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59 / 0219 ----------------------------------------------
꽃비가 내리는 날
[159]
마차가 도착한 곳은 바위와 사철나무가 빽빽하게 어우러진 산속이었다. 신전 안이니 진짜 산은 아니겠지만, 이곳은 지대가 제법 높은 것 같았다. 멀리 신전의 탑 꼭대기가 보인다.
‘ 이런 곳에서 무엇을 보여주려는 걸까? ’
이자크의 손을 잡고 내려온 아리스텔라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디선가 물 내음이 났다.
“ 이쪽에 계곡이 있나요? ”
“ 계곡은 아니고, 다른 것입니다. ”
계곡이 아니면 연못일까. 설마 호수는 아닐 테지.
에른스트가 파란 비단으로 싼 무언가를 이자크에게 건넸다. 다른 성기사들도 각자 가방을 풀고 마차에서 짐을 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소풍이라도 나온 것 같다.
“ 성녀님, 이리 오시죠. ”
이자크는 아리스텔라를 나무 사이로 난 오솔길로 안내했다. 다른 이들은 따라올 생각이 없는지, 아리스텔라를 향해 정중하게 인사했다. 조슈아조차도 성기사들 사이에 서서 아리스텔라를 향해 가볍게 목례했다.
‘ 이자크와 단둘이서 가는 건가? ’
아리스텔라는 고개를 갸웃하며 이자크의 손을 잡고 오솔길을 걸었다.
사박거리는 나뭇잎 소리가 듣기 좋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사박거리는 소리가 점점 줄어든다 싶더니, 길 저편에서 뭔가 하얀 연기 같은 것이 스멀스멀 건너오기 시작했다.
“ 이자크, 어디서 불이 난 거 아닐까요? 연기가……. ”
“ 푸핫. ”
아리스텔라가 당황해서 맞잡은 손에 힘을 주자, 이자크는 웃음을 터뜨리며 아리스텔라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 괜찮습니다, 성녀님. 이건 연기가 아니라 수증기니까요. ”
수증기라. 그러고 보니 연기 특유의 매캐한 냄새는 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산중에 수증기가 날 일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밥을 짓거나 물을 끓이는 정도로 흘러나오는 양이 아니다. 따스하고 촉촉한 공기가 발목을 훑고 지나가, 아리스텔라는 야릇한 느낌에 이자크의 팔을 꼭 붙들었다.
“ 성녀님, 보세요. ”
“ 이건……. ”
오솔길의 끝에는 바위로 둘러싸인 넓은 온천이 있었다. 신전이 넓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런 곳에 야외온천이 있는 줄은 몰랐다.
뽀얀 물결이 일렁이는 위로 하얀 수증기가 넘실거렸다. 물 냄새는 포근하게 느껴졌다. 책이나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온천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온천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신기한 듯 두리번거리는 아리스텔라의 허리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이자크가 물었다.
“ 마음에 드십니까, 성녀님? ”
“ 으응, 네……. ”
“ 어쩐지 대답에 기운이 없으시군요. 별로 마음에 안 드시는 거라면……. ”
“ 그게 아니라요! ”
아리스텔라는 양손으로 뺨을 감싸며 앓는 소리를 냈다.
“ 오늘 너무 신기한 것을 많이 봐서 어떻게 될 것 같아요. ”
“ 어떻게 될 것 같으신지요? ”
손등에 쪽 하고 입을 맞추면서, 이자크가 허리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관자놀이를 더듬어 올라가 귓바퀴를 혀로 쓱 훑자, 아리스텔라가 작게 신음하며 몸을 비틀었다.
“ 이자크, 으응. ”
머뭇거리는 아리스텔라의 손을 붙잡아 내리고, 이자크가 다시 그녀에게 키스해왔다.
마차에서의 격정적인 키스와는 달리 이번에는 태도가 부드러웠다. 입술을 오물거리며 부드러운 감촉을 확인한 뒤, 혀끝만 살짝 내밀어 입술 사이를 훑었다. 작은 입이 벌어지며 아리스텔라가 혀를 내밀자 혀끝만 스치는 애무를 반복하며, 그녀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 하응, 읏……. ”
야릇한 기분과 함께 몸의 긴장이 풀어진다. 아직 온천에는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따스하고 촉촉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는 것 같았다.
“ 안 돼요, 이자크. 누가 보면……. ”
“ 아무도 안 옵니다. ”
단호하게 말하고는 그가 다시 입술을 겹쳐왔다.
