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73 / 0219 ----------------------------------------------
위그멘타르와 아리스텔라
[173]
“ 성녀님을 무리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
“ 호오. ”
하늘색의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사람의 속을 꿰뚫어보는 듯한 섬뜩한 눈빛에 클로비스가 표정을 굳히자, 부드럽게 휘어지며 시선을 돌린다.
“ 그럼 뒤처리를 해드려야겠군요. 자, 성녀님. ”
“ 흐윽……. ”
몸을 가누지 못하는 아리스텔라를 살며시 안아 등에 커다란 베개를 받쳐주고, 발레리아누스의 손이 그녀의 몸을 쓰다듬었다.
남자의 손이 닿는 것만으로도 자극이 심한지 그녀가 훌쩍거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지만, 발레리아누스의 손에서 흘러나온 신성력은 천천히 아리스텔라의 몸을 휘감아 체액으로 질펀하게 젖은 그녀의 몸을 깨끗하게 정화해나갔다.
체액을 정화하고 시원한 신성력이 피부의 열기를 가라앉히자 분홍빛으로 물들었던 피부가 점점 본래의 색을 되찾아갔다. 더불어 몸의 떨림도 조금씩 가라앉고, 제 의지를 듣지 않았던 손끝과 발끝부터 힘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 읏, 아……. ”
“ 이쪽은 상당히 많이 젖어있군요. ”
아리스텔라가 흘린 액체로 엉덩이 밑의 시트까지 흥건하게 젖어있었다. 발레리아누스의 손이 음부를 감싸자, 아리스텔라가 몸서리치며 소리를 질렀다.
“ 그만 해요! ”
“ 정화를 하셔야 합니다만……. 설마, 이대로 돌아가시려고요? ”
“ 으읏……! ”
아리스텔라는 뭐라고 화를 내려다 왈칵 눈물이 흘러나와 말을 잇지 못하고 흐느꼈다. 발레리아누스의 신성력이 제 몸 안에 흘러드는 느낌은 현기증이 날 정도로 아찔하면서도 중독성이 있었다. 아론과 밤을 보냈을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그녀의 몸은 남자의 손길뿐만 아니라 신성력에도 반응한다.
‘ 이런 식으로 알고 싶지 않았어. ’
두 남자에게 안겼던 것이 처음은 아니다. 게다가 클로비스는 그녀의 몸을 붙잡아두었을 뿐 옷을 벗지도 않았다. 그저 발레리아누스와 아리스텔라, 아니 위그멘타르가 섹스하는 광경을 보조자로서 지켜보았을 뿐이다. 하지만 노엘과 크리스에게 범해졌을 때보다도 더 비참했다.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에게 욕정하는 남자와 몸을 섞는 것과, 오늘 처음 만난 남자와 몸을 섞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비록 이전에도 비슷한 경험은 여러 번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적어도 이 신전에서 평생 함께 지내야 하는 처지인 사제나 성기사들과는 달리, 발레리아누스는 교황이고 클로비스는 공작령을 다스리는 대공이었다. 두 사람은 신전 소속이 아니다. 아리스텔라가 책임지고 보살펴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신전 밖의 외부인인 셈이다.
낯선 남자에게 몸을 유린당하면서 그것을 또 다른 남자에게 보였다. 차라리 정신을 잃었더라면 충격이라도 덜할 것을, 몸의 주도권을 여신 위그멘타르에게 빼앗긴 채로 몇 번이나 절정에 오르는 기분은 끔찍했다.
쾌감을 느낀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으나 쾌감과 불쾌감이 반드시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아리스텔라는 수치스럽고 혼란스러우면서도 화가 나서 어깨를 안고 부르르 떨었다.
“ 어떻게……. ”
또다시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서, 아리스텔라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절망감을 겨우 삼키고 힘들게 내뱉은 한 마디 한 마디가 분노로 떨렸다.
“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어요? ”
“ 이런, 성녀님. 제가 한 것이 마음에 흡족하지 못했나 보군요. ”
“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요! 교황 성하는, 사제인데, 사제들을 대표하는 자리에 계시면서, 어떻게……! ”
성녀인 자신이 신전의 종들과 성관계를 가지는 것은 그녀가 음욕의 여신을 봉인한 몸이기 때문이고, 그들이 그녀를 따르는 종이기 때문이다.
신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전부인 폐쇄된 공간 안에서 인간의 상식이나 규율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아리스텔라는 절망하고 분노하면서도 겨우 자신을 다잡고 이겨나갈 방법을 찾아나갔다.
하지만 발레리아누스는 교황이다. 이 신전이 아닌, 신성제국의 교황청에 있는 자다. 여신의 음욕을 물리칠 수 없는 신전의 종들과는 놓여있는 처지가 달랐다.
다른 종들처럼 그녀 안의 여신에 이끌려 성욕을 참을 수 없는 것도 아닐 터인데, 어째서.
“ 성녀님. 제가 분명 말씀드렸을 텐데요. ”
“ 무, 무엇을……. ”
“ < 보고를 받았다 >고 말입니다. ”
아리스텔라를 바라보는 발레리아누스의 눈빛에는 조롱도 경멸도 없었다. 그는 그녀의 신성성을 시험하기 위해 몸을 섞은 것이 아니었다.
◇ ◆ ◇ ◆ ◇
성녀의 수명이 다하면 생명의 신 헤시우스는 다음 대 성녀의 몸에 여신 위그멘타르를 봉인한다.
이상한 일이었다. 가장 강하고 정순한 신성력을 가지고 태어난 여인이 성녀가 된다면, 어째서 갓 태어난 어린아이를 신전으로 데려와 처음부터 성녀로 교육하지 않고, 이미 성년이 된 여인들 가운데서 성녀를 고르는 것일까.
