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금된 성녀와 비밀의 밤-167화 (167/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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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발레리아누스

[167] 교황, 발레리아누스

지금은 누군가 들어오지도, 빠져나가지도 못하는 폐쇄된 신전이지만, 본래 여신 위그멘타르의 신전은 사람의 출입이 불가능한 곳이 아니었다고 아론은 말했다.

전대 성녀의 시종은 신전을 보호하는 결계를 약화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집행관 클로비스는 무력으로 신전의 결계를 깨고 침입해 골렘을 쓰러뜨렸다.

그러니 폐쇄된 신전이라고 해서, 이곳이 완전히 세상과 분리된 공간은 아니다. 교황이 정식으로 방문 신청을 한다면 이쪽에서 결계를 없애고 신전의 문을 열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 하지만 어째서? ’

맨 처음 여신 위그멘타르의 신전이 설립되었을 때야 아주 오래전이니 넘어가더라도, 그로부터 몇 대 이후로는 신전이 폐쇄되어 누구도 출입할 수 없게 되었다. 당연히 교황청에서 이곳을 방문한 기록도 없고, 그럴 이유 또한 없다.

애초에 사제들이 자신들 선에서 일을 처리하지 않고, 황성에 연락하여 집행관을 불러온 것부터가 처음 있는 일이라고 히페리온이 말했다.

“ 교황 성하께서 이 신전에는 어떤 볼일로 오시는 걸까요? ”

“ 성녀님을 만나고 싶다고 하시는군요. ”

“ 어머, 교황 성하께서 저를요? ”

신성 제국에서 교황은 황제와도 같은 위치였다. 정확히는 황제의 권위가 교황으로부터 나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대외적으로 교황은 정치에 대해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황제의 권한을 인간이 아닌 신이 부여한 것이라 공표하는 신성제국에서 교황의 의사를 거스를 수 있는 인간은 없었다.

비록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발언을 하지 않더라도, 교황은 가장 신에 가까운, 황제보다도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교황이 아리스텔라를 만나러 온다고 한다. 대신관인 히페리온조차도 처음에는 높은 신분의 사람이라 눈을 마주치지 못했는데, 무려 교황이 직접 찾아온다니.

“ 저어, 대신관님. 교황 성하께서 오시는데, 저는 무엇을 하면 되나요? ”

아리스텔라는 바짝 긴장해서 입술을 매만졌다 옷자락을 매만졌다 안절부절 못하면서 제자리걸음을 하다가 히페리온에게 물었다.

클로비스가 방문했을 때는 손님이 아니라 로이드의 형을 집행하기 위한 집행관이었고, 정식 방문이 아니라 결계를 부수고 침입했기에 다소 격식을 차리지 못한 채 맞이해도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교황의 정식 방문이다. 갑작스럽다고는 해도 이곳에 방문하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평범한 손님을 대하는 것도 아니고, 무려 신성제국의 교황을 어떻게 대접하면 좋은지 몰라 아리스텔라는 난처해 했다.

대신관으로 사제의 계율에 밝은 히페리온이라면 잘 알고 있지 않을까. 교황을 맞이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이라든가, 그가 좋아하는 차나 다과 등을 준비해서 부족하다는 인상을 주지 않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히페리온의 입에서 나온 것은 전혀 다른 말이었다.

“ 교황 성하를 만나고 싶으십니까? ”

“ 네? ”

이미 교황청에서 교황이 이 신전에 방문한다는 전갈이 오지 않았나. 그런데 만나고 싶은지 아닌지는 어째서 묻는 것일까. 교황이 오겠다는데 거절할 수 있을 리도 없는 것을.

“ 만나고 싶지 않으시다면, 거절하셔도 됩니다. ”

“ 네? 그, 그러면 안 되잖아요. 교황 성하께서 오시는데……. ”

“ 성녀님. 비록 이 신전 안에서 지내셔야 하는 처지라고는 하나 당신은 여신의 현신이십니다. 당신께는 교황의 방문을 거절할 권한이 있습니다. ”

교황은 신에 가장 가까운 인간.

