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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된 성녀와 비밀의 밤-157화 (157/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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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비가 내리는 날

[157] 꽃비가 내리는 날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조슈아와 함께 간단히 아침을 먹고 아리스텔라는 기사단으로 향했다. 어젯밤 케인이 말한, 자신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 조슈아. 성기사들이 뭘 준비했을까요? ”

“ 글쎄요. 성녀님께서는 짐작 가는 바가 없으십니까? ”

“ 훈련은 종종 보고 있으니까, 으음. 새로운 검이나 갑옷을 자랑하려는 걸까요? ”

“ 성녀님의 검이나 갑옷을 만들어 선물하려는지도 모르겠군요. ”

“ 네? 그럴 리가요. 전 검 같은 건 다룰 줄 모르는걸요. ”

몸이 약한 것은 아니지만, 선천적으로 몸이 가느다랗고 근육이 적은 아리스텔라는 팔 힘도 약했다. 기사들처럼 무거운 검을 들고 휘두르는 것은 불가능했다. 갑옷이라도 입으면 무거워서 걸을 수 없을 것이다.

“ 무거운 검을 차고 갑옷을 입은 채로 훈련을 하고 순찰을 하고……. 생각해보니 성기사도 굉장히 고된 직업이네요. 평소에는 갑옷까지 갖춰 입지 않아도 될 텐데. ”

“ 무장 해제를 명령하셔도 되지만, 기사들은 원하지 않을 겁니다. ”

사제들이 로이드의 일로 성기사들에게 무장 해제를 명령했을 때, 그들은 갑주를 벗는 것을 무척 굴욕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에게 몸을 보호하는 갑옷과 적을 무찌르는 성검의 무게란 긍지의 무게일 것이다. 그것을 무거우니 불편하다고 여기는 성기사는 신전 안에 없으리라고, 조슈아는 생각했다.

“ 그렇다면 사제분들이 입는 성의처럼, 성기사분들의 갑주도 신성력으로……. ”

“ 성녀님. ”

“ 아, 케인! ”

기사단 앞까지 마중 나온 케인을 보고, 아리스텔라가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 초대해줘서 고마워요, 케인. 기사분들은 휴게실에 계시나요? ”

“ 아닙니다. ”

“ 그럼 연무장에? ”

“ 안내하겠습니다. 따라오시죠. ”

케인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길을 빙 돌아 후원 쪽으로 향했다. 아리스텔라와 조슈아는 고개를 갸웃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가, 케인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오늘은 날씨가 좋다. 새파란 가을의 하늘에 떠가는 새털구름을 보니 기분이 날아갈 듯 상쾌했다.

새하얀 신전의 건물을 지나자 상록수로 가득한 후원이 나왔다.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 초록빛의 나무들을 구경하며 걷는 두 사람을, 케인은 나무 사이로 난 좁은 길로 안내했다.

‘ 어디까지 가는 거지? ’

길이 좁아서 아리스텔라와 조슈아는 나란히 걸을 수가 없었다. 조슈아는 아리스텔라를 먼저 보내고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빽빽한 나무 사이로 시원한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가 들렸다. 사박사박. 녹음으로 우거졌던 길이 어느새 울긋불긋한 단풍나무로 가득 찼다. 발에 밟히는 낙엽의 소리가 듣기 좋았다.

“ 이쪽입니다, 성녀님. ”

낙엽을 밟으며 가을의 운치를 느끼던 아리스텔라가 케인의 손을 잡고 좁은 길을 빠져나가자, 광장 같은 것이 나왔다.

“ 와아……. ”

그곳에는 색색의 꽃들로 꾸며진 꽃마차가 있었다.

“ 세상에……. 너무 예뻐요. ”

신전에 올 때도 백마가 이끄는 하얀 마차를 타고 오긴 했지만, 이렇게 색색의 꽃들로 꾸미니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요정의 마차 같아 신비하게 느껴졌다. 마차는 물론, 말의 안장에도 꽃이 가득했다.

