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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발레리아누스
[168]
신전의 정문에 다다른 아리스텔라는 예상 외로 교황을 마중 나온 사제가 많지 않은 것에 깜짝 놀랐다.
처음 그녀가 성녀로서 이 신전에 들어왔을 때는 사제와 기사들이 모두―사실 그때 조슈아는 빠져있었으나 아리스텔라는 긴장해서 전원의 얼굴을 파악하지 못했으니―나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짐을 나르고 호위할 성기사 둘과 시중을 들 수습사제 둘, 그리고 대신관 히페리온이 나와 있을 뿐, 평사제와 다른 신관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 대신관님. 이 인원만 나와 있어도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 건가요? 교황 성하께서 불쾌하게 생각하시면……. ”
“ 이 신전은 속세의 규약과 사제의 계율보다 더 위에 있는, 성녀님의 의사에 따라 움직이는 곳입니다. 교황이라고 해도 이 신전 안에 있는 동안은 한 사람의 사제에 지나지 않습니다. ”
“ 그, 그런 건가요? ”
“ 이대로 성문을 여시겠습니까? ”
“ 네? 네에……. ”
어쩐지 히페리온의 태도가 날이 서있는 듯했으나, 영문을 모르는 아리스텔라는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철컹. 철컹. 쿵.
도개교가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고, 무거운 성문이 끼익, 하고 열렸다.
“ 아……. ”
교황은 아리스텔라가 생각했던 대로 비단처럼 부드러운 하얀 성의를 입고, 백금과 황금을 두르고 오색의 보석을 박아 만든 화려한 삼중관을 쓰고 있었다. 어린아이나 신도들에게 상냥하고 다정하게 대할 것 같은 인상도 예상대로였다.
다만 한 가지 예상과 다른 것은, 교황의 연령이었다.
구불거리는 긴 은발에 맑은 하늘색 눈동자. 어딘가 자신만만해 보이는 느낌이 로이드를 닮은 듯한 그는, 그리 큰 키는 아니었지만 다부진 몸을 하고 있었다. 헐렁한 성의를 입고 있음에도 넓은 어깨와 커다란 손이 그를 증명하고 있었다.
전대 교황이 병환으로 인해 양위한 것이 불과 몇 달 전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예상했어야 했다. 아리스텔라가 성녀가 되기 겨우 몇 달 전에 새로운 교황이 된 그는 대신관 히페리온보다도 두세 살 가량 어려 보이는 젊은 청년이었다.
“ 교황 발레리아누스, 여신의 현신이신 아리스텔라 성녀님을 뵙습니다. ”
아리스텔라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새로운 교황 발레리아누스는, 사제보다는 차라리 정치가가 되었으면 어울린다고 생각될 만큼 당당한 이미지의 호남이었다.
예상 밖의 교황의 외모에 놀란 아리스텔라의 시선이 허공을 방황했다.
“ 성녀님. 신께서 창조하고 아름답게 가꾸신 이 세상에 당신의 이름을 알리는 첫 번째 종에게, 부디 은총을. ”
“ 네? ”
교황 발레리아누스가 갑자기 무릎을 꿇자, 아리스텔라는 깜짝 놀라 어깨를 떨었다.
당황해서 고개를 돌리다가 히페리온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조금 불쾌한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가 곧 표정을 풀고, 말없이 살짝 몸을 숙여 자세를 취했다. 미사 때 늘 해왔던 대로 성녀에게 축복을 받는 종의 자세였다.
‘ 아. 축복을 내리는 거구나. ’
교황 발레리아누스는 신전의 사제가 아니고, 평사제도 신관도 아닌 무려 교황이기에 잠시 잊고 있었다. 그녀가 여신의 현신인 이상, 이 신전에 들어온 교황 발레리아누스 또한 그녀를 섬기는 사제였다.
아리스텔라는 긴장해서 떨지 않도록 천천히 긴 숨을 내쉬고, 발레리아누스에게 다가가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 교황 성하께, 여신의 은총을. ”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자, 발레리아누스가 아리스텔라의 손에 스치듯 가벼운 입맞춤을 남기고 일어났다.
