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금된 성녀와 비밀의 밤-185화 (185/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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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방자와 도망자

[185]

로이드와 클로비스의 대결은 교황 발레리아누스와 대신관 히페리온, 그리고 기사단의 성기사들의 입회하에 이루어졌다. 심판은 현 기사단장인 케인이었다.

클로비스는 성기사가 아니고, 로이드는 기사의 신분을 잃은 상태였다. 두 사람 모두 성검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였기에 무장 또한 금지되어, 투박한 연습용 소드만을 가지고 겨루게 되었다.

로이드는 이전 성녀의 시종이었을 때도 이 연무장에서 성기사들과 대련을 한 적이 있다. 익숙한 장소에서, 익숙한 대련을 한다. 그러나 성기사가 아닌 사람과 대련하는 것은, 정식 기사가 된 후로 처음이었다.

클로비스 또한 훈련소 교관을 그만두고 나온 후로는 검 한 자루만을 차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악인을 심판하였기에, 이렇게 정정당당하게 겨루어야 하는 < 대련 >은 무척 오랜만이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전력승부, 방심이 곧 죽음을 부르는 생사의 경계선을 넘나들 때 느끼던 예민한 승부감이 죽어버려 그는 작게 혀를 찼다.

“ 규칙도 무엇도 없이 겨루어야 진짜 승부가 될 텐데. ”

“ 무슨 일이 있어도 날 죽여야만 직성이 풀린다는 투로군. ”

“ 패자는 죽음, 승자는 생존. 양쪽의 목숨이 남아있다면 진정한 승패라고 볼 수 없지 않나. ”

클로비스의 불만족스러운 목소리에, 로이드는 피식 웃었다.

“ 내가 결투에 응한 것은 성녀님의 허락이 있었기 때문이야. 그게 아니라면, 나는 기사가 아닌 남자와는 대련 따위 하지 않거든. ”

클로비스가 극악무도한 악인과 맞서 싸웠던 것과 마찬가지로, 로이드 또한 성역에 침범하는 마수와 맞서 싸웠다. 클로비스나 케인과는 달리 로이드는 아직 사람을 직접 벤 적은 없지만, 승부의 감은 두 사람보다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 애석하지만 자네가 아무리 살기를 뿜어내도, 내가 동요할 일은 없어. ”

어떠한 상황에서도 냉정해질 수 있는, 자기 자신을 제어하는 능력. 그것을 습득하기 위한 수행이었다.

로이드는 무표정한 얼굴로 검을 거머쥐었다. 클로비스 또한 한손으로 들고 있던 검을 양손으로 잡았다. 둔탁한 빛을 내는 무거운 연습용 소드가 답지 않게 날카로운 빛을 뿜어냈다.

연습용 대련치고는 참으로 살벌한 분위기에, 기사들의 대련을 직접 목격하는 것은 처음인 발레리아누스가 난감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 클로비스 경이 저토록 진지해진 얼굴을 하는 것은 처음 봅니다. 이거, 대련 중에 사고가 나지 않기를 기도해야겠는걸요. ”

“ 교황 성하. 무서운 말은 하지 마세요. ”

아리스텔라가 질책하자, 발레리아누스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의자의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아무리 교황이라고 한들 여신의 현신인 성녀의 옆인데, 거만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히페리온이 눈살을 찌푸렸으나 발레리아누스는 태연했다.

“ 그나저나 클로비스 경이 이긴다면 성녀님의 곁을 지키는 기회를 얻게 된다니……. 대체 어떻게 할 요량인지. ”

“ 로이드는 지지 않을 거예요. ”

“ 그야 모르는 일이지요. ”

발레리아누스가 일부러 딴청을 피우며 속 긁는 발언을 하자, 심통이 난 아리스텔라는 옆에 있는 히페리온의 손을 잡았다.

“ 대신관님. 대신관님은 클로비스와 로이드, 둘 중 누가 이길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

“ 예, 예? ”

아리스텔라가 갑자기 손을 잡자 당황해 눈가를 붉히던 히페리온은 얼른 고개를 털어 정신을 차리고는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 성녀님의 축복을 받는 자가 승리할 겁니다. ”

“ 네? 제 축복이요? ”

“ 이 신전의 모든 것은 성녀님의 뜻에 따라 움직이니까요. ”

몸과 마음뿐 아니라 운명조차도. 히페리온은 진심으로 그리 믿으며, 아리스텔라의 손등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 두 사람 모두 다치지 않을 겁니다, 성녀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

두 사람의 자존심이 상할까봐 차마 말하지 않은 염려까지 눈치챈 히페리온의 배려에, 아리스텔라는 코끝이 찡해졌다.

“ 네. 저도 그러길 바라요. ”

“ 성녀님, 모든 것이 당신께서 원하시는 대로 이루어질 겁니다. ”

나란히 앉은 채로 손을 꼭 잡고 약속이라도 하듯 말을 주고받는 두 사람의 모습이 흥미로웠는지, 발레리아누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이거, 클로비스 경이 너무 불쌍하군요. ”

그리고는 손을 들어 허공에 성호를 그었다. 발레리아누스의 손끝에서 나온 실처럼 가느다란 하얀 신성력이 엉키더니, 클로비스의 검으로 뻗어나가 그의 검을 빛으로 감싸주었다.