이자크의 말이 거짓은 아닐 것이다. 이곳은 기사들의 구역이니 사제들이 넘어올 일도 없다. 하지만 자신의 방도 아니고 이렇게 탁 트인 야외에서 남자와 키스하다니, 어쩐지 아리스텔라는 해서는 안 될 나쁜 짓을 하는 것 같아 가슴이 콩닥거렸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달콤한 한숨이 섞이자 정신이 멍해졌다. 같은 행위를 하는데도 장소가 바뀐 것만으로 이렇게 색다른 느낌이 든다.
이러다간 정말로 여기서 몸을 섞을 것 같아서, 아리스텔라는 이자크의 가슴을 밀어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 안 돼요. 다들 밖에서 뭔가 준비하는 것 같던데, 저도 도와야……. ”
“ 성녀님께서는 온천욕을 즐기시면 됩니다. 천막을 치고 밥을 짓는 건 성기사들의 역할이니까요. ”
뭔가 짐을 내리는 것 같았는데, 그게 천막과 취사 도구였던 걸까.
“ 무슨 야영이라도 나온 것 같네요. ”
“ 달에 두 번 있는 정기 훈련이 끝나면 단체로 이곳까지 나와 피로를 풉니다. 오늘은 성녀님께 저희가 양보해드리는 거지만요. ”
어차피 이 신전의 모든 것이 성녀를 위해 존재하니 양보라는 말에는 어폐가 있었으나 이자크는 일부러 그렇게 대답했다. 이자크의 팔에 얌전히 안겨 있으면서도, 아리스텔라의 시선은 줄곧 온천을 향하고 있었다.
“ 온천에 들어가고 싶으시다면, 옷을 벗겨 드리겠습니다. ”
“ 앗……! ”
허락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허리띠가 풀리고, 옷깃 사이로 남자의 손이 들어왔다. 단단하면서도 거친 손의 감촉에 아리스텔라는 바르르 떨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 잠깐, 이자크! 모, 목욕만 하는 거죠? ”
“ 글쎄요. ”
마차 안에서도 대담한 짓을 한다 싶더니만, 아무래도 이자크는 그저 아리스텔라에게 온천을 보여줄 요량으로 따라온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과거의 그는 감히 성녀를 모욕했던 교만한 종이었고 성녀의 침실에 숨어들었던 대담한 종이었다. 제 위치를 망각하고 날뛰던 건방진 종이 굴복하던 날, 아리스텔라는 그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이자크가 자신을 원한다면 거절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 안 돼요! ”
옷자락을 벌리고 들어온 손이 엉덩이를 쓰다듬으려 하자, 아리스텔라는 그의 손등을 찰싹찰싹 때렸다.
“ 이자크. 오늘은 온천을 제게 양보한다고 하셨죠? ”
“ 예? 예. ”
“ 성기사들은 천막을 치고 밥을 짓는 역할이라고도 하셨지요? ”
“ 예, 그랬……지요. ”
금방이라도 그녀를 탐할 듯 지분거리던 손이 딱 멈추었다. 정욕으로 이글거리던 눈동자에 불안한 빛이 서렸다. 그것을 보자 또 나쁜 짓을 하는 것처럼 가슴이 콩닥거렸다.
아리스텔라는 꼼지락거리며 옷을 마저 벗고 이자크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야외에서 알몸이 된 것은 처음이다. 가슴을 팔로 가린 뒤 살짝 몸을 돌린 채, 그녀는 새침하게 대답했다.
“ 이자크는 성기사니까, 성기사의 일을 하세요. 전 목욕할 테니까. ”
“ 저기, 성녀님? ”
젖은 바위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종종걸음으로 온천에 가까이 간 아리스텔라는 발끝만 살짝 넣어 물 온도를 확인했다. 따뜻했다. 양쪽 종아리를 모두 온천물에 담그고, 가슴을 가리던 팔을 풀고 퐁당 물속으로 들어갔다.
“ 성녀님, 저는……. ”
“ 안 돼요. ”
아리스텔라가 딱 잘라 거절하자, 이자크는 손에 들린 아리스텔라의 성의만 붙잡고 멍청하니 서있었다. 그녀와 함께 마차에 오른 순간부터 이자크는 함께 온천에 들어가길 고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자크와 단둘이서 이곳에 오는 것을 다른 성기사들이 보지 않았나. 온천에서 두 사람이 몸을 섞으면 목욕을 마치고 나간 뒤 다른 사람들을 볼 면목이 없다.
