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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일탈
[177] 작은 일탈
노엘은 아리스텔라를 남쪽 탑으로 안내했다. 주방은 1층 정문에서 가장 오른쪽에 있었다. 뒤로는 식량 창고가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 빙고가 있었다. 빙고에는 얼음과 함께 썩지 않게 장기간 보관해야 하는 식량이 있다고 노엘이 설명했다.
“ 어지간한 것은 무인 마차로 조달하지만, 갑작스럽게 필요한 재료가 생기기도 하니까요. ”
“ 남쪽 탑에도 굉장히 여러 가지가 있군요. 몰랐어요. ”
“ 이 위층에는 만찬장이 있습니다. ”
사제의 방으로는 요정들이 식사를 배달하고, 성기사들은 기사단 건물의 큰 식당에서 단체로 식사를 한다. 성녀의 식사를 준비하는 것은 시종의 일이었기에 남쪽 탑의 만찬장은 실제로 쓸 일이 별로 없었다.
이 신전에 손님이 방문하는 것조차 수백 년간 없었던 일이고, 방문한다 해도 겨우 한, 두 명이었기에 요정들이 방으로 식사를 날랐으니 말이다.
“ 주방은 이쪽인가요? ”
“ 예. 문을 열어 드리겠습니다. ”
잔해가 담긴 은쟁반을 한쪽 손으로 고쳐 들고, 노엘이 문고리에 손을 짚었다. 그러자 신성력에 의해 무거운 문이 스르륵 열렸다.
주방은 깨끗했다. 칠십여 명의 사제와 성기사들의 식사를 준비해야하기 때문인지 공간이 넓긴 했지만, 관리가 잘 되어있어 내부는 깨끗했다. 음식물 쓰레기가 보이거나 냄새가 나지도 않았다.
식사 시간도 아닌데 주방에 함부로 들어와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으나 기왕 여기까지 온 김에 조금 더 둘러보고 싶었기에 얌전히 노엘을 따라갔다.
노엘은 벽에 붙어있는 마력석을 더듬어 주방의 불을 켠 다음, 그릇을 반납하는 선반 같은 것 위에 못 먹게 된 케이크의 잔해와 깨진 유리그릇이 담긴 쟁반을 올려놓았다. 그러자 어디선가 나타난 요정들이 쟁반과 잔해를 들고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 요정들은 이 시각에도 일을 하는군요. ”
“ 마법으로 만들어진 것들이니까요. 요정들에게는 휴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
정해진 명령만을 수행하는, 의지가 없는 도구와도 같은 존재. 아리스텔라는 문득 이 신전에 사는 자신들의 처지 또한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폐쇄된 신전에 감금되어, 한평생 바깥세상과 동떨어져 살아가야 하는 자신들이 과연 제대로 사람대우를 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 케이크는 어디 있어요? ”
“ 이쪽 보관실입니다. 아마 남은 것이 있을 겁니다. ”
노엘이 나무로 된 보관실의 문을 열자, 주방에 들어왔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달콤하고 고소한 향기가 코를 찔렀다.
“ 와……. ”
진열대에 늘어놓은 빵들은 갓 구운 것처럼 노릇하면서도 따뜻했다. 노엘의 설명으로 이 보관실은 신성력으로 온도와 습도를 조절하며 부패를 막기에 언제까지고 갓 구운 상태로 보관이 가능하다고 한다. 대체로 그날 구운 빵은 그날 처리하지만, 간혹 남는 것들은 보관실에 두었다가 분해하여 거름으로 만든다고.
“ 그럼 어차피 오늘 먹지 않으면 다 버려지겠네요. ”
“ 성녀님은 빵을 좋아하시나요? ”
빵을 좋아한다기보다는.
“ 맛있는 걸 싫어하는 사람은 없죠. ”
담담하게 대답하며, 아리스텔라는 유리로 만들어진 케이크 진열대로 걸어갔다.
진열대 위에는 노엘이 가져온 것과 동일한 종류로 보이는 생크림 케이크가 있었다.
화려하게 데코레이션이 되어 있는 케이크에는 작게 잘라 모양을 낸 과일과 화이트 초콜릿으로 만든 자그마한 마을 풍경이 올려져 있었다. 특별한 날도 아니고, 그저 평상시 사제와 성기사들의 식사 준비를 하는데 굳이 이렇게 정성스러운 케이크를 만들 필요가 있나 의아할 정도다.
