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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그멘타르와 아리스텔라
[174]
발레리아누스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사제와 성관계를 가지는 성녀가 타락하는지 아닌지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였다. 성녀와 성관계를 가지는 사제가 타락하는지, 아닌지를 그는 알고 싶어 했다.
아론과 가까워진 발레리아누스는 아주 힘들게 여신 위그멘타르의 신전에서 있었던 과거의 일에 대해 알 수 있었다.
발레리아누스조차도 아론의 말을 전부 믿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가 했던 말이 사실이라면, 이 폐쇄된 신전을 그대로 유지할 수는 없었다.
성녀와 성관계를 가지는 사제들이 타락한다면 이 신전은 그저 세상의 눈을 피해 음행을 저지르는 타락한 사제들의 감옥이 될 뿐이었다.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발레리아누스는 교황이 되었다. 교황청과 신전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그리고 그 자신의 목적인 < 신과의 교감 >을 이해하기 위해.
전대 교황으로부터 양위를 받을 때, 발레리아누스는 당돌하게도 성서를 고대어가 아닌 현대의 말로 해석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전대 교황은 발레리아누스의 그런 뜻을 존중해주었다.
발레리아누스가 교황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성녀 밀리아리아와 그녀를 따르는 사제들이 모두 사랑함으로써 신전의 문이 열렸다. 그는 아론을 새로운 성녀를 보필하는 신관으로서 여신 위그멘타르의 신전에 보냈다.
클로비스와 발레리아누스 사이에 계약이 오갔던 것과 마찬가지로, 아론과 발레리아누스 사이에서도 계약이 오갔다. 아론은 신전의 일을 발레리아누스에게 보고하며, 발레리아누스는 이 여신 위그멘타르의 타락한 신전을 바로잡으려 했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다. 성녀와 성관계를 가졌음에도 사제들이 타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발레리아누스는 아론의 보고를 믿을 수가 없었다. 이제까지 성녀 아리스텔라 이전의 성녀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사제들을 타락하게 만들었다. 욕망에 잠식된 사제들은 차마 입에 담기도 민망한 음행을 벌이며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했다.
자기변명으로 가득한 신전의 기록조차 그러할진대, 유일하게 당대 성녀인 아리스텔라와 성관계를 가진 사제들만 타락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믿기 어려웠다.
성욕을 느끼지 못하는 아론, 본디 근면성실하며 철저하게 계율을 지키는 히페리온은 차치하더라도, 다른 사제들마저 음욕에 타락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상했다.
어쩌면 이번 대의 성녀가 전대에 비해 신성력이 부족하여 사제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발레리아누스는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이 신전으로 왔다.
그리고 성녀 아리스텔라를 안아 직접 그녀와 교감했다.
성녀 아리스텔라는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또한 그녀의 신성력은 아주 정순하며 강력했다. 몸이 닿는 것만으로 정욕이 들끓어 참기 어려웠다.
과연 음욕의 여신이다. 부드러우면서도 쫄깃한 여성의 속살에 감싸일 때마다 발레리아누스는 짜릿한 감각과 함께 허벅지가 긴장으로 단단해지고 발가락이 절로 곱는 것을 느꼈다. 번개가 내리고 천둥이 울리듯, 번쩍이는 쾌감이 먼저 일고 이어서 몸 깊숙한 곳까지 불길이 번졌다.
이 유혹에서 달아날 수 있는 사제란 없을 것이다. 발레리아누스는 이제까지 어째서 이 신전의 사제와 성기사들이 성녀를 강제로 범해가면서까지 이 음란한 행위에 몰두했는가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 가지 발레리아누스가 알고 있던 사실과 다른 것이 있었다.
성녀 아리스텔라와의 행위는 그의 신성도, 그녀의 신성도 전혀 더럽히지 못한다는 것이다.
“ 교황으로서 저는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신전을 계속 유지할지 유지하지 않을지를 판단하기 위해. ”
“ 그래도, 이건……. 이건, 너무해요. ”
아리스텔라는 울먹이면서 어깨를 떨었다. 확인을 위해서라니, 자신이 무슨 실험용 쥐라도 된 것 같지 않은가. 쉽게 느끼는 것도 사실이고 성욕을 참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비록 낯선 남자라고는 하나 욕구가 일면 어쩔 수 없이 몸이 먼저 반응해버리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러나 발레리아누스와의 섹스는 욕구를 풀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 실험 >과도 같은 것이었다.