성녀 아리스텔라는 신 그 자체.

신전에서 나가지 못한다고 해서 성녀의 권위가 약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비록 재앙의 여신 위그멘타르를 봉인한 몸이라고는 하나 생명의 신 헤시우스와 재앙의 여신 위그멘타르는 부부였고, 부부는 일심동체였다.

여신의 현신인 그녀는 당연히 교황보다 위의 존재니, 그녀가 만나기 싫다고 한다면 그것이 곧 신의 뜻. 신의 첫 번째 종인 교황은 비록 신전 앞까지 찾아왔다 하더라도 신의 뜻을 받들어 묵묵히 돌아가야 하는 처지였다.

“ 이런 갑작스러운 방문을 허가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

“ 대신관님? ”

“ 만나기 부담스러우시다면 방에 계시지요. 제가 사제들을 이끌고 신전의 정문으로 나가 교황 성하를 돌려보내겠습니다. ”

“ 그, 그럴 수는 없어요! ”

아무리 아리스텔라 자신이 여신의 현신이고, 교황은 신을 모시는 사제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말해도, 시골마을에서 나고 자란 평범한 소녀였던 아리스텔라에게 교황은 까마득히 높은 하늘 위의 존재나 마찬가지였다.

아리스텔라가 인간으로, 평범한 마을 처녀로 살아온 세월이 만들어낸 상식과 습관은 그리 쉬이 바뀌지 않았다. 무려 교황이 그녀를 만나러 이곳까지 찾아왔는데 특별한 이유도 없이 문전박대하는 일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 하지만 성녀님께서는 교황 성하의 방문을 불쾌하게 여기시는 듯합니다만. ”

“ 네? 아니에요! ”

아리스텔라는 강하게 부정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당황한 것은 사실이지만, 만나기 싫다고 말할 것까진 아니었다. 그저 그녀는 예상치 못한 교황의 방문에 유명인을 만나게 된 열성팬마냥 안절부절 못할 뿐이다.

“ 저는 교황 성하가 어떤 분인지 모르거든요. 그래서 놀라서 그런 거예요. 만나 뵙고 싶기도 하고…….

“ 그렇습니까……. ”

히페리온은 어쩐지 떨떠름한 표정으로 수긍했다. 귓가에 꽂혀있는 붉은 제라늄 때문인가, 나지막이 한숨을 쉬는 모습조차 신화에 등장하는 천사의 모습처럼 아름답다.

“ 알겠습니다. 성녀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출입을 허가한다는 전갈을 보내지요. ”

“ 저, 그럼 교황 성하는 언제쯤 도착하시는 건가요? ”

“ 오늘 저녁입니다. ”

“ 네? 그렇게 빨리요? ”

벌써 늦은 오후였다. 앞으로 몇 시간이면 도착한다는 소리다.

“ 어, 어쩌죠? 아직 아무런 준비도……. 아니, 목욕은 아까 하고 왔지만……. ”

“ 성녀님. 그리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

히페리온이 살며시 아리스텔라의 양 어깨를 짚어 진정시키자, 그녀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히페리온의 붉은 눈동자는 여전히 맑았지만, 어딘가 깊은 근심을 담고 있었다.

“ 아……. ”

대신관인 그 앞에서 제가 너무 호들갑을 떤 것 같아 민망해진 아리스텔라는 양손으로 뺨을 감싸고 깊게 숨을 내쉬었다. 뺨이 뜨겁고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 교황 성하는 어떤 분일까? ’

성령석이 반응했다는 이유로 성녀가 되어 여신 위그멘타르의 신전으로 오기는 했지만, 아리스텔라는 교황청과 사제들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이곳은 금남구역이라 남자 사제와 성기사만이 선발되어 들어왔지만, 조슈아로부터 어렴풋이 교황청에는 여자 사제들도 있다는 말을 들은 것도 같다.