“ 저라도 챙겨드리지 않으면. 성녀님을 대신하여 축복을 전합니다, 클로비스 경. ”

“ 예. 감사합니다. ”

전혀 감사하지 않다는 듯이 퉁명스럽게 내뱉고, 클로비스는 자세를 취했다. 신을 믿지 않는 그에게 축복 따위는 필요 없었다. 지금은 오로지 눈앞의 남자를 무찌르고, 성녀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싶다는 욕망만이 들끓었다.

“ 저는 클로비스 경에게 축복을 나누어 드렸는데, 성녀님께서는 로이드에게 축복을 내리지 않으시려는 겁니까? ”

“ 네? 아……. ”

“ 저는 괜찮습니다. ”

클로비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로이드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 성녀님의 축복을 받지 못했다고 승부에 패배할 만큼 나약한 남자가 아닙니다. ”

◇ ◆ ◇ ◆ ◇

시합은 로이드의 승리로 끝났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로이드와 케인이 대련할 때는 30분이 지나도록 승부가 나지 않아 팽팽한 대결을 펼쳤는데, 클로비스와의 시합은 단 5분도 걸리지 않았다.

먼저 돌격한 것은 클로비스 쪽이었다. 교황 발레리아누스의 축복을 받아 빛으로 감싸인 검은 투박한 칼날임에도 무척 예리해져, 로이드의 검을 반으로 갈라놓았다.

그러나 검이 갈라지는 그 순간, 로이드는 검에 베이는 것을 두려워않고 그대로 칼을 밀어 넣어, 검병을 쥐고 있는 클로비스의 손목을 가격했다.

다 부러진 검으로도 남자의 손목을 쳐서 검을 떨어뜨리게 만드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연무장 바닥에는 클로비스의 검과, 부러진 로이드의 검 조각이 널브러져 있었다.

하지만 로이드는 아직, 검병을 손에 쥐고 있었다.

검을 놓친 승부사와, 칼날을 잃어도 머뭇거리지 않고 손잡이로 상대를 공격한 로이드.

승패는 너무나도 명확했다.

“ 승자, 로이드. ”

케인의 묵직한 목소리가 연무장에 울려 퍼졌다. 클로비스와 로이드가 검을 겨룬 것은 지극히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승부가 결코 우연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었음을 연무장의 성기사들은 알고 있었다.

칼날이 부러진 순간 손잡이로 공격하지 않았더라면, 손속에 자비를 둘 생각이 없는 클로비스의 칼날에 로이드는 크게 다쳤을 것이다. 위기의 순간에 기지를 발휘해 검이 아닌 손잡이로 공격한다는 발상은 단순히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떠올린 것만은 아니었다.

성녀는 두 사람이 다치지 않기를 바랐다. 로이드 뿐만 아니라 클로비스조차도.

클로비스가 로이드를 죽일 기세로 달려든다는 것을 안 이상, 로이드는 자신이 다치지 않는 것과 동시에 클로비스를 다치지 않도록 하면서 그를 제압해야만 했다.

바닥에 널브러진 검 조각을 바라보며 로이드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칫했으면 두 사람 모두 크게 다쳤을 것이다. 예전의 자신이었더라면 위기의 순간 냉정을 잃어 이기기 위해 클로비스에게 상처 입혔을지도 모른다.

검이 부러지는 단 한순간에 기지를 발휘해 상처 없이 승부를 끝낸 것은, 전적으로 그동안의 수행 덕분이었다.

“ 성녀님께, 승리의 영광을. ”

로이드는 아리스텔라를 향해 몸을 돌려, 한쪽 무릎을 꿇어 예를 표했다. 아리스텔라의 눈에는 순식간에 승부가 끝난 것처럼 보여 얼떨떨했지만, 로이드가 대련에서 이겼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다치지 않았다는 것 또한 분명했다.

“ 로이드……! ”

아리스텔라는 아직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하지만 약간의 떨림과 기쁨은 감추지 못한 채로 자리에서 일어나 로이드에게 다가갔다. 로이드는 여전히 한쪽 무릎을 꿇은 채였지만, 살며시 고개를 들어 아리스텔라와 시선을 마주했다.

“ 승리를 축하해요. 나에게 뭔가 바라는 것이 있나요? ”

클로비스가 이기면 그녀의 곁을 지킬 기회를 준다고 했다. 그러나 로이드가 이기면 무엇을 줄지, 아직 정하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고 싶었다.

“ 없습니다. 저는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했을 뿐이니까요. ”

“ 네? 하지만 이겼잖아요……. 로이드에게 상을 주고 싶어요. ”

“ 그렇다면 성녀님께서 주시는 것을, 겸허히 받겠습니다. ”

남들 앞이니만큼 스킨십을 요구했다면 곤란하겠지만 어지간한 것은 들어줄 셈이었는데, 로이드는 자신의 욕망을 말하지 않고 아리스텔라의 뜻을 따르겠다고 말했다.

“ 으음. 그러면……. ”

아리스텔라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들어 성기사들을 쭉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케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케인의 깊고도 푸른 눈동자는 차분했다. 아리스텔라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다는 듯이, 일자로 입을 다문 채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 로이드를, 기사단장으로 복직시키겠어요. ”

============================ 작품 후기 ============================

185화부터 187화까지 연참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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