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76 / 0219 ----------------------------------------------
스프라우트 공작의 청혼
[176]
대륙에서 가장 거대하다는 여신 위그멘타르의 신전. 아리스텔라는 아직도 이 신전의 모든 지역을 살피지 못했다. 기사단의 구역에 온천이 있다는 것도 겨우 오늘 알지 않았나.
이 신전에서 그녀를 따르는 칠십여 명의 사제와 성기사들 하나하나와 진솔한 대화조차 나눠본 적이 없다. 그들을 버리고 달아날 수는 없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 당신을, < 신전 밖 >의 남자를 받아들일 여유는 없습니다. ”
“ 지금 당장 떠나자는 것이 아닙니다. 성녀님께서 원하신다면, 저는 몇 년이……. 아니, 몇 십 년이 걸리더라도. ”
“ 스프라우트 공작님. 저는 당신이 시간낭비를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
“ 당신을 기다리는 시간이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
“ 저를 아무리 사랑해도 당신의 전부를 걸 수는 없다고 하셨지요? 그만큼 당신의 가문을, 영토에 사는 영지민들을 생각하신다면, 당신 자신의 인생도 소중히 여겨주세요. ”
아리스텔라는 그렇게 말하며 클로비스에게 인사했다. 가볍게 목례하는 것뿐이었지만, 클로비스는 그녀의 인사에 답례 인사를 돌려주는 것조차 할 수가 없었다.
◇ ◆ ◇ ◆ ◇
두 사람의 방을 나온 아리스텔라는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지나 계단을 올라갔다. 화가 나서 저절로 발소리가 커졌다. 숨이 거칠어진다. 뭔가가 울컥거리며 가슴속에서 바깥으로 솟구쳐 올랐다.
“ 윽……! ”
아리스텔라는 결국 계단의 한중간에 멈춰 서서 주저앉았다.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 으흑, 흑……. ”
제 처지가 너무 한스러웠다.
처음 납치범들에게 끌려가 곤욕을 치렀을 때는, 거액의 빚을 진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성녀가 되어 신전으로 와야 했을 때는 가족과 헤어지는 것이 싫었다.
이곳에 와 낯선 남자들 사이에서 안절부절 못하며 불안해하고, 실수할 때마다 죄를 지은 것 같아 초조하고 가슴이 콕콕 쑤셨다. 아무 남자에게나 다리를 벌리면서 기뻐하는 몸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어땠나. 아리스텔라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까지 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운명으로부터 도망치기보다 맞서기를 결심했다. 힘도 없고 지혜도 없지만, 포기하지 않고 답을 갈구한다면 분명히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답을 찾도록 이끌어주고, 뒷받침해주는 이들이 있으니까. 그래서 버틸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신전 밖에서마저 아리스텔라가 있는 신전을 위협하고, 그녀가 스스로 내린 결론을 무시하며 이것이 행복이라며 원치도 않은 미래를 들이민다.
그토록 열심히 답을 갈구해온 결과가 이것인가. 아리스텔라는 너무 속상하고 화가 나서 무릎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 ◆ ◇ ◆ ◇
한참을 울었을까, 석양이 가라앉고 주위에 어둠이 깔렸다. 신전 안의 푸른 공기는 한밤중이라도 깜깜해지지 않고 신전 안을 푸른빛으로 비추고 있었지만, 아리스텔라는 어느새 밤이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 아론은……. 오늘 밤은, 오지 않겠지. ’
그가 보내는 사제와 밤을 보내겠다고 약조했고, 발레리아누스는 그 보고를 받고 왔다고 했다. 아리스텔라는 아론이 발레리아누스를 보냈다고 생각했다. 비록 위그멘타르에게 몸의 주도권을 빼앗긴 상태였다고는 해도, 아리스텔라는 발레리아누스와 섹스를 했으니 약속은 지킨 셈이었다.
왜 그런 약속을 했을까, 하는 후회가 문득 들었으나 아리스텔라는 곧 고개를 가로저어 털어버렸다. 약속은 약속이다. 발레리아누스는 아리스텔라와 몸을 섞고도, 그녀가 타락하지도 않고, 다른 사제를 타락시키지도 않는 몸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니 의미 없는 일은 아니었다.
‘ 내일은 또 누구를 보낼까. ’
차라리 빨리 이 악몽 같은 내기가 끝나고, 신전의 모두에게 인정받기를 소망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내일이면 로이드가 돌아온다.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어엿한 성녀가 되기로 결심하지 않았나.
아리스텔라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일어났다. 다리가 조금 후들거려 난간을 잡아야 했지만, 걸을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 조용하네. ’
성녀가 머무는 중앙 건물은 본래 그녀와 시종, 단 둘만이 사용하는 구역이었다. 지금은 아래층에 교황 발레리아누스와 클로비스가 묵고 있지만, 본래 발소리조차 없이 적막한 장소여야 하는 것이 맞았다.
