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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드와의 짧은 재회
[163]
커다란 손이 등을 감싸고, 뜨거운 입술이 뺨과 눈가에 닿았다. 눈을 뜨자 부드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자주색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 성녀님. 정신이 드십니까? ”
“ 으응. 로이드……. ”
쏟아지는 쾌감의 홍수에 버티지 못하고 이상한 소리를 내지르며 가버렸던 기억이 난다. 그것이 절정의 순간이었는지도 가물가물하다. 머릿속이 아직도 멍하고,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 죄송합니다. 무리시키지 않으려 했는데……. ”
무리시키지 않으려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었지 않나. 그런 불만이 차올랐으나 입술을 움직일 힘조차 없었다. 아리스텔라는 로이드의 어깨에 기댄 채 나른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온천물은 여전히 따뜻하고 물 위로는 뿌연 수증기가 넘실거렸다.
“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예요……? ”
“ 얼마 안 되었습니다. 15분 정도인데…. 피곤하시면 조금 더 이러고 있겠습니다. ”
“ 아, 아니에요. ”
이자크는 아리스텔라가 온천욕을 하고 있는 줄 알 텐데, 그를 보내놓고 너무 오래 시간을 지체했다간 걱정할 것이다. 어쩌면 아리스텔라가 온천에서 의식을 잃었다고 생각해 걱정하여 찾아올지도 모른다. 마주치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로이드와 섹스한 것은 후회하지 않지만, 지금의 모습을 이자크에게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아리스텔라는 천천히 로이드의 가슴을 밀어냈다.
“ 올라갈래요. 로이드, 옷을 입혀 주세요. ”
“ 제가 성녀님의 옷을 입히면, 이자크가 제가 다녀간 것을 눈치챌 텐데요. ”
“ 눈치채다니……. 로이드. 함께 가는 것이 아니었나요? ”
“ 아직 약속한 날까지는 하루 남았으니까요. 내일 돌아가겠습니다. ”
수련의 성과를 보여준다면서 그렇게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질러놓고, 함께 돌아가지 않는 건가. 아리스텔라는 조금 아쉬워졌다.
‘ 그럼 로이드는 대체 무슨 수행을 한 거지……? ’
겨우 진정이 되자 울컥 분한 마음이 솟아올랐다. 아리스텔라는 로이드가 더욱 강해지기 위해 검술 수련을 하는 줄 알고 곁을 떠나는 것을 허락한 것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로이드가 말하는 <수련>의 목적은 검술의 단련에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 로이드. 제게 수련의 성과를 보여준다고 하셨잖아요. ”
“ 정성을 다했습니다만……. 만족스럽지 않으셨나 보군요. ”
“ 아니, 그게 아니라! 설마 그, 이상한 수련을 한 건 아니겠죠? ”
“ 이상한 수련이라니요. ”
불안한 눈으로 묻는 아리스텔라를 자상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로이드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 당신께 어울리는 남자가 되기 위한 수련입니다. ”
“ 그, 그런 거 하지 않아도……. ”
이제까지 충분히 그녀를 위해 일 해주었고, 배려해준 것이 고마운데. 로이드에게 뭔가를 바란 적도 없는데, 어째서 그는 그대로의 자신이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일까.
“ 내일은 정말로 돌아오는 거죠? ”
“ 예. ”
“ 그럼……. 이자크에게는 들키지 않는 편이 좋겠네요. 먼저 가세요. ”
“ 성녀님께서 나가시는 것을 보고 가겠습니다. ”
“ 시, 싫어요! ”
로이드가 있으면, 아무래도 이자크 앞에서 평정을 가장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로이드를 무척 존경하는 이자크라면, 아무리 온천의 수증기가 뿌옇고 바위가 많아 몸이 가려진다고 해도 어쩐지 로이드의 존재를 눈치챌 것 같다. 두 남자 사이에 끼여 난처한 처지가 되는 것은 사양이었다.
아리스텔라는 제 물건이 있는 너른 바위 쪽으로 가 타올로 몸을 감쌌다. 넓고 폭신폭신한 타올은 젖은 몸을 따스하게 감싸주었다.
“ 저는 괜찮으니까, 로이드가 먼저 돌아가세요. 당신이 가는 것을 보고 이자크를 부를게요. ”
“ 저는 사실 들켜도 상관없습니다만. ”
“ 제가 상관있어요. ”
민망하기도 하고, 이자크에게 미안하기도 하다. 그녀를 욕망하던 눈빛을 외면하고 돌려보내놓고 로이드와 몸을 섞은 사실을 알면 분명 속상해할 것이다. 성기사 이자크는 여신의 종이고 그녀가 품어야 할 존재이기도 했다. 구태여 상처 줄 일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 성녀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어쩔 수 없네요. ”
뽀얀 물이 철썩, 하더니 로이드가 일어섰다. 아름다운 근육으로 짜인 남자의 육체에 아리스텔라는 일순 시선을 빼앗겼다가, 얼른 고개를 돌렸다.