당대의 교황은 남자일까 여자일까. 인자한 할아버지나 할머니의 모습을 상상하며, 아리스텔라는 교황의 앞에서 못 미더워 보이지 않도록 야무지고 예의바른 모습을 보여야겠다고 생각했다.

◇ ◆ ◇ ◆ ◇

아리스텔라는 조슈아의 도움을 받아 급히 옷차림을 단정하게 가다듬고, 머리를 단정히 빗어 내렸다. 평소에는 잘 하지 않던 하얀 레이스가 달린 반투명한 베일까지 쓰고는 거울에 제 모습을 이리저리 비춰보았다.

오늘 내내 들떠있던 탓에 뺨이 상기된 것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것이 신경 쓰여, 조슈아에게 물었다.

“ 조슈아, 이상하지 않은가요? ”

“ 아름다우십니다, 성녀님. ”

그녀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아름답고 우아했다.

가냘픈 몸의 선을 그대로 드러내는 새하얀 성의, 넓게 펴진 치마 사이로 얼핏 보이는 작은 신발. 물빛의 머리카락은 흘러 떨어지는 물처럼 윤기가 흘렀고, 그 위로 반투명한 하얀 베일이 드리워져 숭고한 느낌을 주었다.

흥분과 기대감을 감출 수는 없는지 발그레한 뺨 때문에 엄숙한 성녀보다는 순진한 소녀 같은 인상이었지만, 그 점이 오히려 더욱 사랑스러웠다.

“ 미리 사제들의 예의범절을 배워둘 걸 그랬어요. 실수라도 하면 어쩌죠? 교황 성하께 밉보이고 싶지 않은데……. ”

“ 성녀님. 그런 것은 정말로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황제의 권위가 교황으로부터 나오듯, 교황의 권위는 신으로부터 나오니까요. ”

성녀의 아래에 교황이 있고, 그 아래에 사제들이 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이 신전은 속세에서 분리된 공간이기에 여신 위그멘타르의 신전에 한해서, 사제들의 상전은 교황이 아니었다.

교황청의 인선에 따라 이 신전에 들어온 순간부터, 그들이 섬겨야 할 주인도, 존중해야 할 대상도 오직 성녀 한 사람이었다.

사제로서의 품격을 유지하기 위해 예의를 지켜야 하는 것은 맞지만, 이쪽이 교황청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는 셈이다.

“ 조슈아. 교황 성하는 남자 분인가요, 여자 분인가요? ”

“ 전대 교황 성하는 여성분이셨답니다. 병환이 깊어 성녀님께서 신전에 오시기 몇 달 전에 지금의 교황 성하께 양위하고, 요양에 들어가셨지만 말이죠. ”

“ 어머, 그런 일이 있었군요. 저는 전혀 몰랐어요. ”

“ 교황청의 일이 지방의 교회에 전달되기까지는 제법 오래 걸리니까요. 지금의 교황 성하는 남성분이랍니다. ”

그렇다면 금녀구역인 이 신전을 방문해도 별다른 문제는 없겠구나 싶어 아리스텔라는 안도했다.

지금의 교황은 어떤 사람일까. 위엄 있는 모습보다는 상냥하고 다정한 모습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아리스텔라는 나름대로 자신이 생각하는 교황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산타클로스처럼 하얀 수염을 기르고 머리에는 삼중관을 쓰고, 하얀 사제복을 치렁치렁하게 걸친 모습을 상상하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 인자한 분이면 좋겠어. ’

신전의 사제와 성기사는 모두 젊은 청년들뿐이라 아무래도 기분이 풀어지기 마련이다.

오랜만에 웃어른을 만난다는 생각에 조금 긴장한 아리스텔라는 손가락을 매만지며 정문에서 신호가 오기를 기다렸다.

비잉―

방에 있던 성령석이 울렸다. 정문에 교황이 도착하여, 결계가 열렸다는 신호였다.

“ 내려가요, 조슈아. ”

“ 예, 성녀님. ”

============================ 작품 후기 ============================

어제는 예고 없이 휴재해서 죄송합니다.

대신 오늘 167, 168화 연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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