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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방문자
[165]
“ 아……. ”
마차를 장식한 꽃은 생화가 아니라 종이꽃이었다. 생화라도 그렇게 들이치는 비를 맞았으니 볼품없이 흐트러졌을 터이지만, 종이로 만든 조화의 꼴은 더욱 처참했다.
물에 푹 젖어서 이리저리 흔들리다 찢어지고, 꽃을 접어 묶어놓은 실이 끊어져 마차바퀴에 휘감겨 있었다. 성기사들이 성녀를 기쁘게 하기 위해 밤새워 접었다는 종이꽃은 물에 젖은 휴지조각처럼 변해버렸다.
“ 어, 어쩌죠, 케인? ”
“ 일단 바퀴에 걸린 것부터 뜯어내고, 마차 외부에 둘렀던 것들을 제거하겠습니다. ”
“ 뜯어낸 꽃은 그냥 버리는 건가요? ”
“ 젖어서 모양이 망가진 데다 흙도 묻어있어서 어쩔 수 없습니다. 건조 마법을 쓴다고 해도 물기가 마르는 것뿐, 원래의 형태로 돌아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
“ 그럴 수가……. ”
아리스텔라는 자신을 위해 준비한 선물이 망가진 모습에 난감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선물이 망가져서 속상한 것보다도, 저를 위해 애쓴 이들의 노력의 결과물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것이 슬펐다.
“ 미안해요. 다들 열심히 준비했을 텐데……. ”
“ 아닙니다. 성녀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았으니, 저희는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
“ 흐으으……. ”
“ 정말로 괜찮습니다. ”
에른스트는 쾌활하게 웃어 보였지만, 아리스텔라의 마음은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았다. 모처럼 자신을 위해 준비한 선물이 비에 젖어 쓰레기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팠다.
“ 케인. 꽃을 떼어내기 전에 조금 살펴봐도 되나요? ”
“ 으음, 예. 그렇게 하십시오. ”
미련이 남은 아리스텔라는 마차에 가까이 다가가 문과 바퀴에 주렁주렁 매달린 종이꽃을 바라보았다.
비에 젖기 전에 조금 더 오랫동안 모습을 봐두었더라면 좋았을 거라는 후회가 들었다. 찢어지고 우그러들고, 흙이 묻어서 지저분해진 조화라도 그녀에게는 소중한 선물이었다.
아리스텔라는 비교적 형태가 멀쩡한 주황색 조화를 손끝으로 매만졌다.
‘ 다들 고마워요. 그리고 미안해요. ’
자신을 위해 놀라운 선물을 준비해준 이들에 대한 감사를 담아, 비에 젖은 조화에 손을 얹은 채 눈을 감고 기도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아리스텔라의 손끝에서 뻗어 나온 신성력이 주홍색의 조화로, 그 조화를 매단 철사와 실을 따라 다른 조화를 둘러싸며 하얗게 빛났다. 손끝에서 신성력이 빠져나가는 느낌에 눈을 뜨자, 반짝이는 빛이 마차를 휘감았다. 마차를 둘러싼 조화에 아리스텔라가 발한 신성력이 응축되었다.
“ 세상에……! ”
비에 젖어 볼품없이 늘어져 있던 조화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니, < 원래 >가 아니었다. 처음 그녀가 보았을 때 이상으로 생생한 빛을 띠며 활짝 피어난 그것은 더 이상 조화가 아니었다.
종이로 만든 조화가 생화로, 종이꽃을 묶어놓은 실과 철사가 꽃의 줄기와 덩굴로, 볼품없이 늘어져있던 조각들이 녹색의 이파리로 변했다.
성기사들이 성녀를 위해 준비한 조화로 꾸민 꽃마차는, 색색의 향기로운 꽃으로 장식한 진짜 꽃마차가 되어있었다.
“ 어, 어떻게 이런 일이……. ”
“ 성녀님께서 이적을 행하신 거군요. 아니, 하지만 설마 조화가 생화로 변하리라고는……. ”
에른스트와 케인은 자신들의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는지 몇 번이나 눈을 깜박이며 마차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그것은 종이꽃이 아니라 살아있는, 진짜 꽃이었다.
성녀의 신성력이 만든 기적이었다.
“ 성녀님, 이것 보십시오. 마차 안의 꽃들도 전부 생화로 변했습니다. ”
기쁜 듯 감탄하는 에른스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가 마차 안에 있던 꽃바구니를 아리스텔라에게 내밀자, 아리스텔라는 고개를 숙여 향기로운 꽃 내음을 맡았다. 조화에는 없는 것. 살아있는 꽃들의 신선하고도 달콤한 향기가 은은하게 느껴졌다.
“ 저도 신성 마법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왔지만, 이런 것은 처음 보았습니다. ”
“ 저도 처음이에요……. ”
아리스텔라는 신기한 듯 제 손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간단한 신성마법조차 해내지 못했는데, 지금은 무려 종이로 만든 조화를 생화로 바꾸는 마법을, 아니 기적을 행했다.
‘ 내 신성력이 또 강해진 걸까? ’
아리스텔라는 문득 고개를 돌려 주위를 바라보았다. 케인과 아리스텔라를 뒤따라온 성기사들이 생화로 둘러싸인 마차를 보고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리고 있었다.
“ 성녀님……! ”
조슈아가 놀란 얼굴로 다가와 아리스텔라의 어깨에 손을 짚었다. 거의 경악에 가까운 그의 표정을 보고 흠칫 놀란 아리스텔라는 제가 뭔가 잘못했나 싶어 움츠러들었다.