신전에 들어오는 것은 성녀와 비슷한 나이의 청년들이다. 10대 후반부터 30대 중반까지의 젊은이들 사이에 마찬가지로 젊은 처녀를 한명 넣어 감금하는데, 과연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을까.
아무리 색을 멀리해야 하는 삶을 사는 사제와 성기사들이라고 해도 한평생 성녀와 함께 사는데 아무 일도 없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도 안이한 발상 아닌가.
발레리아누스는 어릴 적부터 그런 의문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되바라진 의문에 성실하게 답을 해주는 어른은 없었다.
< 쓸데없는 생각할 시간에 성서라도 한줄 더 외우려무나. >
답을 모르는 것은 좋았다. 어려운 문제를 풀 때, 아무리 생각해도 해답이 나오지 않는 경우는 있었다. 발레리아누스는 풀 수 없는 난제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명확한 해답이 나오는 책속의 논리와는 달리 인간 세상에는 답이 없는 문제가 많았기 때문이다. 끝까지 해답을 찾지 못한다 해도 충분히 탐구하는 것만으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른들은 발레리아누스가 품고 있는 < 답이 없는 난제 >에 대해서 < 생각하기를 그만두라 >고 말했다. 해답을 찾기 힘들기 때문에 포기하라는 뜻이 아니었다. 그런 문제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라고 말했다.
성서는 신의 말씀을 인간의 언어로 옮겨 적은 것. 신의 뜻은 인간이 헤아릴 수 없는 법이니 의구심이 든다 하여 이해하려 드는 것은 교만이라고 가르쳤다. 이해가 가지 않으면 않는 대로 그저 받아들이라고 가르쳤다. 발레리아누스는 그것이 싫었다.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면, 자연의 법칙은 반드시 신이 만든 논리대로 흘러갈 것이다.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면, 신의 권능을 나누어받은 인간은 분명 신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한 대에 나오는 해답은 아닐지라도 대를 거듭하여 탐구하다 보면 반드시 해답에 이를 것이다. 그조차도 못하는 어리석은 생명체에게 신이 지성을 부여했을 리 없다.
발레리아누스는 성서를, 신의 말씀을 인간의 말로 옮겨 적으면서 해석이 모호해진 부분을 탐구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사제들은 그것을 신의 권위에 감히 인간이 도전하는 오만한 행위로 생각하고 불쾌하게 받아들였다.
발레리아누스가 아론을 만난 것은 열 살이 되었을 때였다. 발레리아누스의 지도사제가 병으로 쓰러져 교황청에서 새로운 지도 사제를 보냈다. 아론의 나이는 당시 열여덟으로, 갓 서품을 받아 지도 사제의 조수가 되어 내려온 것이었다.
< 아론 사제님. 성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해석하려 하는 것은, 잘못된 일일까요? >
< 해석에는 인간의 살아온 환경과 가치관이 반영됩니다. 똑같은 문장을 서로 다른 성장과정을 거쳐 온 사람이 다르게 해석하는 일은 비일비재하지요. 오히려 자신의 해석이 맞다 주장하다가 혼란을 낳을 수도 있습니다. >
< 그 혼란은, 불필요한 것일까요? 자신과 다른 해석을 하는 남의 의견에 귀 기울여 타협점을 찾다보면, 더 좋은 답이 나올 수도 있을 텐데요. >
< 성서에 여러 사람의 해석을 더한다는 것은 깨끗한 물에 색색의 잉크를 들이붓는 것과 같습니다. 온갖 색이 뒤섞여 만들어진 검은색이 처음의 깨끗한 물과 가까울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
아론의 의견은 타당했다. 신의 말씀을 인간의 언어로 옮겨 적으면서 이미 그들은 당초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게 되었다. 단지 그 의미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의 형태를 모르는 상태로 갖가지 해석을 들이붓는다고 해서 반드시 정답에 가깝다고 볼 수는 없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했던가. 이 해석 저 해석이 뒤섞여 결국 본질과는 전혀 다른 합의점에 다다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신의 말씀이라면.
< 그 물이 맹물이 아닌 성수라면, 그 어느 색의 잉크를 들이부어도 본래의 색을 잃지 않을 겁니다. >
인간은 반드시 해답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아론은 발레리아누스의 의견을 무시하지 않았다. 발레리아누스에게 < 그런 문제는 생각조차 하지 마라 >고 말하지 않았다. 그의 의견을 진지하게 들어주고, 자기 나름대로의 타협점을 제시했다.
발레리아누스는 아론과 대화하는 시간이 좋았다. 지도 사제처럼 성서를 그저 암기하라며 들이밀지 않고 그와 함께 생각하고 고민해주었다.
< 성녀님께서는 여신 위그멘타르를 봉인하신 몸이니, 분명 우리들의 신 헤시우스의 뜻을 알고 계시겠지요. 그분을 만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조금 더 신의 말씀을 이해하는 데 가까워질 텐데……. >
< 그럴 리는 없습니다. >
아론은 딱 잘라 대답했다.
이제까지 그는 발레리아누스가 무엇을 의심하고 무엇을 탐구하든 그의 사고를 가로막지 않았다. 그런데 성녀 밀리아리아에 대한 이야기에 한해서만큼은, 대단히 보수적인 태도를 보였다. 어쩌면 고루한 사고방식에 찌들어버린 늙은이들보다도 더.
< 성녀님을 만난다면 당신도 분명 타락해버릴 겁니다, 발레리아누스. >
============================ 작품 후기 ============================
한동안 몸이 좋지 않아 쉬었습니다. 기다려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원고료 쿠폰 모두 감사합니다.
지켜봐주시는 분이 있어 힘을 얻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