고개를 돌리면, 창밖에서 달빛이 쏟아지는 것이 보인다. 저 달빛은 사제들의 구역에도, 성기사들의 구역에도, 저 멀리 로이드가 있는 곳까지 닿을 것이다. 비록 하늘에 가만히 떠 있는 달이지만, 달은 지상의 곳곳을 비춘다.
홀로 하늘에 고고히 떠있으면서도, 지상을 비추는 달. 아리스텔라는 자신의 처지가 저 달과 같다고 생각했다.
이 신전에 평생 감금되어 있어야 하는 처지지만, 이 신전의 모든 이들을 내치지 않고 보살피며 따스하게 감싸 안는 것이 제 역할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분노로 울컥거리던 가슴도 조금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계단을 올라 복도에 다다른 아리스텔라는 자신의 방문 앞에 누군가 서성이는 것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 누구지? 조슈아가 아직 돌아가지 않았나? ’
손에 뭔가를 든 채로 문 앞을 서성이는 실루엣은 조슈아보다 조금 키가 작고 낭창거렸다. 붉은 고수머리를 길게 땋아 내린 사제의 뒷모습을 확인한 아리스텔라는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 노엘. 무슨 일이에요? ”
“ 흐아아아아아악! ”
아무도 없으리라 생각했는지, 갑자기 뒤에서 목소리가 들리자 노엘은 비명을 지르며 손에 들고 있던 쟁반을 떨어뜨렸다.
쨍그랑!
요란한 소리와 함께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뭔가 철퍽 엎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 노엘? 대체……. ”
“ 서, 성녀님! 위험합니다. 가까이 오시면 안 됩니다! ”
혹여 아리스텔라가 깨진 유리를 밟고 다칠까봐, 노엘은 얼른 손을 휘휘 저으며 아리스텔라가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
아리스텔라는 바닥에 떨어진 것을 살폈다. 은쟁반 아래 깨진 유리그릇 너머로 보이는 것은 생크림과 작은 과일, 그리고 빵조각이었다. 시간이 늦었는데 이런 밤중에 간식을 들고 성녀의 방을 기웃거릴 일은 또 무어란 말인가.
“ 대체 뭘 하러 오신 거예요? ”
“ 아뇨, 저기, 그……! ”
노엘은 허둥지둥 아리스텔라의 시야로부터 가리듯이 소매로 엎어진 케이크와 그릇을 덮었지만 이미 한 발 늦었다. 그는 눈알을 데룩데룩 굴리다가 민망한지 고개를 푹 숙이면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 성녀님이 피곤하실 것 같아서, 단 것을 먹으면 피로가 풀린다기에……. ”
“ 저한테 주려고 가져오신 건가요? ”
“ 저, 바닥에 떨어진 것을 드시면 안 됩니다! 유리조각이 들어갔을 지도 모르고……! ”
“ 아뇨, 안 먹어요.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니거든요. ”
“ 그, 그랬지요. 죄송합니다……. ”
노엘은 버벅거리면서 사과했다.
아까까진 전부 다 싫고 화가 치밀어서 짜증이 나는 상태였는데, 노엘이 황당한 소리를 하며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니 아리스텔라는 반쯤은 기가 차고 반쯤은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나왔다.
그것을 자신을 한심하게 생각해서 그런 거라고 오해한 노엘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는 얼른 깨진 그릇과 뭉개진 케이크를 소매로 덮어 가린 뒤, 신성력으로 그러모아 깨끗하게 정리했다.
바닥에 떨어진 유리조각과 케이크의 잔해가 은쟁반 위에 모이고, 복도에 깔린 카펫을 하얀 실 같은 신성력이 뻗어나가 바닥에 흩어진 깨알 같은 유리조각까지 전부 훑어 모았다.
본래 청소는 마법으로 만든 요정들이 대신하는 것이지만, 혹 성녀가 걷다가 유리조각을 밟아 다치면 안 되었기에 노엘은 제 신성력으로 직접 바닥을 청소하고 쟁반을 다시 들어올렸다.
“ 성녀님 앞에서 추태를 부려 죄송합니다. 그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
노엘은 성녀의 시종이 아니다. 오늘은 그에게 마법 수업을 듣는 날도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개인적인 용무로 성녀를 찾아온 것이다. 피로했을 그녀에게 단 것을 주고 싶다고 생각해서.
아리스텔라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노엘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복도 저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본래도 그리 큰 체구는 아니지만 기가 죽은 탓일까, 고개를 숙이고 어깨까지 움츠리고 걷는 뒷모습을 보자니 문득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 노엘. ”
“ 예? ”
이름을 부르자 노엘이 조금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푸른빛을 내는 신성력으로 가득한 신전의 복도에선, 노엘의 노을빛 붉은 머리카락이 보랏빛을 띤 자주색으로 보인다.
붉은 머리카락에 녹색 눈동자. 어쩐지 과일을 연상하게 하는 색 조합이다. 아리스텔라는 딱히 배가 고픈 상태가 아니었지만, 노엘이 말한 대로 단 것을 먹는 편이 기분 전환에 도움이 될 것 같았다.
“ 케이크는 어디서 가져온 건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