“ 모, 몸을 좀 가리는 게 어때요? ”
“ 어째서요? ”
어째서라니. 여자 앞에서 그렇게 벌거벗고 있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다는 말인가.
아리스텔라는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 곁눈질해서 로이드의 몸을 흘끔 보았다. 단단하게 잘 짜인 근육들은 갑옷을 걸치지 않아도 그가 기사임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불과 몇 분 전에 몸을 섞었는데도, 그의 나신을 본 것만으로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 제, 제 앞이잖아요. 좀 가리라고요! ”
“ 제 몸에 딱히 가려야 할 만한 결점은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
“ 로, 로이드는, 다른 사람 앞에서 알몸이 되는 게 부끄럽지도 않아요? ”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아리스텔라의 태도에 풋 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로이드는 수건으로 대충 머리를 털었다.
“ 사랑하는 당신께 보이는 것인데 부끄러울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
“ 으윽……! ”
정말이지 듣는 사람이 부끄러울 만큼 뻔뻔한 말을 자연스럽게 하는 남자다. 아리스텔라는 로이드 대신 부끄러워하며 긴 타올로 얼굴을 가렸다.
‘ 성녀님은 아직도 부끄러우신 건가. ’
몇 번이나 몸을 겹쳐도, 여전히 귀엽고 사랑스러운 성녀의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로이드는 반대쪽 바위 위에 있던 제 옷을 집어 들었다.
속옷을 입고 셔츠와 바지를 입고 벨트를 맨 뒤, 부츠까지 신었다.
아직 기사 신분을 회복하지 못했기에 갑옷은 없었다. 로브를 대충 어깨에 걸친 뒤, 아리스텔라를 향해 깍듯하게 인사했다.
“ 그럼 성녀님, 내일 뵙겠습니다. ”
“ 네……. ”
꾸벅 인사하고는, 몸을 돌려 반대편으로 걸어간다. 멀리서 바라보는 로이드의 뒷모습은 등이 곧게 펴져 있어 당당해 보였다. 어쩐지 그 뒷모습에 가슴에 따뜻하고 간질간질한 것이 차오르는 것 같아, 아리스텔라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 나도 이자크를 불러야지. ’
수건 옆에 있던 작은 피리를 불자, 삐―하는 높은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 ◆ ◇ ◆ ◇
이자크가 도착하기까지는 얼마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안 그래도 아리스텔라의 호출이 늦는 것을 걱정해서 도중까지 오던 차였다고 한다. 로이드가 조금만 늦게 떠났더라도 마주쳤을 것이다. 아리스텔라는 콩닥거리는 가슴을 조심스레 쓸어내렸다.
“ 성녀님. 목욕은 즐거우셨습니까? ”
“ 네? 네. 네에! ”
어색하게 과장된 목소리가 흘러나와 흠칫 놀랐지만, 이자크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아리스텔라의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꼭꼭 눌러 물기를 빼낸 뒤, 그녀의 몸을 닦아주고 성의를 입혀주었다.
이자크의 태도가 태연하기 때문일까, 어쩐지 나쁜 짓을 하고 거짓말을 한 기분이 들어 아리스텔라는 내심 가슴이 켕겼다.
“ 자, 성녀님. 다 끝났습니다. ”
“ 이자크. ”
“ 예? ”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허리띠를 매주던 이자크에게, 고개를 숙여 입을 맞췄다. 축복을 내리듯이 정성스럽게.
“ 아깐 혼자 돌려보내서 미안해요. ”
“ 성녀님……. ”
“ 그럼 갈까요? ”
생긋 웃으며 손을 내밀자, 이자크의 표정이 미묘하게 흐트러졌다. 무릎을 털지도 않고 그대로 일어나 아리스텔라의 손목을 잡아채더니, 자신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 앗! ”
자세가 무너지면서 균형을 잃은 아리스텔라는 엉겁결에 이자크의 허리를 안고 매달렸다. 갑자기 왜 이러는지를 파악하지 못해 어리둥절한 상태의 아리스텔라를 꼭 끌어안고, 이자크가 속삭였다.
“ 혼자 돌려보내서 미안하다면, 사과하지 마시고 지금이라도 저를 받아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
“ 네? 무리예요! ”
방금까지 로이드와 격렬하게 몸을 섞었는데 또다시 남자를 받아들일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리스텔라가 아연실색해서 소리치자 이자크가 씩 웃으며 그녀의 몸을 번쩍 안아들었다.
“ 그렇다면 이렇게 하는 수밖에요. ”
“ 네? 무슨……으응! ”
작고 보드라운 입술에 뜨겁고 탄력있는 입술이 꽉 억눌렸다. 그 사이로 파고든 혀가 입안을 헤집는 것에 또다시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을 느끼며, 아리스텔라는 이자크를 꼭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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