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금된 성녀와 비밀의 밤-164화 (164/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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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방문자

[164] 뜻밖의 방문자

막사로 돌아온 아리스텔라는 자신을 위해 준비한 기사들의 요리를 보고 깜짝 놀랐다.

짐이 많아 보이긴 했지만 그것은 천막을 치기 위한 짐이라고만 생각했다. 취사 준비를 한다고 들었을 때만 해도 운반이 용이한 말린 과일이나 조리가 편한 재로로 식사를 준비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성기사들이 준비한 식사는 상당히 본격적이었다. 요리사만큼은 아니라도, 제법 손이 많이 가는 정성스러운 요리가 가득했다.

넓적하게 자른 호밀빵을 노릇하게 구운 위로 베이컨과 양상추를 올리고, 오이와 토마토를 얹은 뒤 얇게 부친 계란을 덮고 소스로 마무리한 큼지막한 샌드위치는 대식가인 성기사들의 주식이었다. 다행히 아리스텔라의 몫은 입이 작은 그녀가 흘리지 않고 먹을 수 있도록 작게 잘라 꼬치에 끼워 접시에 담아놓았다.

노릇노릇하게 삶은 고구마를 으깨어 다진 야채와 옥수수, 마요네즈를 넣고 버무리고, 속을 파낸 빵에 채워 넣은 뒤 치즈를 뿌리고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한 바게트에서는 고소한 향기가 났다.

한 입에 먹기 좋은 크기로 잘린 삶은 감자는 꿀로 코팅이 되어 반질반질한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그 위에 땅콩과 시나몬 가루를 뿌려 달콤하면서도 고소한 냄새가 나 절로 입가에 군침이 고였다.

“ 이렇게 손이 가는 요리를 어떻게 다 만든 거예요? 저는 그냥, 간단하게 먹을 줄 알았는데……. ”

“ 성녀님을 모시는 데 부족함이 없도록 준비했습니다. 밖이라고 해서 평소보다 식사가 부실해서는 안 되니까요. ”

아리스텔라가 소식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녀에게 부실한 식단을 제공할 수는 없었다.

평소 성녀의 식사는 신전의 요리장이 만들고, 그 식단은 사제들이 관리한다. 케인으로서는 성기사들도 이 정도로 성녀를 잘 모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아리스텔라는 화려하게 차려진 식탁 위의 음식들을 보고 황홀한 듯이 눈을 빛냈다.

“ 다들 정말 고마워요. 맛있게 먹을게요. ”

먹고 살기 어려운 청소년기를 보낸 아리스텔라는 검소함을 중시하는 신전의 식단에 크게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오히려 식사의 질은 고향에 있을 때보다 더 좋아졌다.

식탐이 있는 편은 아니었지만, 맛있는 음식은 그녀도 좋아했다. 제가 만드는 것도 아닌데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을 부탁할 염치가 없어 특정한 메뉴를 요청한 적이 없을 뿐, 차려진 음식은 거부하지 않는다.

“ 정말 맛있어요. 성기사분들은 요리도 따로 배우시나요? ”

“ 원정을 나갈 때는 취사 당번을 정하니까요. 다들 기본적인 것은 할 수 있습니다. ”

“ 이건 기본을 넘어선 것 같은데……. ”

성기사들이 그만한 요리를 만들기까지 단장인 케인이 얼마나 혹독한 훈련을 시켰는지 알 리가 없는 아리스텔라는 그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해 흘려 넘겼다. 실제로 성기사들은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좋았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아리스텔라는 점심 식사를 마쳤다.

점심을 먹고 성기사들이 뒷정리를 할 동안 아리스텔라는 막사 안에서 차를 마셨다. 그녀의 옆에는 케인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 성녀님. 부족하신 것은 없습니까? ”

“ 없어요. 정말 평소보다 과식했다니까요. ”

조슈아에게 소화를 빨리 시키는 마법이 있다면 가르쳐달라고 조언을 구하고 싶을 정도였다.

온천에서 로이드와 섹스하고 목욕을 마치고, 평소 이상으로 배불리 먹은 탓인지 평소보다 일찍 오후의 나른함이 찾아왔다.

가을이 끝나가는 시기답지 않게 따끈따끈한 공기에 한숨을 내쉬며, 아리스텔라는 케인의 어깨에 기댄 채 주위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쿠르릉―

점심을 먹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새파랗게 맑기만 했던 하늘이 삽시간에 잿빛으로 물든다 싶더니,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 케인, 비가……! ”

“ 지나가는 비입니다. 곧 그칠 겁니다. ”

그렇게 말하면서, 케인은 제 망토를 벗어 아리스텔라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 몸을 따뜻하게 하고 계십시오. 성녀님께서는 추위를 많이 타시니까요. ”

지금은 어엿한 성녀가 되었다 하더라도, 자신의 앞에서 오들오들 떨던 아리스텔라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케인에게 그녀는 늘 애처로운 존재였다. 한기가 들지 않도록 목 위까지 감싸주자, 아리스텔라는 케인의 망토에 폭 파묻힌 형태가 되었다.

“ 고마워요, 케인. ”

“ 별말씀을. ”

“ 하지만 비가 이렇게 내리는데……. 말들도 비를 피해야 하지 않을까요? ”

“ 말들이 모여 있는 장소도 덮개를 만들어 두었습니다. 문제는 마차인데……. ”

갑작스럽게 비가 내린 것은 예상 밖이었으나 임시로 친 막사는 제법 튼튼해서 비가 새들어오지 않았다. 지지대 밑에 마력석을 박아둔 덕분에 빗물이 흘러들지도 않았다.

