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금된 성녀와 비밀의 밤-175화 (175/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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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라우트 공작의 청혼

[175] 스프라우트 공작의 청혼

“ 당신을 제 아내로 맞이하고 싶습니다. ”

“ 네? 뭐라고요? ”

아리스텔라는 당황해서 되물었다. 클로비스가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그가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없어서 되물은 것이었다.

“ 저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성녀님. ”

심장이 쿵 내려앉더니,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멍해졌다.

아리스텔라는 옷자락을 꽉 부여잡았다. 그렇게라도 제 몸의 감각을 확인하지 않으면, 또 정신을 잃었다고 생각할 것 같았기에.

“ 어, 언제? 언제부터……. ”

“ 당신과 처음 몸을 섞었을 때……. 아니, 그보다 더 전이로군요. 당신과 처음 응접실에 앉아, 대화를 나누었을 때일까요. ”

아리스텔라의 몸은 무척 매혹적이었지만, 클로비스가 그녀에게 반한 것은 섹스의 스킬 때문이 아니었다. 두려워서 덜덜 떨면서도 자신을 피하지 않는 맑은 보라색의 눈동자. 연약하면서도 강인한 그녀의 모습에 끌렸기 때문이다.

“ 어째서요……? ”

“ 사랑에 빠지는 데에 이유가 필요한지요? ”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만약 설명할 수 있다 하더라도 클로비스는 설명하지 않을 것이다.

신의 말씀을 인간의 언어로 담을 때 본래의 의미가 변질된다는 것을 클로비스는 믿지 않았다. 애초에 신을 믿지 않으니 해석의 차이니 뭐니 하는 것조차 그저 사제들의 권력 싸움으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의 말이 진실이었다고 믿는다. 제가 느끼는 감정을 고정된 말로 표현하는 순간, 그가 느꼈던 모든 말할 수 없는 감정은 퇴색하고 의미를 담아낸 언어만이 남는다. 그렇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 당신은, 당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다른 남자에게 안기게 내버려두나요? ”

“ 예? ”

“ 교황 성하가 저를 범하는 것을 보면서, 막기는커녕 동조하셨죠. ”

“ 성녀님. 그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당신을 빼내기 위해서는……. ”

“ 제가 싫어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

아리스텔라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클로비스의 어깨가 움찔 흔들리더니,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 반응에 아리스텔라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몸의 주도권을 빼앗겼다. 그러나 의식을 잃지는 않았다. 온몸의 감각만을 공유한 채로 낯선 남자에게 범해지는 모습을 보여 버렸다.

클로비스가 정말로 아리스텔라를 사랑한다면, 과연 그것을 내버려 두었을까.

“ 제가 아무리 싫어해도, 자유를 얻도록 하기 위해서 다른 남자로 하여금 저를 범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요? ”

아리스텔라의 몸이 분노로 부르르 떨렸다. 덩달아 목소리도 날카로워졌다. 순진하고 얌전하기만 했던 얼굴이 혐오의 감정으로 일그러졌다. 클로비스는 그녀의 표정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 성녀님. 많이 화가 나셨군요. 죄송합니다……. ”

“ 이거 놔주세요! ”

아리스텔라는 반사적으로 클로비스의 손을 뿌리쳤다. 이 남자에게 닿는 것조차 소름이 끼쳤다.

처음부터 그랬다. 교황청에 집행관을 보내달라는 사제들의 요청을 받았으니, 정식으로 신전에 출입할 수 있을 텐데도 클로비스는 구태여 결계를 깨고 골렘을 쓰러뜨려 침입하는 쪽을 택했다.

아리스텔라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초지종을 듣고, 그녀의 말에 의구심이 드는 부분을 짚어가며 진상을 캐낼 수 있었을 텐데도 그는 아리스텔라에게 진실을 말하게 하는 꽃, 카루스 엔타타를 먹여 억지로 진상을 토하게 했다. 그리고는 그녀를 무참하게 범했다.

어쩌면 클로비스를 먼저 유혹한 것은 제 안의 여신 위그멘타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관계가 끝난 뒤, 깨어난 아리스텔라를 대하는 클로비스의 태도는 여전히 그녀를 존중하고 있지 않았다. 아리스텔라는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실수는 있을 수 있다. 서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에 오해할 법한 행동을 하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로이드가 아리스텔라의 말을 오해하고 범한 것이나, 그 후로도 케인이나 이자크가 아리스텔라의 행동을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 오해로 인한 사고를 책망하는 것이 아니다.

아리스텔라가 원하는 것은 존중과 배려였다. 실수로 그녀를 화나게 하고 상처 입혔다면, 사과하고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기를 바랐다. 이렇게 해도 좋은가, 저렇게 하기를 원하는가, 그녀의 의중을 묻기를 원했다. 그러나 클로비스는 어느 것도 하지 않았다.

“ 당신은 저를 사랑하지 않잖아요. ”

“ 아닙니다, 성녀님. 저는……. ”

“ 당신이 저에 대해 뭘 아는데요? 저를 알려고 한 적이 있었나요? ”

연약하고 무능력한 여자니까, 힘으로 마음대로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까. 아리스텔라는 클로비스의 태도에 화가 났다. 그녀를 정말로 이 신전에서 빼내고 싶었다면, 그녀와 결혼하고 싶었다면, 어째서 그녀의 뜻을 묻지 않았나.