“ 난 도구가 아니에요. ”
“ 이는 성녀님을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신전을 유지하는 것이 교황청의 명예와 성녀님의 신성에 흠이 된다고 판단한다면, 저는 이 신전을 없애려 했으니 말입니다. ”
“ 가능할 리가 없잖아요. 여신 위그멘타르는 재앙의 여신이기도 하다고 들었어요. 제가 밖으로 나가면 세상에 재앙이 퍼지는 줄 아는 사람들이 많을 텐데……. ”
“ 예. < 성녀 아리스텔라 >인 당신에게 자유를 드리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교황이라고 해서 절대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고지식한 늙은이들은 분명 반대하겠지요. ”
발레리아누스는 앞으로 흘러내린 구불구불한 은발을 뒤로 넘기며 빙긋 웃었다. 새벽빛처럼 새파란 하늘색 눈동자는 여전히 싸늘하게만 느껴졌다.
“ 그래서 클로비스 경과 거래를 한 것입니다. ”
“ 클로비스와……? ”
아리스텔라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클로비스를 바라보았다. 하얀 제복을 입고 붉은 망토를 두르고 있기 때문일까, 검은 얼굴에 검은 눈이 더욱 짙어 보였다. 클로비스의 새카만 눈동자와 아리스텔라의 보라색 눈동자가 허공에서 부딪치자, 그는 살며시 시선을 내리며 아리스텔라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 제가 당신을 모시고 싶습니다, 성녀님. ”
“ 네……? ”
“ 어차피 폐쇄된 신전, 외부와는 단절된 곳입니다. 당신의 대역을 마련하고 입을 봉하는 것만으로 일반 백성들에게 < 17대 성녀는 여전히 이 위그멘타르 신전에 감금되어 있다 >고 생각하게 할 수 있습니다. ”
클로비스는 아리스텔라를 만나고 싶었다. 그녀를 안고 싶었다. 사랑스러운 그녀와 함께 있고 싶었다.
그러나 아리스텔라는 위그멘타르 신전의 성녀였고, 밖으로는 나갈 수 없는 몸이었다. 클로비스 또한 스프라우트 대공으로서 역할과 책임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클로비스가 이제 와서 사제나 성기사가 되어 여신 위그멘타르의 신전으로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럴 이유도 없었다. 클로비스는 아리스텔라를 사랑하지만 그녀를 위해 제 인생을 바칠 준비는 되어있지 않았다.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은 가진 것과 지킬 것이 많은 자일수록 어려웠다. 클로비스가 원하는 것은 아리스텔라의 곁에 있기 위해 자신을 바치는 삶이 아니다. 자신의 힘으로 아리스텔라를 곁에 두고 자신이 가진 것으로 그녀를 기쁘게 하는 삶이었다.
“ 당신을 빼내기 위해서는 교황 성하의 허락이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계획에 협조했던 겁니다. ”
“ 저기,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
“ 스프라우트 공작령은 넓습니다, 성녀님. ”
클로비스의 힘이라면 여자의 신분 하나나 둘쯤은 쉽게 조작할 수 있다. 성녀 아리스텔라가 아닌 평범한 마을 처녀, 혹은 귀족의 사생아, 더 나아가 나이든 귀족의 양녀로 만들어주는 것도 가능했다. 그렇다면 아리스텔라는 완전히 새로운 제2의 인생을 살 수 있다.
클로비스의 곁에서.
“ 저는 당신께 더 넓은 세상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
“ 클로비스……. ”
“ 당신이 이 작은 신전에서 인생을 허비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
여신 위그멘타르의 신전은 상당한 규모였다. 신성제국은 물론이고 대륙 어느 곳의 신전과 비교해도 이 정도 규모의 신전은 없다. 어지간한 도시 하나쯤의 크기를 자랑하는 여신 위그멘타르의 신전을 < 작다 >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클로비스가 이 신성제국에서 가장 넓은 영토, 스프라우트 공작령을 다스리는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 왜, 왜요……? ”
“ 저는 남은 인생을 가치 있게 쓰고 싶거든요. ”
클로비스는 신을 믿지 않는다. 신성력을 느끼지도 못한다. 그가 원하는 것은 여신의 현신이며 성녀인 아리스텔라가 아니라 인간 여자인 아리스텔라였다.
지극히 숭고하며 아름다운 성녀에게 클로비스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사실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인간 여인 아리스텔라를 원했다. 드넓은 영토와 화려한 성, 온갖 부귀영화와 진귀하고 새로운 것들을 그녀에게 누리게 해주고 싶었다.
그것이 신을 믿지 않고, 신과 교감할 능력이 없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애정표현이기 때문이었다.
“ 당신을 제 아내로 맞이하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