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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된 성녀와 비밀의 밤-183화 (183/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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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방자와 도망자

[183] 추방자와 도망자

알몸의 두 남녀는 시트를 몸에 감고 침대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클로비스는 침대 옆 테이블의 의자에 한쪽 다리를 꼬고 앉아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 하얀 제복을 입고 있어 더욱 두드러져 보이는 구릿빛 피부.

알몸에 시트만 두른 두 사람과는 달리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단정한 차림새의 클로비스는 밤새 사랑을 나눈 두 사람보다 더욱 지쳐있는 듯했다.

“ 빈 방이라도 더 있었더라면 그곳에서 잤을 텐데, 다른 방은 문이 잠겨 있더군요. ”

“ 죄, 죄송해요……. ”

“ 침대가 저래서야 제가 느긋하게 낮잠을 잘 수 있을 리도 없고. ”

두 사람의 체액 자국이 군데군데 묻어난 침대 시트를 클로비스가 가리키자, 노엘과 아리스텔라는 움찔 어깨를 떨며 사과했다.

“ 죄송합니다……. ”

“ 뭐, 어차피 저는 방문객일 뿐이고, 이 신전의 모든 것은 성녀님의 소유이니 이 방 침대를 사용하셔도 상관은 없지만 말입니다. ”

“ 으읏……. ”

귀 끝까지 붉어져서 난처하게 시선을 주고받는 노엘과 아리스텔라를 번갈아 보고는, 클로비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 성녀님. 새로운 방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무리 제가 집행관 시절에는 하급여관이나 폐가에서도 잠을 잤다지만, 당신이 다른 남자와 정사를 나눈 침대에서 잠들고 싶지는 않아서 말입니다. ”

“ 클로비스. 간밤에는 정말……. ”

“ 그럼 저는 한바퀴 산책이라도 하고 오겠습니다. ”

쩔쩔매는 두 사람을 뒤로하고, 클로비스는 성큼 방을 나와버렸다.

◇ ◆ ◇ ◆ ◇

새하얀 신전의 복도에 남자의 구두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이 지날 일이 없는 조용한 복도를, 흰 제복에 붉은 망토를 두른 남자가 빠른 걸음으로 걸어간다.

어젯밤 방으로 돌아왔을 때, 침대 위에서는 두 남녀가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반투명한 차양 너머로 남자와 여자의 알몸이 비쳤다. 뜨거운 숨을 몰아쉬며, 정신없이 서로를 탐하는 움직임은 음란하기 그지없었다.

클로비스가 처음 성녀와 관계를 가졌을 때는 그의 동생, 이자크가 함께 있었다. 그 다음에는 교황 발레리아누스가 그녀를 범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제 방의 침대 위에서 사랑하는 여인이 다른 남자에게 안겨 우는 것을 보아야 했다.

성녀가 다른 남자와 성관계를 가지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녀의 몸이 음란하며 욕망에 약하다는 것도. 그러나 노엘의 품에 안겨 신음하는 아리스텔라를 보았을 때, 클로비스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강렬한 충격을 받았다.

클로비스나 발레리아누스에게 범해질 때 들었던 신음과는 달랐다. 분명 그때와 같이 음란하게 울면서 허리를 흔들고 있는데, 이상하게 그녀가 다른 사람으로 보였다.

여신의 현신으로서가 아닌, 인간 여인으로서 절정의 쾌감에 울부짖는 그녀의 모습은 미치도록 아름다웠다.

그녀는 단 한 번도 클로비스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그의 품에 안길 때가 훨씬 더 적극적이었고, 훨씬 더 기분 좋은 듯이 교성을 질렀는데도, 마치 이제까지 그녀가 보여준 모습이 거짓말처럼 흐려졌다.

그것이 바로 감정의 차이이자 진심의 무게라고, 클로비스는 생각했다.

클로비스나 발레리아누스와 관계할 때의 성녀는 분명, < 누구라도 마찬가지다 >라고 생각하는 듯 보였다. 그녀에게 쾌락을 선사할 수 있다면 어떤 남자가 저를 범하든 상관없다는 듯이, 오로지 제가 느끼는 쾌락에만 집중해 울부짖었다.

그런데 노엘과 섹스할 때의 아리스텔라는, 분명히 노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노엘을 느끼고 있었다. 쾌락을 주는 도구나 마찬가지인 남자의 성기가 아닌, 자신을 욕망하는 남자가 누군지를 확실히 인식하고 있었다.

쾌락을 갈구하며 탐욕스레 제 것을 빨아들이던 성녀의 모습이 생각난다. 마치 온몸이 욕망에 잠식당한 듯 정신없이 몸을 섞었던 그때보다, 노엘과의 관계를 지켜보는 것이 훨씬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 그것이 진짜 성녀님의 모습인가. ’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클로비스가 사랑하는 여인은, 그에게 진짜 자신의 얼굴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클로비스는 < 진짜 그녀 >를 기쁘게 해준 적이 없었다. 아니, < 진짜 그녀 >는 클로비스와 섹스한 적이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 교황 성하와 관계를 가지는 성녀님을 보고 느꼈던 이상한 위화감의 정체를 이제야 알겠군. ’

분명 성녀의 몸은 매혹적이었다. 그녀와의 아찔한 경험 이후로 클로비스는 다른 여자를 안을 수 없게 되었으니까.

