비스는 몸을 돌려 뿌리쳤다.
불시에 눈이 마주쳤다. 클로비스는 고개를 얼른 돌리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그녀의 투명한 보라색 눈동자에 슬픔의 빛이 어린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리스텔라의 눈빛에 슬픔은 담겨 있지 않았다. 그녀는 가만히 클로비스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마치 투명한 거울처럼, 그의 모습을 비추고 있다.
“ 저는 당신이 다치길 바라지 않아요. ”
“ 다친 곳은 없습니다. 손목을 맞은 것도 딱 검을 놓칠 만큼의 충격만 가한 것이라, 지금은 욱신거리지도 않고요. 유능한 종을 두셨더군요. ”
“ 클로비스. 저는 당신이 다치길 바라지 않아요. ”
아리스텔라는 다시 한 번, 같은 말을 힘주어 전했다. 클로비스는 뭐라고 변명하려다가, 입을 다물고 그녀를 마주보았다.
“ 저와 함께 있으면, 당신은 상처 입을 거예요. ”
이미 많은 상처를 입었다. 여기서 더 무슨 상처를 입는다는 말인가. 차라리 그녀의 곁에 머문다면, 상처가 아물기라도 할 것을.
“ 그렇다면 성녀님. 만약 제가 사제가 되겠다고 한다면, 당신의 곁에 있는 것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
“ 아뇨, 그럴 수 없어요. ”
아리스텔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역시. 그녀는 클로비스를 싫어하는 것이 분명했다. 이토록 간절히 바라면 못이기는 척 들어줄 법도 한데, 아무래도 첫 만남부터 어긋난 것이, 단단히 눈 밖에 난 듯했다.
“ 예. 거절하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
“ 클로비스는 공작님이잖아요? 당신에게는 영지를 돌보고 가문을 이끌어야 할 책임이 있어요. ”
“ 예? ”
“ 책임에서 도망치면, 당신은 분명 후회할 거예요. ”
아리스텔라의 작은 손이 클로비스의 손을 잡았다. 희고 부드러운 손은 몹시 따스했다.
클로비스가 만약 아직도 집행관의 몸이고, 가문이나 작위에 속박되지 않은 몸이었다면 허락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클로비스는 가문으로 돌아갔고, 부친의 뒤를 이어 공작이 되었다. 한 가문을, 나아가 이 제국의 가장 넓은 지역을 통솔하는 군주가 된 셈이었다.
그런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사제가 되어 여신 위그멘타르의 신전에 들어온다면, 그의 남은 가족과 신하와, 영지민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자신이 마땅히 짊어져야 할 책임으로부터 도망치는 것.
아리스텔라는 그것을 가장 혐오했다.
클로비스가 책임으로부터 회피하여, 사랑하는 여인의 곁을 지키는 달콤함에 빠져있는 것을 아리스텔라는 바라지 않았다.
“ 당신이 선택한 길이잖아요. 도망치지 마세요. ”
“ 하하……. ”
클로비스는 허탈한 듯이 웃었다.
◇ ◆ ◇ ◆ ◇
처음 이 신전에 들어왔을 때만 하더라도, 그는 성녀와 사제들을 믿지 않았다.
애초에 집행관인 그가 황성에서 여신 위그멘타르의 신전으로 불려온 것이 성녀를 강간한 성기사의 형을 집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이 정말로 결계를 치고 이 폐쇄된 신전에서 사제답게 금욕하고 절제한다면 그런 사고가 일어날 리가 없지 않은가.
전부 한통속이라 생각한 클로비스는 일부러 신전의 결계를 깨고 침입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그들이 어떻게 나오는지를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결계를 깨뜨리는 것도, 골렘을 쓰러뜨리는 것도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 그 자신이 기사가 될 뜻이 없었을 뿐, 클로비스의 검술 실력은 제국에서도 손에 꼽히는 정도였으니까. 수행원도 없이 혼자서 전국을 돌아다니며 악인을 심판하려면 혼자서 골렘 여섯 마리쯤은 해치울 실력을 겸비해야 했다.
그런 클로비스를 이자크가 막아섰다.
그리고 성녀 아리스텔라와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