“ 이걸 성기사분들이 준비하신 건가요? ”

아리스텔라가 감탄하며 바라보자, 성기사들은 머쓱한지 뒷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 성녀님께서 저희에게 축복을 내려드렸는데, 뒤늦게나마 보답하고 싶었습니다. ”

“ 보답이라뇨. 이미 충분히 많은 것을 받았는데도……. ”

아리스텔라는 뺨을 붉히며 마차에 가까이 다가갔다. 멀리서 보아도 색색으로 피어있어 화사했지만, 가까이 다가가니 좀 더 형태가 분명히 보인다.

“ 어머. ”

마차에 가까이 다가가 꽃을 살핀 아리스텔라는 깜짝 놀랐다. 그것은 생화가 아니었다.

“ 이건 종이꽃이네요? ”

“ 성녀님께서 꽃을 꺾는 것은 좋아하지 않으신다고, 케인 단장님이 말씀하시기에……. ”

케인과 정원을 산책할 때, 아리스텔라는 정원 구석에 피어있는 붉은 꽃을 보고 좋아했다. 하지만 꽃을 꺾어 방에 장식하겠다는 케인의 제안은 거절했다.

꽃은 꽃대로 피어있을 때 아름답다. 성녀이기 때문이라서가 아니라, 아리스텔라는 원래 살아있는 것을 인간의 편의로 해쳐 곁에 두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위해 기사단에서 준비한 꽃마차는 종이로 만든 조화로 가득했다. 생화를 꺾어와 꾸미는 것도 힘들었을 테지만, 조화를 만드는 데는 더 많은 수고가 들었을 것이다.

“ 만드는 게 굉장히 힘들었을 텐데……. 이걸 하루 만에 다 준비한 거예요? ”

“ 이자크가 은근히 손이 야무지더라고요. 이 꽃마차를 꾸미는데 든 조화의 거의 절반을 이 녀석 혼자 접었습니다. ”

에른스트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이자크의 주위에 있는 몇몇이 그의 등을 팡팡 두드리며 낄낄거렸다.

‘ 이자크, 기사단 사람들과는 사이가 좋구나. ’

성기사들에게 축복을 내려줄 때 그에게만 축복을 주지 않은 일로 혹 따돌림을 당하거나 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기우였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케인은 이자크가 아리스텔라를 모욕했을 때 바로 달려와 자신이 대신 죽을 테니 제발 이자크를 살려달라고 빌기도 했다.

어쩌면 기사단 내에서는 이자크도 제법 인망이 있는 성기사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단순히, 막내라서 귀여움을 받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만.

“ 고마워요, 이자크. ”

“ 아, 아닙니다. 그냥, 제가, 손이 빨라서……. ”

“ 다들 정말 고마워요. 이렇게 예쁜 선물을 받게 될 줄은 몰랐어요. ”

기쁨과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뺨을 발그레하게 물들인 채, 아리스텔라는 연신 감탄사를 연발했다.

마음 같아서는 모두를 안아주고 싶었지만, 자그마한 아리스텔라가 한품에 안기에 기사들은 다들 체격이 컸다. 아리스텔라는 감사의 마음을 담아 모두의 손을 한 번씩 꼭 잡아주었다.

“ 성녀님. 마차에 오르시죠. ”

“ 고마워요, 에른스트. ”

마차의 문을 열자, 그 안도 색색의 조화로 가득했다. 정말로 꽃의 나라에 놀러온 공주님이 된 기분이라 아리스텔라는 의자에 앉아 들뜬 마음으로 이곳저곳을 정신없이 살폈다.

“ 성녀님. ”

이자크의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보니, 그가 옆에 앉아 있었다. 창문 밖으로 조슈아가 손을 흔들고 있다. 웃고는 있지만 살짝 난처한 표정인 것을 보아, 아무래도 조슈아 대신 이자크가 마차에 탑승한 모양이다.