“ 영광입니다, 성녀님. ”
그녀를 향해 미소 짓는 발레리아누스의 얼굴은 분명 부드러운데, 이상하게 어딘가 위압감이 느껴졌다. 교황의 지위에 오른 사람이기에 그런 것일까. 하늘색의 눈동자에 이채가 감돈다.
“ 저, 저도 만나뵈어서 반가워요, 교황 성하. ”
아리스텔라는 그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 살짝 눈을 내리깔며 대답했다. 어색하지 않게 웃어 보이려 해도 자꾸 긴장이 되어 표정이 굳는다.
어떻게든 긴장을 풀려 주위를 둘러보는데, 교황 발레리아누스의 뒤에 서있는 수행원의 모습이 낯익었다.
“ 당신은……! ”
“ 오랜만에 뵙는군요. ”
이자크를 닮은 검은 머리에 검은 눈, 그리고 구릿빛 피부. 전에 방문했을 때와는 달리 하얀 제복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붉은 망토를 두른 클로비스가, 아리스텔라를 향해 인사했다.
“ 클로비스 에카르드 스프라우트, 성녀님을 뵙습니다, ”
“ 클로비스 집행관님! ”
“ 이제는 집행관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작위를 물려받으면서, 공작령을 다스리게 되었거든요. ”
신성 제국에서 황제 다음가는 지위로, 가장 넓고 비옥한 영토를 다스리는 스프라우트 대공.
그것이 지금 클로비스의 신분이었다.
“ 이 미천한 종에게도 성녀님의 은총을 내려주실 수 있습니까? ”
그의 검은 눈동자가 아리스텔라를 향해 가늘게 휘어지더니,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숙였다.
클로비스는 사제도 성기사도 아닌데다 그녀를 욕보인 전적도 있지만, 신전에 방문한 그에게 축복을 내리기를 거절하는 것은 곧 그를 이 신전에서 내쫓는다는 의미였다.
교황 발레리아누스의 앞에서 처음부터 사람을 내치는 태도를 보이고 싶지 않았던 아리스텔라는 조금 주저하다가 손을 내밀었다.
“ 음, 네. 스프라우트 공작님께도, 은총을……. ”
“ < 스프라우트 공작님 >이라니, 그건 너무 딱딱한 호칭이군요. ”
클로비스는 아리스텔라의 손을 잡고는 그녀의 손등에 입술을 꽉 억눌렀다. 그 입술의 뜨거움에 아리스텔라는 흠칫 놀랐지만, 클로비스가 강하게 손을 붙들고 있어서 빼낼 수가 없었다.
입술 사이로 살짝 내민 혀가 하얀 손등을 맛보듯이 훑자, 아리스텔라는 야릇한 감각에 순간 다리의 힘이 풀려 비틀거렸다.
“ 무슨……! ”
“ < 클로비스 >라고 불러주십시오, 성녀님. ”
아리스텔라가 목소리를 높이기 전에 재빨리 일어난 클로비스는 그녀를 향해 씩 웃어보였다. 키스했던 손을 놓지는 않은 채로.
“ 앗, 으……. 네, 네. 클로비스. ”
“ 감사합니다. ”
아리스텔라가 이름을 부르자, 클로비스는 그제야 만족한 듯 손을 놓았다. 아리스텔라는 소매 속으로 손을 감추며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호감 가는 인상임에도 어딘가 위험한 느낌이 감도는 교황 발레리아누스와, 아무리 봐도 장난감 목줄을 채워놓은 위험한 짐승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클로비스 공작.
아리스텔라는 마치 하얀 신수와 검은 마수 앞에서 덜덜 떠는 사냥감이 된 듯한 기분이 들어 조금 두려워졌다.
‘ 분명 오후까지만 해도, 정말로 기분이 좋아서 들뜨는 느낌이었는데. ’
당황스럽지만 그녀는 이 신전의 주인이었다. 신전의 주인이자 여신의 현신인 성녀로서 자신을 찾아온 이들을 내칠 수는 없었다.