“ 이곳은 성기사들의 구역이고, 성기사분들은 길 너머에서 취사 준비를 한다고 하셨으니까, 누군가 찾아올 리도 없잖아요? 목욕은 혼자서 하고 싶어요. ”
골렘이 관리하는 신전에는 들짐승도 없었다. 그러니 아리스텔라가 위험할 일은 없을 것이다. 이자크는 머뭇거리다가 푸른 비단으로 싸고 있던 것을 풀어, 아리스텔라에게 타올과 작은 피리를 건넸다.
“ 목욕이 끝나시면 이 피리를 부십시오. 바로 돌아와서 몸을 닦고 옷을 입혀드리겠습니다. ”
작은 피리를 불자 삐― 하는 높은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이렇게 작은데도 소리가 큰 것을 보니 원래 먼 거리에서 신호하는 용도였나 보다. 아리스텔라는 피리를 받아들고 고개를 끄덕였다.
“ 물속에 너무 오래 계시면 현기증이 날 수 있으니 주의하십시오. ”
“ 네, 알았어요. ”
이자크의 눈빛에 미련이 뚝뚝 묻어났다.
아리스텔라를 온천에 홀로 두고 가는 것이 걱정되어서라기보다, 그녀와 단둘이 달콤한 시간을 보낼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절망감이 더 큰 듯했다. 그 눈빛에 가슴이 뜨끔했지만, 아리스텔라는 이자크의 검은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주고, 그의 뺨에 입을 맞췄다.
“ 끝나면 부를게요. ”
“ 예. ”
이자크도 아리스텔라의 뺨에 입을 맞추고, 몸을 일으켰다. 성녀의 성의를 곱게 개어 비단으로 싸 물에 젖지 않도록 높은 바위 위에 올려놓고는, 그녀를 향해 꾸벅 인사했다.
두 사람이 걸어왔던 오솔길을 홀로 걸어가는 이자크의 뒷모습을 보며 아리스텔라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온천은 상당히 넓었다. 서른 명의 성기사들이 목욕을 하는 공간이니 당연할 것이다. 따스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뽀얀 물을 둘러싼 무채색의 바위, 검게 보일 정도로 푸른 사철나무 위로 보이는 새파란 하늘이 아름다웠다.
아리스텔라는 바위에 등을 기대며 느긋하게 기지개를 켰다. 이 신전에 들어온 이후로 혼자서 목욕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 아, 상쾌하다! ”
이제는 누군가 시중드는 것에 익숙해지긴 했어도, 역시 혼자만의 시간은 좋았다. 아리스텔라는 참방참방 물장구를 쳐보기도 하고, 바위와 바위 사이로 헤엄치기도 하면서 휴식시간을 만끽했다.
― 첨벙
갑자기 큰 물소리가 들렸다. 나무열매나 작은 돌이 떨어지는 소리라기엔 너무 컸다. 그래도 설마 별 일이야 있으랴, 하고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린 아리스텔라는 뽀얀 김 너머로 보이는 커다란 인영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을 질렀다.
“ 꺄아아! ”
아리스텔라는 첨벙거리며 커다란 바위 뒤로 달려가 숨었다.
이곳은 성기사들의 구역이라고 했는데, 설마 여기까지 찾아오는 사제가 있었나? 아니면 침입자일까.
너무 놀라고 무서워서 이자크가 건네준 피리를 집는데도 손이 덜덜 떨렸다. 간신히 그것을 입에 물고 불려고 하는데, 뒤에서 익숙한 저음이 들려왔다.
“ 성녀님……이십니까? ”
“ ! ”
아리스텔라는 입에 피리를 문 채로 굳어버렸다.
똑.
똑.
물방울이 흘러 떨어지는 소리와 두근거리는 심장소리가 유달리 크게 들렸다.
“ 성녀님. ”
또다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를 부르는 낮고 부드러운 음성에 정신이 든 아리스텔라가 바위 너머로 고개를 빼꼼 내밀자, 뽀얗게 서린 김이 걷히고 커다란 인영이 드러났다.
아무렇게나 흐트러뜨린 짧은 은발. 촉촉한 물기를 머금고 있는 매끄러운 흰 피부. 자신을 바라보는 자주색의 눈동자에는 놀라움과 반가움이 깃들어 있었다.
“ 로, 로이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