“ 조슈아, 저기. 혹시 제가 잘못한 건가요? 마법을 사적인 일에 쓰면……. ”
“ 성녀님. 이것은 마법이 아닙니다. ”
상급 마법사라면 사물의 속성에 기반을 두고 형태를 바꾸는 마법을 행할 수 있다. 히페리온이 선보였던, 침대 시트를 성녀의 성의로 바꾼 마법이 그러했다. 그의 가르침에 따라 이자크와 아리스텔라가 성의로 봉제인형을 만들어낸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조화를 생화로 바꾸는 것은 더 이상 마법이 아니었다.
생명이 없는 것에 생명을 불어넣는 그것은 말 그대로 기적이었다.
신이 아니면 행할 수 없는.
“ 이 자리의 모든 이들 앞에서, 성녀님께서 여신의 힘으로 기적을 선보이신 겁니다. ”
“ 이, 이게요? 저는 그냥 감사 인사를 했을 뿐인데……. ”
“ 위대한 여신의 현신이시여. 당신의 종에게 은총을. ”
조슈아는 감격한 얼굴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비가 그쳤다고는 해도 아직 흙이 마르지 않아 바닥은 축축했다. 그러나 조슈아는 신발에 빗물이 스미는 것도 개의치 않고, 무릎을 꿇은 채 아리스텔라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 여신의 현신이시여. 당신의 종에게 은총을. ”
성기사들이 차례차례 무릎을 꿇으며 아리스텔라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아리스텔라는 당혹스러운 한편 너무나도 기뻐서 가슴이 설렜다. 미사실에서도 분명 성기사들에게 그녀의 신성성을 인정받았지만,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인정받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성기사들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까지.
◇ ◆ ◇ ◆ ◇
마차를 타고 기사단으로 돌아온 아리스텔라는 상기된 얼굴로 성기사들에게 꽃을 나누어 주었다. 성녀의 힘으로 피워낸 꽃은 무척 아름다우면서도 향기로웠다. 마차를 장식한 꽃은 수거하여 기사단의 휴게실과 성기사들의 방에 조금씩 비치하기로 했다.
“ 이 노란 꽃은 에른스트에게 어울릴 것 같네요. ”
“ 영광입니다, 성녀님. ”
“ 빨간 꽃은 미하일에게. ”
“ 영광입니다, 성녀님. ”
“ 통풍이 잘 되는 그늘에 말리면 드라이플라워를 만들 수 있어요. 아, 이자크? ”
“ 예. ”
호명 받은 이자크가 가까이 다가와 무릎을 꿇자, 아리스텔라는 생긋 웃으며 그의 머리에 화관을 씌워주었다.
“ 오늘 하루 종일 쓰고 있으세요. ”
“ 예……? ”
“ 우후후. ”
멍청한 표정으로 되묻는 이자크를 향해 기분 좋은 듯이 웃어보였다. 아니, 정말로 기분이 좋았다.
케인에게 나머지 꽃의 처리를 맡기고, 아리스텔라는 기념으로 꽃바구니를 가져가기로 했다. 바구니에 담긴 꽃은 조슈아가 들고, 아리스텔라는 기사들을 향해 다소곳하게 인사했다.
“ 오늘 초대해줘서 고마웠습니다. 기사단의 여러분 덕분에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요. ”
“ 저희에게 성녀님과 함께 할 영광을 주셔 감사합니다. ”
케인의 우직한 인사를 받으며 아리스텔라와 조슈아는 기사단을 나왔다. 시간은 늦은 오후에 접어들었다. 저녁을 먹기엔 이르고, 그렇다고 뭔가를 하기에도 애매한 시각이었다.
“ 성녀님. 이제부터는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
아리스텔라는 조슈아의 손에 들린 꽃바구니를 바라보았다. 기사들이 접은 종이꽃에 제가 생명을 불어넣은 것이다. 방에 장식하는 것도 좋지만, 제 발전을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 대신관님은 지금쯤 무엇을 하고 계실까요? ”
“ 집무실에 계실 겁니다. 계절이 바뀌어가니 슬슬 교황청에 필요한 물자를 요청하고 내년의 예산을 배정받을 시기로군요. ”
“ 어라. 그럼 바쁘신 걸까요? 방해하고 싶진 않은데……. ”
“ 성녀님. 당신의 방문을 방해로 여길 사람은 이 신전 안에 아무도 없을 거랍니다. ”
조슈아는 그렇게 말하지만, 업무 중에 상전이 들이닥치면 제대로 일을 하기 어려울 것이 분명했다. 아리스텔라는 잠시 고민했다. 성실한 히페리온이라면 분명 그녀가 방문해도 예의바르게 맞이하며 업무를 미뤄두고 그녀를 대접하는 데 시간을 할애할 것이다.
‘ 방해하고 싶지는 않지만……. ’
아리스텔라는 조슈아의 손에 들린 꽃바구니를 바라보았다. 바구니의 꽃은 조화가 아니라 생화였다. 내일 전하려면 시들지도 모른다. 그 전에 보여주고 싶었다.
‘ 잠깐 보여주기만 하고 나온다면 괜찮지 않을까? ’
아니면 이 기회에 대신관이 어떤 업무를 하는지를 살펴보고,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돕겠다고 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결심한 아리스텔라는 조슈아와 함께 신전의 동쪽 건물에 있는 대신관 히페리온의 집무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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