고구마 파우더로 만든 짚더미와 초콜릿으로 만든 사람, 키위로 만든 수풀과 사과를 깎아 만든 오두막집, 방앗간 옆에는 귤의 알갱이를 낱낱이 늘어놓아 새들이 모여 있는 장면을 만들어 두었다.
이런 것을 만들어놓고 정작 먹을 사람들에게는 제대로 보여주지도 않다니 참으로 아까웠다.
“ 이 케이크랑 과일 타르트랑, 마늘빵이랑……. 이걸 다 먹을 수 있을까요? ”
“ 다, 다 드시려고요? ”
“ 안 먹으면 버려진다면서요. 아깝잖아요. ”
“ 아까워하실 것 없습니다. 원하신다면 매일 드실 수 있는걸요. ”
오늘은 성녀가 성기사들과 함께 멀리 온천까지 나갔기에 음식이 평소보다 많이 남은 편이었다.
하지만 곡물도 과일도, 신의 축복으로 만들어진 땅에서 난 것들은 결국 다시 땅으로, 신의 곁으로 돌아가므로 아쉽게 여길 것은 없었다.
금욕과 절제를 중시하는 삶과는 달리, 사제들이 무언가를 ‘아깝다’고 여기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모든 것에는 각기 만들어진 의미가 있으니, 식사는 먹을 만큼만 만들되 남는다고 해서 억지로 먹지 말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 그래도 먹을래요. ”
배가 고픈 것은 아니지만 달콤하고 맛있는 케이크를 보니 욕심이 났다. 아리스텔라는 타르트를 들고, 노엘은 케이크와 마늘빵을 들고 보관실을 나왔다.
어디서 먹으면 좋을까,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주방의 구조를 파악하던 아리스텔라의 눈에 뭔가 빽빽한 유리병이 들어선 저장고 같은 것이 들어왔다.
“ 노엘. 저쪽에 있는 건 뭔가요? ”
“ 저쪽에는……. 아마 제주를 저장하는 창고가 있을 겁니다. ”
“ 술 창고요? 이런 곳에? ”
그야 주방과 식량 창고와 빵 보관실이 있으니 와인 저장고가 있어도 놀랍지는 않지만, 뜻밖이었다.
아리스텔라는 본래 술을 즐기는 성격이 아니었다. 축제 때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 한 모금 정도를 마셨을 뿐, 술을 마시느니 차라리 그 돈으로 고기를 사는 것이 낫다고 여겼다.
사제들이 미사를 올리면서 제주를 마시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녀 스스로 술을 입에 대었던 적은 이 신전에 온 뒤로 한 번도 없었다.
‘ 마실까……? ’
발레리아누스와 클로비스와의 일로 내내 울적했던 아리스텔라는 문득 술을 마시고픈 생각이 들었다. 화가 나거나 마음이 복잡하거나 우울할 때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마을 어른들이 말했던 기억이 난다.
“ 노엘. 술을 마셔도 되나요? ”
“ 예? 수, 술이요? ”
“ 안 되나요……? ”
“ 아뇨, 안 될 것은 없지만요. 성녀님, 술을 드시고 싶으십니까? ”
아리스텔라가 고개를 끄덕이자, 노엘은 조금 당황한 듯 시선을 방황하다가 테이블 위에 빵을 내려놓고 와인 저장고 안으로 들어갔다.
노엘은 술에 대해 문외한이었다. 본래 술이 강한 체질이 아니라서 금방 얼굴이 빨개지며 어지럼증을 느꼈기에 오히려 피하는 쪽이었다.
하지만 그의 주인인 성녀가 술을 마시고 싶다고 말했다. 성녀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던 노엘은 이름도 종류도 모르는 와인 병들을 열심히 훑어보았다.
‘ 밤이니까, 너무 독한 술을 드리는 것은 좋지 않겠지……. ’
저장고의 와인을 열심히 살피던 노엘은 기다란 갈색 병을 하나 집어 들었다. 술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지만, 냄새를 맡아보면 대충 도수를 알 수 있지 않을까.
마개를 따보니 초콜릿처럼 달콤한 향기가 났다. 알콜 냄새가 그리 심하지 않으니 도수는 별로 높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정도를 마신다고 취하거나 하지는 않을 테니 안심이다.
그렇게 생각한 노엘은 초콜릿 향이 나는 갈색 술병을 들고 테이블로 돌아왔다.
케이크와 타르트, 마늘빵을 접시에 담아놓고 유리잔에 와인을 따랐다. 초콜릿 향이 난다 싶었는데, 색 또한 초콜릿색이었다.
