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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발레리아누스
[169]
“ 이 신전에서 일어난 일은 전부, 보고를 받았으니까요. ”
“ 네……? ”
발레리아누스가 빙긋 웃으며 손짓하자, 클로비스가 살짝 몸을 돌려 뒤에서 아리스텔라를 끌어안았다. 남자의 단단한 손이 턱끝을 잡고 들어 올리자, 아리스텔라는 클로비스에게 속박당한 채 발레리아누스를 올려다보는 자세가 되었다.
“ 왜, 왜 이러시는 거예요? ”
클로비스와 한 번 육체관계를 맺었다고 해도 아리스텔라는 아직 그가 낯설었다. 초면인 교황 발레리아누스는 더욱 그러했다. 낯선 두 남자에게 사로잡힌 아리스텔라의 몸이 두려움으로 바들바들 떨렸다.
“ 보고를 받았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
“ 재판을 할 생각이라면, 정식으로……. ”
“ 이런. 성녀님, 저는 당신을 심판대에 올릴 생각이 없습니다. ”
발레리아누스의 우아한 손가락이 아리스텔라의 입술에 닿았다. 클로비스의 뜨거운 손과는 달리 발레리아누스의 몸은 서늘했다. 그의 몸을 감싸는 신성력 때문이었다. 기묘한 온도 차이에 아리스텔라가 가늘게 떨며 미간을 찌푸렸다.
“ 심판하려는 게 아니라면, 왜……. ”
“ 확인을 하려는 것뿐이랍니다. ”
확인이라니. 무엇을 확인한단 말인가. 그녀가 다른 사제나 성기사들과 잠자리를 했는지? 아니면 그녀의 신성력이 순결한지?
불안한 눈빛으로 발레리아누스를 바라보자, 그는 살며시 눈을 내리깔고 미소 지으며 느긋하게 침대에 앉았다.
“ 시작하십시오, 클로비스. ”
“ 하윽! ”
발레리아누스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클로비스의 손이 아리스텔라의 가슴을 감싸 쥐었다. 유달리 뜨겁게 느껴지는 남자의 손에 얇은 성의가 구겨지며 말랑한 가슴의 모양이 뭉그러졌다.
“ 아, 아응, 이러지 마세요……! ”
구릿빛 피부를 지닌 남자의 손은 새하얀 성의와 대비되어 더욱 붉게 느껴졌다. 단단한 손인데도 음란하게 몸 위를 더듬어가는 움직임은 마치 뱀처럼 느껴졌다.
“ 흐읏, 싫어……! ”
아리스텔라는 바르르 몸을 떨며 흐느꼈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클로비스는 알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 그녀의 자그마한 몸은 남자의 한 뼘에 양 가슴이 다 잡힐 정도였다. 마치 품안에 작은 새를 가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클로비스는 아리스텔라의 귓불을 살그머니 씹으면서, 그녀의 귓전에 속삭였다.
“ 당신을 다시 만나기 위해서 자유를 포기한 가여운 남자를 외면하시려는 겁니까? 성녀님. ”
“ 네……? ”
“ 인간은 궁지에 몰리면 신을 찾게 된다고 하지요. 하지만 저를 궁지로 몰아넣은 것은 당신이십니다. ”
“ 클로비스……. ”
“ 아름답고 위대한 여신이시여, 부디 제 부름에 응답해 주시길. ”
클로비스는 달콤하게 속삭이며 그녀의 꽃잎 같은 입술에 키스했다.
◇ ◆ ◇ ◆ ◇
클로비스는 색을 밝히는 편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금욕적인 편도 아니었다. 특별히 교제하는 여인은 없었지만 주기적으로 사교회장에 나가면 그에게 꼬여드는 여자들은 많았다. 하룻밤 불장난은 그에게 유희보다는 그저 욕구를 풀기 위한 생리적인 행동에 가까웠다.
그러나 성녀 아리스텔라, 그녀의 모습을 한 여신 위그멘타르를 안은 이후로 클로비스는 지독한 불감증이 되어버렸다. 정확히는, 그녀 외에는 어떤 여자를 봐도 욕구가 동하지 않았다. 다른 여자가 제 몸에 손을 대는 것조차 께름칙했다.
아무래도 그녀와의 경험이 너무 강렬했던 탓에, 두뇌가 다른 여자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탓이리라. 클로비스는 최대한 아리스텔라를 닮은 여자를 찾아보려 애썼다.
그러나 사교회장의 영애 가운데 그녀처럼 순진하면서도 당당한 여인은 없었다. 순진하면 바보이거나, 청순한 얼굴을 하고 영악한 행동을 일삼은 여인들뿐이었다.
성녀 아리스텔라는 참으로 희한한 인물이었다. 순진무구하고 소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데, 뜻밖에도 심지가 굳어 자신이 불합리하다 생각한 일에는 결코 뜻을 굽히지 않는다.
진실을 말하게 하는 꽃, 카루스 엔타타의 꽃물을 우려낸 차를 먹이고 협박했을 때도 그랬다. 무서워서 덜덜 떨면서도, 그에게 굽히지는 않았다.
강한 배짱을 가진 이들이 강자 앞에서 당당하게 맞서는 것은 많이 보았지만, 그녀처럼 무서워서 오들오들 떨고 훌쩍훌쩍 울면서도 굽히거나 물러나지 않고 맞서려는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이겨내는 인간이란 얼마나 강한 존재인가.