그러나 클로비스가 반한 것은 단지 성교의 기교가 뛰어난 여인이 아니었다. 그가 사랑한 것은, 순진하면서도 강인한 여인이었다.

아무 남자에게나 안겨 헐떡거리던 음란한 여인이 아니라, 자신에게 욕정하는 남자와 하나가 되어 신음하는 성녀 아리스텔라였다.

‘ 내게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시지 않겠지. ’

클로비스는 고개를 들고 창밖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아침 해가 떠 밝은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발코니로 나간 클로비스는 난간에 기대어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파란 새벽하늘. 검게 보이는 사철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선 정원. 싱그러운 아침 공기.

차라리 비라도 내렸더라면 비를 맞으며 실연당한 울적함을 쏟아낼 수 있었을 것을, 하늘은 그에게 슬퍼할 여유조차도 마련해주지 않았다.

“ 후우……. ”

“ 저어, 클로비스……. 공작님. ”

뒤에서 들린 성녀의 목소리에 움찔 어깨가 흔들렸다. 클로비스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얼굴에서 표정을 지우고 뒤를 돌아보았다. 새하얀 성의를 입고, 머리를 가지런히 빗어내린 아리스텔라가 뒤에 서있었다.

목욕을 하고 온 것일까, 머리카락 끝이 살짝 젖어 있었다.

“ 새로운 방이 준비되어 알려주러 오셨습니까? 성녀님. ”

“ 당신에게 사과를 하러 왔어요. ”

아리스텔라는 옷소매를 만지작거리며 머뭇거리다가, 클로비스를 향해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 제가 부주의하여 폐를 끼쳤습니다. 무례를 용서해주세요. ”

“ 무례라……. 무엇이 무례하다는 말입니까? ”

“ 네……? ”

“ 당신은 이 신전의 주인입니다. 그리고 여신 위그멘타르의 현신이시죠. 신이 인간에게 무엇을 하든 그것을 < 무례 >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방금 하신 말씀, 다른 사제나 성기사들이 들었다면 기겁했을 겁니다. ”

“ 그런 게 아니에요! ”

“ 당신이 진짜 성녀라면, 말입니다. ”

예의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지켜야 하는 것. 그녀가 진정 여신이라면, 위대한 신이 한낱 인간 따위에게 예의를 차려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천재지변과 전염병으로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대 재앙. 과연 재앙을 일으킨 신이 인간에게 사과했던가. 오히려 인간이 신에게 부디 자신들의 죄를 용서해달라며 제물을 바치고 기도를 올렸다.

인간의 세상에 재해를 일으키고 인간 세상에 피해를 입힌 것은 신인데, 정작 참회하고 기도하는 것은 가해자인 신이 아닌 피해자인 인간이라는 이상한 현실.

클로비스가 신을 믿지 않는 이유는 그 불합리함 때문이었다.

“ 성녀님. 당신이 제게 사과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

“ 그야……. 당신에게 추태를 보였잖아요. 당신의 방에서, 다른 남자와……. ”

“ 이 신전은 성녀님의 것입니다. 그리고 성녀님의 사생활에 외부인인 제가 왈가왈부할 수는 없지요. ”

클로비스는 아리스텔라에게 한걸음 다가가 허리를 굽혀, 그녀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난처한 기색을 보이는 보라색의 눈동자는 여전히 맑고 깨끗했다.

참으로 신기한 여인이다. 그토록 음란하게 남자와 몸을 섞고 절정에 올라도, 그녀의 눈빛에는 결코 더럽고 추잡한 욕망은 떠오르지 않는다.

성서에는 음행을 악으로 규정하고, 인간 사회에서도 문란한 생활을 하는 자는 지탄을 받는다. 그런데 그녀의 눈을 바라보면 이 세상의 그 어떤 죄와 타락이라도 깨끗하게 정화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 저를 거절하시고 다른 남자와 몸을 섞는다 한들, 그것은 당신의 자유입니다. ”

“ 읏, 아……. ”

차마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망설이던 정곡을 찔린 건지, 아리스텔라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첫사랑은 홍역과도 같은 거라고 한다. 아무리 아파도 언젠가는 고통이 끝나고 상처가 아문다. 단지 흉터가 남을 뿐. 그 흉터를 안고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

클로비스는 제 처지가 우스웠다.

“ 제 마음을 받아주시고 그런 일을 저지르셨다면 그야 저도 화가 날 테지만, 저는 당신에게 화를 낼 처지가 되지 못하니까요. ”

“ 미안해요……. ”

민망하고 난처해서 붉어진 눈가에 눈물이 고인다. 그것을 바라본 클로비스는 문득 나쁜 마음이 들었다.

“ 사과하지 마십시오, 성녀님. ”

그녀가 정말로 성녀라면, 모든 죄와 타락을 정화해버리는 존재라면, 상처를 입어도 흉터가 안 남지 않을까.

“ 당신이 제게 사과하신다면, 저도 그리해야 할 것 같으니까요. ”

“ 네? 아……! ”

커다란 손이 아리스텔라의 팔을 붙잡더니, 난간 쪽으로 이끌었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화는 오전 중에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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