“ 내가 이 신전에서 나가고 싶은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왜 마음대로 이런 짓을 벌이는 거예요? ”

“ 성녀님. 나가고 싶으셨던 것이 아닙니까? ”

폐쇄된 신전에 평생을 감금당해 살아야 하는 인생이 행복할리 없다. 클로비스는 아리스텔라에게 신전을 빠져나갈 선택지가 주어진다면, 당연히 그녀는 자유를 갈망하리라 생각했다. 그 자신이 자유를 원했기 때문에 더욱 더.

“ 이 신전에 갇혀 지내는 것이 괜찮으신 겁니까? 정말로요? ”

“ 괜찮지 않다고 하면요? 저를 데리고 달아나실 건가요? ”

“ 물론이지요! ”

실제로 역대 성녀들 가운데 권력이 있는 여인들은 외부와 결탁하여 탈출하고자 일부러 신전을 습격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런 몇 번의 사고를 거쳐 신전의 결계는 점점 더 견고해졌다.

아마도 클로비스가 깨부순 이후로 이 신전은 결계가 강화되고 골렘의 수도 늘었을 것이다. 외부인이 침입하여 성녀를 데려가는 일을 막기 위해서.

“ 싫어요. ”

“ 성녀님! ”

“ 저는 한평생 이 신전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각오하고, 조건을 받아들여 들어왔어요. 무책임하게 대역을 세우고 도망칠 수는 없어요. ”

자유는, 어쩌면 바랄지도 모른다. 바깥에서 나고 자란 그녀에게 신전 안의 모든 것은 낯설고 어려웠다. 저를 따르는 이들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남자를 대할 때마다 어색하고 부끄러운 기분이 드는 것은 멈출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텔라는 노력하고 싶어 했다. 하루빨리 어엿한 성녀가 되어, 이 신전 안의 모든 사람을,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클로비스는 그녀의 결심을 무시하고, 그녀의 목표를 멋대로 수정했다.

자유를 갈망하는 욕망과 자신의 목표를 이루려는 신념, 욕망과 신념이 상충한다고 해서 사람이 언제나 욕망을 택하는 것은 아니다.

아리스텔라는 무책임한 것을 싫어했다. 제 책임으로부터 도피하고, 타인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것을 혐오했다. 아버지와 똑같은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제 자유를 잃는 한이 있더라도, 이 신전에서 영원히 남자들에게 범해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하더라도, 그 안에서 희망을 찾고 싶었다. 욕망을 다스리고 따르는 이들을 통솔할 방법을 찾고 싶었다.

“ 교황 성하. 당신의 목적이 신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첫 번째 종으로서 신의 말씀을 해석하는 것이라고 하셨나요? ”

“ 그렇습니다, 성녀님. ”

“ 제 목적은요, 이 신전의 성녀로서 저를 따르는 이들을 다스리는 거예요. ”

아리스텔라의 말에 발레리아누스의 눈동자에는 놀라움이, 클로비스의 눈동자에는 절망이 떠올랐다. 클로비스는 차마 아리스텔라를 만지지 못하고 허공에 손을 멈춘 채로 약하게 떨다가, 주먹을 꽉 쥐었다.

“ 저와 함께 있는 것이, 싫으십니까? ”

“ 왜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셨나요? ”

“ 스프라우트의 영토는 넓습니다. 이 신전에 비할 수도 없이요. 저희 가문은 황실보다도 많은 재산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성녀님, 저는 지금 당신을 공작부인으로 만들어드리겠다 말하는 겁니다. ”

“ 저는 귀족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 없어요. ”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아름다운 보석으로 치장하고, 악사들의 연주에 따라 우아하게 춤을 추는, 동화에서 본 공주님의 삶을 동경한 적은 있다. 그러나 아리스텔라는 그러한 꿈같은 소망보다 현실에 충실하기를 원했다.

이 자리에서,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 보람 있는 삶을 살기를 바랐다.

“ 몇 번을 물으셔도 제 대답은 같을 거예요. ”

“ 성녀님. ”

“ 저는 위그멘타르 신전의 성녀입니다. 결혼은 하지 않습니다. ”

성녀의 의무조차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고 도망치는 여자가, 어떻게 드넓은 영토를 다스리는 공작의 아내로서 제대로 살 수 있겠는가.

“ 스프라우트 공작님. ”

아리스텔라는 클로비스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일부러 딱딱하게 그를 불렀다.

“ 당신은 저를 사랑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수 없다 하시면서, 어째서 제게는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택하라 하시나요? ”

아리스텔라의 말에 말문이 막힌 클로비스의 눈빛이 흔들렸다. 칠흑처럼 까만 눈동자에 당혹감과 절망과 간절함이 뒤섞였다 흩어졌다. 꾹 다물고 있던 입술이 미약하게 떨렸다. 그 사이로 젖은 한숨이 새는 것이, 마치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천천히 보인다.

“ 이 신전이, 당신의 모든 것입니까……? ”

============================ 작품 후기 ============================

175화부터 177화까지 연참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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