성녀 아리스텔라는 약하면서도 강한, 정말로 모순된 존재였다. 그런 그녀가 특이하다고 클로비스는 생각했다. 그래서 빠져들었다.
영지로 내려갔다. 그녀는 시골 출신이라고 했으니 평민 가운데는 비슷한 여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숱하게 많은 영지민들을 보아도 아리스텔라처럼 곧으면서도 숭고한 마음씨를 지닌 여인은 없었다.
‘ 이렇게 넓은 세상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왜 그녀만이 특별할까. ’
여자와의 잠자리가 불편해졌다. 욕구는 분명 쌓이고 있는데, 다른 여자를 이용해서 해소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클로비스의 취향인 아름다운 얼굴, 육감적인 몸매를 지닌 여인들은 분명 많았다. 그러나 그녀들의 교태로운 몸짓이나 교성 따위가 하나같이 역겹게 느껴져 안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아닌 여자를 안느니, 차라리 그녀와 섹스했을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자위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꿈속에서 클로비스는 몇 번이나 아리스텔라를 안았다. 단정하던 표정이 흐트러지고, 온몸이 붉어진 채로 높은 교성을 지르며 허리를 흔드는 그녀의 모습은 미치도록 아름다웠다.
소년시절에 겪었던 첫 몽정이 이랬을까. 잠에서 깨어난 클로비스는 참지 못하고 잠옷에 사정해버린 제 분신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겨우 한 번의 만남, 한 번의 섹스. 하룻밤 불장난이나 마찬가지인 관계였을 뿐인데.
스프라우트 공작의 후계자, 무엇에도 구속당하는 일 없이 그저 자신의 신념대로 검을 휘두르고 악인을 심판하던 자유로운 집행관 클로비스는 나이 서른에 첫사랑의 열병을 앓았다.
부끄러워서 어디 가서 말하지도 못했다. 그런데도 사랑스러운 아리스텔라를 만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폐쇄된 신전에는 제아무리 황성의 집행관이며 대공가의 후계자라 해도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었다. 차라리 신전 안에서 또 극악무도한 사건이라도 일어나면 제가 불려갈까. 그런 황당한 상황을 진지하게 바라기도 했다.
‘ 성녀님을 다시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
여신 위그멘타르의 신전과 가장 밀접한 장소는 신성제국의 중추인 교황청이다. 즉위식 때 보았던 새로운 교황의 모습을 떠올렸다. 클로비스보다 나이가 어린 청년이었다. 당당하면서도 속에 꿍꿍이가 있어 보이는 면이 어쩐지 자신과 이야기가 통할 것 같았다.
교황과 밀접한 관계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도 권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공작가로 돌아가 아버지의 작위를 물려받기로 결심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황제는 정치의 중심이기에 교황과 둘이서만 대면하는 일이 많지 않았다. 교황청이 정치적인 세력이라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공과의 대면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다.
클로비스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공작령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신의 축복이 필요하다는 변명으로 교황청에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성격이 잘 맞는 두 남자가 친해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새로운 교황 발레리아누스는 정치적인 야욕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교황청의 권위를 높이고 인접국에 신성제국의 위용을 뽐내고 싶어 했다.
그러나 교황청에서 먼저 나서서 대외적인 활동을 하는 것은 아무래도 멋이 없었다. 황제나 대공이 먼저 나서서 신의 이름을 높이는 사업을 벌이겠다고 요청하면, 마지못해 허락하는 것이 가장 보기 좋은 형태였다.
신성제국의 교황은 황제의 권위를 상징할 뿐 그 자신이 정치에 뜻을 두지 않는다는 입장을 고수해왔기에 더욱 그러했다.
신성제국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가진 것은 황제였으나 교황과 자주 만나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기엔 아무래도 걸리는 점이 많았다. 그러니 황제 다음 가는 권력자이면서, 황실보다도 많은 재산을 보유하고 있는 스프라우트 공작가는 아주 좋은 교섭 대상이었다.
두 남자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던 것은, 어쩌면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 ◆ ◇ ◆ ◇
“ 아, 아아. 그만……! ”
새하얀 성의 위를 더듬는 남자의 손길에 아리스텔라의 숨이 흐트러졌다. 움찔거리며 몸을 비틀 때마다 그녀의 몸을 감싼 단단한 팔이 꽉 죄어들었다.
“ 성녀님. 젖꼭지가 섰습니다. ”
“ 아흣, 말, 하지 마세요……! ”
성의 위로도 알 수 있을 만큼 뾰족하게 솟아오른 젖꼭지를 손끝으로 잡아 비틀자, 아리스텔라가 고개를 흔들면서 소리를 높였다.
“ 흐앙! 잠깐, 잠깐만요……, 아아! ”
남자의 손이 가슴 밑을 쓰다듬다가 아래로 내려가 허리띠를 풀었다. 아직 여며진 채로 고정된 옷자락 너머로 다리 사이를 더듬자, 아리스텔라는 허벅지를 꽉 닫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 이러지, 마세요! 다, 다른 사람을 부를 거예요……! ”
“ 하하하. 귀여운 협박이로군요. ”
클로비스가 아리스텔라의 몸을 애무하는 것을 느긋하게 바라보던 발레리아누스가 단정하게 여몄던 옷자락을 손끝으로 훑으면서 말을 이었다.
“ 아론 신관이 보낸 사제와 세 번의 밤을 함께 하겠다고, 말씀하셨지요.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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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서 죄송합니다. 169, 170화 연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