“ 이자크, 조슈아는? ”

“ 저희가 출발한 뒤에 말을 타고 따라가겠다고 하셨습니다. ”

“ 조슈아. 말은 탈 수 있을까……. ”

“ 에른스트가 보좌할 테니 괜찮을 겁니다. ”

이자크는 그렇게 말하며 마차의 문을 닫았다.

아무래도 조슈아 쪽에서 먼저 제안한 것이 아니라, 성기사들의 요구에 조슈아가 응했을 뿐인 것 같았다. 하지만 아리스텔라를 위해 선물을 준비한 것은 성기사들이었고, 조슈아도 억지로 응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아리스텔라는 안심하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 출발하겠습니다. ”

앞에서 케인의 구호가 들리고, 말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마차가 덜컹, 하는 소리를 내더니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 어디로 가는 건가요? ”

“ 창밖을 보세요, 성녀님. ”

마차의 움직임에 맞춰 창문에 매달린 조화가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흔들린다. 멀리 보이는 단풍은 마치 붉은 꽃과 노란 꽃이 핀 것 같았다.

“ 정말 너무 예뻐요. 이런 꽃마차에 타본 적은 처음이에요. ”

“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

신전의 정원은 골렘이 관리하기에 좀처럼 꽃을 보는 것이 힘들었다. 간혹 몇 군데 꽃이 피어있기는 했지만 그뿐, 누군가 꽃을 가꾸라 명령하지 않는 한 꽃밭을 구경하기란 어려웠다.

남쪽 탑에 있는 꽃의 방에는 꽃이 가득했지만, 그것은 미사 때 제단에 바치기 위한 것들이었다. 게다가 신성마법 수업을 받던 아리스텔라가 온실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려 난처했던 관리인 마르코는 꽃을 구하고 싶다는 성기사들의 요청을 거절했다. 결국 그들은 종이를 접고 실로 꿰어 직접 꽃을 만드는 수밖에 없었다.

조화로 마차를 꾸민 배경에는 이런 뒷사정도 있었으나 다들 침묵했기에 아리스텔라는 알지 못했다.

“ 조화를 제일 많이 만든 것이 이자크라면서요? 당신에게 이런 특기가 있는 줄은 몰랐어요. ”

“ 어렸을 때, 어머니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만드는 요령을 알면 별로 어렵지 않아서……. ”

그렇게 말하면서, 이자크는 손을 넌지시 뒤로 감췄다. 아리스텔라는 이자크가 가장 많이 조화를 접은 공을 인정받아 그녀와 함께 마차에 탑승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 반대였다.

성녀를 기쁘게 하기 위한 선물로 조화로 꽃마차를 꾸미기로 결정한 성기사들은 < 누가 성녀와 함께 마차에 오를 것인가 >로 신경전을 벌였다.

로이드가 부재중인 지금, 검술로 승자를 결정한다면 당연히 케인이 될 터였다. 성녀의 곁에 다가갈 기회가 없다며 투덜거리던 성기사들은 꾀를 냈다.

성녀를 위한 선물인 만큼, 검술 대신 마차를 꾸밀 조화를 가장 많이 접은 자에게 동승할 권한을 주자는 것이었다.

옆자리의 영광은 이자크에게 돌아왔다.

종이로 꽃을 만들고 실로 꿰어 꽃다발을 만드는 작업은 오랫동안 검을 잡아온 성기사들에게는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어릴 적 어머니를 도와 종이꽃을 팔아 생계를 꾸렸던 이자크는 종이꽃을 만드는 작업이 익숙했다.

물론 이 많은 꽃을 접는 데는 그만큼의 희생이 따랐지만.

‘ 어휴, 아직도 손이 쓰리네. ’

종이에 베이고 바늘에 찔린 상처로 가득한 손을 뒤로 감추며, 이자크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희생은 있었으나 그 영광은 값졌다.

겨우 둘만의 시간을 갖게 된 이자크는 창밖의 풍경을 신기한 듯 바라보는 아리스텔라의 모습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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