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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방자와 도망자
[184]
“ 당신이 제게 사과하신다면, 저도 그리해야 할 것 같으니까요. ”
“ 네? 아……! ”
커다란 손이 아리스텔라의 팔을 붙잡더니, 난간 쪽으로 이끌었다. 균형을 잡지 못하고 넘어지려는 그녀를 난간에 기대게 한 뒤, 클로비스는 가느다란 허리를 끌어안고 목덜미에 뜨거운 입술을 꽉 억눌렀다.
“ 아으, 클로비스……! ”
“ 정말로 제게 무례를 범했다고 생각하신다면, 저도 당신께 무례를 범하는 것으로 퉁치기로 하죠. ”
“ 무슨 그런……! 아, 아아! ”
옷자락을 벌리고 들어온 손이 허벅지 사이를 쓸자, 아찔해져 넘어질 것 같았던 아리스텔라는 서둘러 난간을 붙잡았다. 그녀의 물빛 긴 머리카락이 난간 위로 흘러내렸다.
“ 이러지 마세요, 여긴 밖이라고요……! ”
“ 밖이든 안이든 무슨 상관입니까? 어차피 당신의 성역인 것을. ”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클리토리스에 닿자 아리스텔라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키며 고개를 털었다. 밤새 노엘과 몸을 섞은 흥분은 자고 일어난 아직까지도 가라앉지 않았다.
“ 안 돼요. 누가 보면……, 으응! ”
싱그럽게 불어오는 아침바람이 옷자락을 흐트러뜨려, 난간에 상체를 걸치고 있는 그녀의 아랫도리가 훤히 드러났다. 누군가 아래를 지나간다면, 고개를 드는 것만으로 그녀의 음부를 보게 될 것이다.
“ 자, 다리를 더 벌리세요. 밖에서도 잘 보이도록. ”
“ 하읏, 아, 클로비스, 제발……! ”
“ 아름답고 숭고한 성녀님의 모습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부끄러워할 것은 없지 않습니까? ”
음순 사이에 중지를 밀어 넣어 위아래로 비비면서 엄지로 클리토리스를 자극하자, 아리스텔라는 저도 모르게 신음하며 다리를 벌렸다. 아랫배가 욱신거리면서 다리에 힘이 풀려 간다.
난간에 기댄 채 위태롭게 비틀거리는 허리를 한 팔로 안고, 클로비스는 뒷목을 깨물며 속삭였다.
“ 성녀님의 성역에 방문한 이방인에게 신의 은총을 내리는 의식입니다. 누군가 본다면 기뻐하며 기록으로 남길 일이지요. ”
“ 핫, 흐, 싫어……! ”
“ 성녀님의 은총을 받는다면, 저도 다시 태어날 수 있을지 모릅니다. ”
“ 은총에 기대느니, 자네는 그냥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는 편이 빠를 것 같은데. ”
뒤에서 들려온 묵직한 저음에 클로비스가 뒤를 돌아보려는 찰나, 남자의 손이 먼저 강한 힘으로 그를 끌어내어 반대쪽으로 처박아버렸다.
쿵!
균형을 잃은 채로 벽에 세게 부딪힌 클로비스는 긁힌 신음을 흘리며 욱신거리는 어깨를 부여잡았다.
그대로 공격해올 줄 알았는데, 남자는 클로비스에게는 관심조차 주지 않고 난간에 기대있는 아리스텔라를 향해 다가갔다. 다리에 힘이 풀려 난간을 부여잡고 주저앉은 그녀를 안아 일으켜, 흐트러진 옷자락을 정리해주었다.
“ 성녀님. 일어서실 수 있겠습니까? ”
“ 흣, 으……. 로이드……. ”
역대 최고의 성기사.
기품과 교양, 재능과 노력까지 무엇 하나 모자람이 없었던 은발의 귀공자.
자신의 동생을 빼앗아간 원수이자, 지금은 자신의 사랑마저 앗아가려는 남자.
기사단장의 직위를 박탈당하고, 죄인의 신분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타락하지 않은 그가, 아리스텔라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 늦어서 죄송합니다, 성녀님. 당신의 종 로이드, 지금 막 귀환했습니다. ”
“ 흐윽, 로이드……! ”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로이드의 이름을 부르며, 아리스텔라가 그의 품에 안겼다. 로이드는 다정하게 등을 쓸어내리며 그녀를 진정시켰다.
“ 죄송합니다, 성녀님. 제가 곁에 있지 않은 탓에……. ”
“ 자네가 없다고 성녀님이 아무것도 못할 거라고 생각하다니 자만이 심한데, 로이드. ”
“ 귀족 중의 귀족이라는 자가 성녀님을 추행하려 들다니, 스프라우트 대공가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겠어, 클로비스. ”
“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군. ”
깊은 적의로 불타는 검은 눈동자와 날카롭게 벼린 칼날 같은 자줏빛 눈동자가 마주쳤다. 로이드는 클로비스의 눈으로부터 감추려는 듯, 그녀를 조금 더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 사교계의 추방자 주제에……. ”
“ 내 스스로 나온 거야. ”
“ 맞서 싸울 자신이 없어서 꼬리를 말고 도망친 주제에 변명은. ”
◇ ◆ ◇ ◆ ◇
제국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다스리고, 가장 많은 재산을 보유했다는 스프라우트 대공가의 장남으로, 자유를 갈망하기에 후계자의 의무를 제쳐놓고 검 한 자루를 차고 전국을 떠돌며 악인을 심판하던 클로비스.
제국의 북쪽 영토를 다스리며, 이민족과 마수의 침입을 막아내는 유서 깊은 블랑 뤼미에르 후작가문의 정식 후계자였으나, 후처의 자식에게 작위를 물려주려는 가문 내의 싸움에 얽혀 작위와 가문을 버리고 성기사가 된 로이드.