“ 노엘. 이건 무슨 술인가요? ”
성녀가 물어보는데 차마 모르겠습니다, 라고 답할 수는 없었던 노엘은 적당히 말을 지어내기로 했다.
“ 제가 어릴 적부터 즐겨 마시던 것입니다. 달달한 초콜릿 향이 하루의 피로를 풀어주고, 도수도 높지 않아 술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도 쉬이 음용할 수 있거든요. ”
둘러대다가 그만 겨우 스물 한 살인 그가 ‘ 어릴 적부터 ’ 술을 마시는 불량아였다고 말해버렸으나, 노엘은 최대한 그럴듯하게 이야기를 지어내는 데 정신이 팔려 제 말의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했다.
아리스텔라도 그 말에서 의문점을 찾지 못하고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주정뱅이 아버지가 어린 아이들에게 술을 먹였다가 취해서 쓰러지거나 앓아눕게 만드는 사고는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그 아이들 가운데는 어릴 적 트라우마로 술을 싫어하게 되거나, 반대로 술을 즐기게 되는 케이스도 있었다.
노엘도 그런 경우려니, 하고 아리스텔라는 대충 넘겨짚었다.
“ 달콤하네요. ”
“ 그, 그렇지요? ”
“ 색이랑 향기만 그런 줄 알았는데, 정말로 초콜릿이 섞여있나 봐요. 달콤한 맛이 나요. ”
뒷맛이 약간 쓰긴 하지만, 마시기에는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달콤하면서도 쌉싸름한 맛 덕분에 입맛이 돌았다.
“ 맛있어요. ”
“ 더 드릴까요? ”
홀짝홀짝 마시다 보니 금세 한잔이 텅 비어버렸다. 아리스텔라의 잔에 와인을 채워준 노엘은 자신의 잔도 마저 채웠다.
찰랑거리는 초콜릿 색의 투명한 와인. 기분이 좋아진 아리스텔라는 살며시 잔을 들었다. 노엘도 잔을 들어 건배했다.
이번에는 두 모금 만에 한잔을 비워버렸다. 진한 초콜릿 향이 목으로 넘어가면서 살짝 목구멍이 따끔거렸지만, 노엘도 아리스텔라도 내색하지 않고 상대를 향해 웃어보였다.
술이 들어가서일까, 이런 한밤중에 주방에서 케이크를 먹고 술을 마시고 있는 상황이 어쩐지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처음 목적이었던 빵과 케이크는 어느새 안주거리가 되어버렸다.
“ 우리가 오늘 이러고 있었던 게 알려지면, 다들 놀랄까요? ”
“ 아마도요. ”
“ 대신관님께 혼나면 어쩌죠? ”
대신관 히페리온은 절대로 아리스텔라에게 화를 내지 않을 것이다. 둔감한 노엘이라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노엘은 히페리온이 아리스텔라를 좋아하는 것을 몰랐지만, 엄격한 대신관이 유독 성녀에게만 상냥하고 부드러운 태도를 보인다는 것은 알았다. 그런 그가 성녀가 밤에 주방에 숨어들어와 식량을 축내고 와인을 거덜 낸 정도로 흥분할 리가 없다.
성녀를 혼낼 수 있는 사람은 이 신전에 없다, 라고 말하려 했는데. 어쩐지 취기가 돌아 노엘은 말을 잇지 못하고 멍하니 성녀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 음……. ”
가녀리고 순진하게만 보인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모습이 요염했다. 뺨이 붉어서일까, 주방이 어두워서일까, 주홍색의 조명이 아롱지며 만들어내는 야릇한 분위기 때문일까. 노엘은 아리스텔라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제 가슴을 탁 치며 자신 있게 말했다.
“ 제가 같이 혼나 드릴게요! ”
“ 후후. ”
아리스텔라가 웃었다. 그 사랑스러운 미소조차 요염했다. 그녀의 달콤한 미소에 홀릴 것 같아서, 노엘은 와인을 벌컥벌컥 마시며 속을 진정시키려 했다.
“ 노엘, 술 잘 마시네요. ”
“ 헤헤. 어릴 때부터, 끅, 마셨다니까요……. ”
“ 굉장해요. 어른이네요……. ”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본인들조차 모르는 대화를 주고받으며, 술에 약한 두 사람은 달콤한 초콜릿 와인을 전부 비워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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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작 1만 달성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