“ 들어오세요, 두 분 다. ”
아리스텔라가 어색하게 웃으며 신전 안으로 두 사람을 안내하는 것을 보며, 히페리온과 조슈아는 난처한 한숨을 내쉬었다.
◇ ◆ ◇ ◆ ◇
교황의 방문 시각이 늦은 탓에 오늘은 우선 하룻밤 쉬고, 내일 대화를 하기로 했다.
원래는 교황의 거처를 사제들이 머무는 동쪽 구역에 마련할 예정이었으나, 교황 발레리아누스의 수행원으로 동행한 것은 사제가 아닌 클로비스였다. 사제가 아닌 그를 사제 구역에 머물게 할 수 없었기에, 아리스텔라는 어쩔 수 없이 중앙 건물에 두 사람의 방을 마련해주었다.
“ 두 분께서는 3층의 방을 쓰시면 돼요. 혹시 불편한 것이 있으시다면 알려주세요. 최대한 마련해 볼게요. ”
“ 아닙니다. 훌륭한 방이로군요. ”
교황 발레리아누스가 감탄하는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성녀의 방만큼 넓지는 않지만 이곳도 동쪽 건물에 있는 사제들의 방보다는 훨씬 넓었다. 당분간 묵는 데에 불편함은 없을 것이다.
“ 성녀님. 저도 교황 성하와 함께 이 방에 묵으면 되는지요? ”
“ 아뇨. 공작님……. 아니, 클로비스는 옆방을 쓰세요. 구조는 같으니까. ”
“ 전에 보니 응접실은 제법 방음이 잘 되는 것 같습니다만, 이 방도 비슷한 구조로군요. ”
“ 아, 그건……! ”
클로비스가 집행관으로서 이 신전을 방문한 것은 비밀이 아니지만, < 응접실의 방음 >을 상기할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아리스텔라는 당황해서 얼굴을 붉혔다가, 혹 발레리아누스가 눈치챌까봐 표정을 고치고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 벽도 문도 같은 재질로 만들었으니까요. ”
“ 이런. 그럼 교황 성하께서 저를 부르시면 제가 어떻게 알 수 있는지요? ”
클로비스의 질문에 아리스텔라는 침대 맡의 간이 테이블을 가리켰다. 천장에서 긴 관이 벽을 타고 내려온 자리에는 가느다란 실에 방울이 매달려 있었다. 누군가 호출할 일이 없는 성녀의 방에는 없는 물건이지만.
“ 옆방 침대에서 종을 울리면, 이쪽 방울이 흔들릴 거예요. ”
아리스텔라는 작은 은색 방울을 발레리아누스와 클로비스에게 보여주고는, 침대 맡의 종을 가리켰다.
“ 반대로 교황 성하께서 이쪽의 종을 울리면, 옆방의 클로비스에게 소리가 들릴 거고요. ”
“ 그렇군요. 이해했습니다. ”
클로비스는 가볍게 미소 지으며 아리스텔라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 꺄아! ”
“ 그렇다면 저 종을 울리지 않는 한, 이 방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밖에 알려질 일은 없다는 거로군요? ”
“ 자, 잠깐만요, 공작님! ”
“ 클로비스라고 부르라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
“ 아니, 클로비스. 잠깐만요, 이러지 마세요! 교황 성하 앞에서……! ”
아리스텔라가 당황하여 클로비스의 손을 뿌리치려 해도 남자의 힘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난처한 얼굴로 도움을 구하듯 발레리아누스를 바라보는 아리스텔라의 시선에, 은발의 미남자가 빙긋 웃었다.
“ 그리 당황하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성녀님. ”
머리에 쓰고 있던 삼중관을 벗어 테이블에 올려놓고 돌아선 발레리아누스의 하늘색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 이 신전에서 일어난 일은 전부, 보고를 받았으니까요. ”
“ 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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