타입이 다른 두 귀공자는 종종 비교 대상으로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으나, 실질적으로 두 남자가 교류한 일은 그다지 없었다.
클로비스는 이자크가 훈련소에 있을 적 동생인 그를 만나기 위해 잠시 교관으로 있었을 뿐 정식 기사는 아니었다. 사교활동에 치중한 클로비스와는 달리, 로이드는 사교회장에서 여인들에게 인기가 많았음에도 회장에 잘 나오지 않고 검술 수련에만 매진했다.
블랑 뤼미에르 가문이 후계자 논쟁에 휘말려 세력이 양분될 위기에 처하자, 로이드는 배다른 동생에게 가문을 선심 쓰듯 넘겨주고 성기사가 되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동생인 이자크는 로이드를 영웅처럼 생각했다. 지위나 재물이나, 여자에 집착하지 않는 로이드의 삶의 방식을 동경한다고 말했다.
그때만 해도 클로비스는 그저 심기가 뒤틀렸을 뿐이다. 사람들의 입에 비교 대상으로 오르내리는 것만으로도 신경이 쓰이는데, 정작 상대 쪽에서는 자신을 전혀 염두에도 두지 않은 듯 귀족 사회의 속박에서 벗어나 훌쩍 떠나버린 것이 화가 났다.
그래서 클로비스는 자신의 자유를 찾아 작위 승계를 미루고 집행관이 되었다. 자유롭게 전국을 돌아다니며 악인을 심판하고 정의를 구현하는 일은 확실히 어느 정도의 해방감은 있었다.
하지만 타인의 평가로부터 자유로워져도, 여전히 그 자신이 갈망하는 바로부터는 자유로워질 수 없었다.
클로비스는 이자크를 더러운 창녀의 자식이라고 매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제 배다른 동생에게 형으로서 존경받고 싶어 했다. 가문의 일원이 되고 싶다며 자신을 찾아와 굽히길 바랐다. 그러면 받아줄 셈이었다.
하지만 이자크는 그를 동경하지 않았다. 신전에 몸담고 평생 계율에 따른 삶을 살아야 하는 성기사 로이드의 삶이 더 멋지다며 그를 따라 성기사단에 입단했다.
서류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그저 피로만 존재하는 가족의 연을 끊고.
클로비스는 그 소식을 듣고 속이 뒤틀렸다.
최고의 성기사라 칭송받으며 여신을 모시는 신전에 기사단장으로서 들어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하더라도 그랬다.
교황청으로부터, 신전에서 불미스러운 사고가 발생했다며 클로비스에게 형을 집행해달라는 연락이 왔을 때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참형을 받을 죄인의 이름이 청렴하고 고고하다며 이름이 높았던 성기사 로이드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크게 놀랐다.
겁간이라니, 거리의 무뢰배나 허접한 가문의 애송이들이나 저지를 법한 일이다. 이런 치졸하고 간악한 인간을 제 동생은 그리 존경하며 따랐던 것인가. 클로비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인간을 성기사로 받아들이고 기사단장으로 추대하는 교황청과 신전이 멀쩡한 곳일리 없다. 신을 믿지 않는 클로비스의 눈에는 그들이 전부 사기꾼으로만 보였다. 이제야 로이드라는 실마리를 잡은 셈이다.
하지만 클로비스는 진상을 밝혀내지 못했다.
아니, 그가 밝혀낸 진상은 그가 기대하던 것이 아니었다.
성녀 아리스텔라는 유약하고 어리숙해 보일지언정 강하고 고고한 인물이었고, 로이드 또한 비굴하고 간교한 무뢰배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화가 났다.
무엇에도 더럽혀지지 않는 순결한 성녀와 마찬가지로, 그 어떤 오명을 뒤집어쓰더라도 로이드는 고고했다.
자신과는 달리.
◇ ◆ ◇ ◆ ◇
“ 성녀님. 저는 당신을 배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내치시면서, 당신을 강제로 범한 극악무도한 저 남자는 받아들이겠다고 하시는 거군요. ”
“ 그런 게 아니에요, 클로비스. 로이드는……. ”
“ 내가 성녀님의 곁을 지키는 것은 속죄하기 위해서다. ”
로이드는 단호하게 대답하고 몸을 일으켰다. 성녀를 제 뒤로 감추고, 그가 클로비스를 향해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 성녀님께서 명령하신다면,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가슴을 갈라 심장을 뽑아버릴 거다. ”
“ 로, 로이드! 무서운 말은 하지 마세요……! ”
로이드의 과격한 말에 아리스텔라가 화들짝 놀라 그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 하지만 성녀님께서는 내게 살아서 속죄하라고, 곁에 남아 평생 용서를 빌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성녀님의 명에 따라 살아가고 있는 거야. ”
“ 자애롭고 상냥한 성녀님의 마음을 흔들어 옆자리를 꿰찬 주제에, 잘난 듯 떠벌이지 마! ”
클로비스가 소리쳤다. 아리스텔라는 클로비스가 어째서 이토록 화를 내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아리스텔라가 노엘과 섹스하는 장면을 목격하고도 화를 내지 않았다. 아니, 분명 그 강제적인 입맞춤과 애무에서는 분노가 느껴졌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폭발적인 형태는 아니었다.
어째서일까. 클로비스의 분노는 단순한 질투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열등감, 박탈감, 허탈함.
그 모든 추악한 감정이 꾸물꾸물한 진흙처럼 질퍽하게 쌓여 섞여 들어간다.
“ 성녀님. 제게 기회를 주십시오. ”
“ 네, 네? 뭐를요……? ”
“ 제가 로이드를 이긴다면, 제게도 당신의 곁을 지킬 기회를 주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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