말과 마차가 있는 구역에는 다소 비가 들이치겠지만, 말들이 구역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괜찮을 것이다.

성녀가 비에 젖는 것이 아니라면 문제없다고 판단한 케인은 입을 다물고 아리스텔라의 옆자리를 지켰다.

케인의 망토는 다소 투박하지만 두툼해서 따뜻했다. 아리스텔라는 망토 안에 파묻혀서 조슈아가 따라주는 따뜻한 차를 홀짝거렸다.

“ 이렇게 비 내리는 풍경을 보는 것도 운치가 있네요. ”

“ 성녀님께서는 비를 좋아하십니까? ”

“ 보는 것은 좋아해요. 맞는 건 싫지만. ”

야외에 나왔을 때 비가 내리면 비를 피하기에 급급했다. 지금은 이렇게 숲의 한중간에 있는데, 비가 들이치지 않는 막사에 앉아 내리는 비를 구경하고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신기했다.

“ 후후. 비가 갠 다음의 하늘은 정말로 맑거든요. ”

◇ ◆ ◇ ◆ ◇

확실히 케인의 말대로 지나가는 비였다. 차를 두 잔 마시고 에른스트로부터 이자크의 훈련생 시절 흑역사를 듣고 나니 어느새 하늘이 맑게 개어 있었다. 아직 비에 젖은 나뭇잎에서는 물방울이 똑. 똑. 떨어지고 있지만, 푸른 하늘에서 내리쬐는 햇볕은 따사로웠다.

“ 비가 그쳤네요. ”

“ 그럼 슬슬 자리를 정리하고 기사단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군요. ”

케인이 손짓하자, 성기사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천막을 걷어내고 바닥에 박힌 검은 마력석을 뽑아내자, 넓은 천자락이 기둥에 휘리릭 말리면서 순식간에 막사가 정리되었다.

‘ 마력석이라는 건 참 편리하구나. ’

자재를 정리하고 짐을 꾸리는 성기사들을 보고, 아리스텔라도 몸에 두르고 있던 푸른 망토를 벗어 케인에게 돌려주었다.

“ 조금 더 하고 계시는 게 좋습니다. 추우실 텐데……. ”

“ 이제 괜찮아요. ”

망토가 따뜻하긴 하지만, 덩치 큰 케인의 어깨에 걸치던 것이라 아리스텔라에게는 무척 컸다. 이것을 걸친 채로 걷다간 망토자락을 밟고 넘어질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케인의 눈 색을 닮은 파란 망토는 그가 하고 있는 것이 가장 잘 어울렸다.

고급스러운 은색 망토를 걸친 로이드도 그렇지만, 짙푸른 망토를 걸친 케인은 정말로 신화에서 튀어나온 영웅의 모습 같았다.

“ 저는 케인이 망토를 걸치고 있는 모습이 좋아요. ”

“ 그렇……습니까? ”

뜻밖의 대답을 들은 케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리스텔라를 바라보다가, 이내 다부진 손으로 제 망토를 받아들었다. 커다란 망토가 펄럭이는 소리가 나더니 남자의 어깨에 걸쳐졌다.

가을 햇볕처럼 농염한 금발과 푸른 눈동자, 무거운 갑주를 걸치고도 위풍당당한 모습. 처음에는 무섭게만 느껴졌던 기사의 모습이, 지금은 진심으로 멋있게 느껴졌다.

“ 후후. 케인, 정말 멋져요. ”

“ ……황송합니다. ”

어젯밤에는 아리스텔라에게 수염을 기르라는 말을 듣고 울적했는데, 오늘은 또 외모에 대한 칭찬을 들을 줄이야.

케인은 이제까지 제 외모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외모로 칭찬을 들은 적도 없었다.

기사들은 대부분 케인을 존경했으나 그것은 그가 강하고 엄격하며 긍지 높은 기사이기 때문이었다. 남자답게 선이 굵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모습에 설레는 여자들도 있었으나 특유의 엄격한 분위기 때문인지 실제로 다가오는 여자는 거의 없었다.

그러니 외모에 대한 칭찬을 들은 것은 아리스텔라에게 받은 것이 처음이었다.

‘ 기사는 오직 검과 신념으로만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

어째서일까. 아리스텔라가 말한 <멋지다>는 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순수하게 기분이 좋았다.

저도 모르게 자꾸 입가가 풀어지는 것 같아 케인은 애써 어금니를 깨물며 엄격한 표정을 유지해야 했다. 칭찬 한 마디를 들은 정도로 해이해진 모습을 보여서야 기사로서의 체면이 살지 않는다.

케인은 일부러 눈가에 힘을 주고, 성기사들을 시켜 자리를 정리하고 마차에 짐을 싣도록 했다.

“ 케인 단장님. 문제가 생겼습니다. ”

“ 뭔가, 에른스트. ”

“ 성녀님께서 타실 마차가……. ”

“ 네? 제가 탈 마차가 왜요? ”

난감해 하는 에른스트의 표정을 보고 아리스텔라가 케인의 옆에 따라붙었다.

“ 아까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

“ 문을 단단히 잠가두었을 텐데. 설마 비가 새들어간 건가? ”

“ 아닙니다. 안은 멀쩡합니다. 다만 외관이 문제입니다. ”

에른스트를 따라온 아리스텔라와 케인은 길 옆에 세워놓은 마차를 보고 깜짝 놀랐다.

마차를 장식한 종이꽃이 폭삭 젖어 볼품없이 늘어져 있었던 것이다.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164, 165화 연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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