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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일탈
[178]
노엘은 아리스텔라를 부축하며 남쪽 탑에서 중앙 건물로 이어지는 회랑을 지나고 있었다. 밤은 깊었으나 달이 밝았기에 돌아가는 길은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아무리 똑바로 걸으려 해도 술에 취한 두 사람의 발걸음이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점에 있었다.
“ 으응……. ”
“ 에구구, 성녀님. 발목 조심하세요. 삐끗하기라도 하면 큰일이에요. ”
아리스텔라가 비틀거리며 앞으로 고꾸라질 뻔한 것을 겨우 붙잡아 제 쪽으로 몸을 기대게 했다.
그녀를 업고 가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혼자서 걷기도 힘든데 성녀를 업은 채로 무사히 그녀를 방으로 데려다줄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업고 가다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성녀가 다칠지도 모른다.
“ 성녀님, 조금만 기운 내세요. 금방 방으로 데려다 드릴게요. ”
“ 노엘, 으응……. ”
“ 서, 성녀님! ”
나른해져서일까, 아리스텔라가 가늘게 한숨을 흘리며 노엘을 끌어안았다. 평소에도 성녀의 몸은 무척 말랑하고 따뜻하다고 느꼈지만, 술 때문인지 평소보다 체온이 높은 것 같았다.
뺨도 뜨겁고, 숨도 촉촉했다. 달콤한 향기에 머리가 멍해진다. 노엘은 아리스텔라를 안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술 덕분인지 기분도 좋아 보이고, 지금이라면 노엘이 몸을 만지려 해도 거부하지 않을 것 같았다.
‘ 아니, 아니지. ’
문득 나쁜 생각이 들었으나, 노엘은 얼른 고개를 가로저어 사특한 생각을 떨쳐버렸다.
회랑은 양 옆이 탁 트인 개방된 공간이었다. 비록 밤이 깊은 시각이라 할지라도, 밤 산책을 하는 누군가가 두 사람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엄한 짓을 하려다가 발각되기라도 한다면 정말 곤욕을 치를 것이다.
노엘은 제 뺨을 철썩 때려서 정신을 차린 뒤, 아리스텔라의 팔을 제 어깨에 걸치고 다른 한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안아 부축했다.
얇은 성의 너머로 느껴지는 그녀의 몸은 여전히 말랑하고 따뜻했다. 이런 유혹적인 몸을 옆에 두고 인내하라는 것은 고문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노엘은 끙끙거리며 아리스텔라를 데리고 중앙 건물로 들어갔다.
◇ ◆ ◇ ◆ ◇
“ 후우, 후우……. ”
제대로 걷기도 힘든 상태로 유혹적인 여인의 몸을 부축하고 들어오느라 노엘은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 그녀를 부축하는 일이 힘들어서 열이 오르고 땀이 났다. 물론 그가 힘들어하는 이유는, 그녀의 몸이 무겁거나 발걸음이 똑바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은 아니었다.
“ 이쪽이 맞던가……? ”
노엘이 문고리에 손을 대자 무거운 문이 스르륵 열렸다.
“ 평소 사용하지 않는 방은 잠가두니까, 여기가 맞겠지……. ”
방안으로 아리스텔라를 부축해 들어온 노엘은, 중앙의 침대 쪽으로 다가가 차양을 걷었다.
“ 성녀님, 누우세요……. ”
“ 으응, 네에……. ”
침대에 반쯤 몸을 걸치고 엎드린 아리스텔라의 몸을 제대로 침대 위로 올려주자, 그녀가 폭신한 이불에 얼굴을 묻으며 나른하게 한숨을 쉬었다.
“ 고마워요, 노엘. ”
“ 별말씀을요. ”
노엘은 베개를 아리스텔라의 머리에 받쳐주고는, 몸을 일으켰다. 이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 으왓! ”
갑자기 핑 하고 눈앞이 돌아, 노엘은 침대에 풀썩 쓰러졌다.
“ 끄으응……. ”
“ 노엘, 어디 아파요? ”
“ 아, 아닙니다. ”
긴장이 풀려서일까, 갑자기 술기운이 돌아서일까. 노엘은 제대로 일어설 수가 없었다. 누워 있으면 괜찮은데, 몸을 바로 세우면 눈앞이 핑그르르 돌았다.
‘ 끄응. 술을 너무 마셨나. ’
달콤한 맛이 좋아서 좀 많이 마셨던 것도 같다. 나중에는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듯 벌컥벌컥 마셔버렸다. 도수가 강한 술은 아닌 것 같았지만, 술이 약한 자신에게는 조금 과했는지도 모르겠다.
“ 죄송합니다, 성녀님. 그, 돌아가야 하는데……. ”
“ 으응, 괜찮아요. ”
노엘이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것을 눈치챘는지, 아리스텔라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노엘의 뺨을 쓰다듬었다. 노엘의 뺨도 매끄럽고 촉촉했다. 곱슬곱슬한 붉은 앞머리를 쓸어 넘기고, 아리스텔라는 노엘의 눈을 바라보았다. 동그란 초록색 눈동자에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 노엘. 나를 원망하고 있나요? ”
“ 예……? ”
“ 대신관님이 당신을 내 시종으로 임명했는데, 제가 거절했으니까. 속상해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
“ 아……. ”
로이드가 성녀를 겁간한 일로 성기사들을 믿을 수 없다는 여론이 사제들 사이에서 형성되는 바람에, 당시 시종이었던 케인이 자격을 잃고 대신 노엘이 성녀의 시종이 되었다.
그러나 그날 아리스텔라는 성기사들을 데려와 그들에게 축복을 나누어주어 미사를 보게 하고, 케인을 다시 자신의 시종으로 삼았다.
성녀의 시종이 되었지만, 노엘은 한 번도 아리스텔라의 시중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 됐습니다. 성녀님이 성기사들을 편애하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
“ 편애 같은 게 아니에요……. ”
“ 편애하시잖아요, 성기사들을. ”
케인이나 로이드는 성녀를 훌쩍훌쩍 안아들고 가버리는데, 노엘이 몸을 만지면 아리스텔라는 화를 냈다. 그들과는 밤을 보내면서 아리스텔라는 한 번도 노엘을 자신의 침실로 부르지 않았다. 노엘은 그것이 자신이 사제라서, 성녀의 사랑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 뭐, 그래도 저는 성녀님께 신성마법을 가르쳐드리고 있으니까요. 그렇게라도 쓸모가 있으니 다행이죠. ”
그렇게 말하면서, 노엘은 아리스텔라로부터 등을 돌렸다. 건방진 태도라는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술기운에 감정적이 된 때문일까, 노엘은 갑자기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느끼고 입술을 깨물었다. 좀 전까지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아리스텔라가 지난 일을 언급하니 그때 느꼈던 당혹스러움과 모멸감이 떠올라 서러워졌다.
“ 노엘……. ”
아리스텔라의 손이 노엘의 어깨에 닿았다. 노엘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작은 손이 머뭇거리며 어깨를 쓰다듬더니, 이내 멀어졌다. 포기하고 자려는 걸까. 한숨을 쉬며 자신도 눈을 감으려는 찰나, 따스하고 보드라운 것이 등에 닿았다.
“ 나 때문에 상처 입었군요. 미안해요. ”
등에 닿는 따뜻한 몸과 말랑한 가슴, 가느다란 팔이 제 허리를 안는 감촉에 노엘은 갑자기 술이 확 깨버렸다.
“ 이, 이러지 마십시오. ”
“ 하지만 화가 나있잖아요. ”
“ 화가 난 것은 아닙니다. 그저……. ”
차별당하고 싶지 않았다. 성녀가 자신을 필요로 해주기를, 그의 능력을 인정해주기를 바랐다. 노엘을 찾아와 말을 걸고, 그를 바라보며 웃고, 즐거워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녀를 안게 해주기를 원했다.
마지막 소원은, 참으로 엉뚱한 욕망이지만.
“ 성기사들에게는 허락하시는 것을, 제게는 허락해주시지 않으니까, 속상했던 것뿐입니다. ”
“ 성기사들에게 허락하는 일을 당신에게는 허락하지 않았다고요? 그게 뭔데요? ”
정말로 짐작이 가지 않는다는 듯 되묻는 태도에 조금 울컥해서, 노엘은 도로 몸을 뒤집어 아리스텔라를 마주보았다. 침대에 누워있던 터라 두 남녀의 거리는 무척 가까웠다. 노엘은 천천히 손을 뻗어 아리스텔라의 어깨를 안았다.
“ 성기사들과는, 그……. 바, 밤을 보냈다고, 말씀하셨잖아요. ”
미사실에서, 모든 사제들이 보는 앞에서 성녀가 한 말은 노엘에게도 충격적이었다. 그녀와 몸을 섞은 전적이 있음에도 그랬다. 크리스와 성관계한 적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을 때는 예상치도 못한 상황이라 당황해서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는데, 나중에 돌이켜 생각하니 자신만 뒤쳐진 것 같아 속상했다.
이 신전에 들어와 한평생을 성녀를 위해 살기로 맹세한 것은 모두가 같은데, 누군가는 그녀와 몸을 맞대는 은총을 얻고, 누군가는 그러지 못한다는 사실이 억울했다.
“ 노엘. 저를 안고 싶은 거예요? ”
“ 읏……. ”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오자 노엘은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돌렸다.
“ 노엘. 저는요, 저를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는 섹스 같은 거 하고 싶지 않아요. ”
“ 사, 사랑하지 않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
“ 그래요? 노엘은 저를 사랑하나요? ”
“ 예? ”
성녀의 질문에 노엘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시선을 피하는 것도 잊고 눈을 마주쳤다.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코앞에 성녀의 얼굴이 있었다.
“ 당신은 저를 사랑하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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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 179화 연참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