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금된 성녀와 비밀의 밤-156화 (156/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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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증명하는 것

[156]

“ 케인……? ”

밤이 깊었는데, 설마 이 시간까지도 순찰을 하고 있었던 걸까. 아리스텔라는 경계를 늦추고 케인의 모습을 살폈다. 성검은 차고 있지만, 평소와는 달리 갑주를 걸치지 않은 차림이었다. 순찰 중이었던 것은 아닌 듯했다.

“ 제가 여기에 있는 줄, 어떻게 아셨어요? ”

“ 잠이 오지 않아 밤 산책을 하는데……. 아론 신관과 함께 북쪽 탑으로 들어가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

설마 내내 밖에서 기다렸던 걸까. 아리스텔라는 민망해져서 얼굴을 붉혔다.

“ 그……. 끝나기를, 기다렸던 건가요? ”

“ 아닙니다. 잠이 오지 않아서……. ”

거기까지 말하고 케인은 입을 다물었다.

아리스텔라는 아론이 보낸 사제와 밤을 보내겠노라 모두의 앞에서 약속했다. 성녀가 결정한 일에 기사단장인 케인이 반대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편안히 잠들 수도 없었다.

아론과 함께 북쪽 탑으로 걸어가는 아리스텔라의 모습을 발견한 순간 가슴이 아파왔다. 두 사람이 계단을 오르면서 밝혀지는 마력석 전등의 불빛은 밖에서도 보였다. 꼭대기 층에서 불빛이 사라진 것을 보고 케인은 못 박힌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얼마나 서 있었을까. 얼굴과 손이 차가워졌다는 것도 케인은 자각하지 못했다. 하염없이 북쪽 탑의 정문을 바라보던 케인의 눈에 홀로 나오는 아론의 모습이 보였다. 아리스텔라를 두고 나온 것인가. 설마 안좋은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된 케인은 아론이 사라지자마자 얼른 계단으로 올라갔다.

“ 몸은 괜찮으십니까? ”

“ 네, 괜찮아요. ”

고개를 끄덕이자 안도한 듯 한숨이 흘렀다. 자신을 향해 내민 손을 아리스텔라는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붙잡았다. 그녀를 품안으로 끌어당긴 케인은 아리스텔라를 한 팔로 안아들었다.

“ 케인? ”

“ 방까지 모시겠습니다. ”

짧게 대답하고는 저벅저벅 계단을 내려간다. 아리스텔라는 케인의 어깨에 한쪽 팔을 걸치고 몸을 기댄 채로 난처한 듯이 중얼거렸다.

“ 케인이 무척 화가 나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

“ 지금도 화가 나있습니다. ”

케인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늘 정중한 태도의 그는 눈빛이 무섭고 목소리가 커 아리스텔라를 움찔움찔 놀라게 하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약자에게 상냥한 성품이었다. 아리스텔라가 쉬이 놀라는 것을 알고 평소에는 시선도 아래로 내리깔고, 목소리도 낮추었으며, 발걸음 소리마저 크게 내지 않도록 조심했다.

전장에서 이름을 날린 용맹한 기사가 자신을 겁주지 않으려 배려하는 것을 아리스텔라가 모를 리 없었다.

아리스텔라는 케인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갑주를 걸치지 않은 차림인데도 케인의 넓은 어깨는 여전히 갑옷처럼 단단했다.

“ 그럼……. 이제부터 화를 내실 건가요? ”

머뭇거리며 질문하자 케인이 고개를 돌려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케인의 푸른 눈은 마치 깊은 바다나 호수와 같다고 늘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의 그의 눈동자에는 어두운 밤하늘의 달이 비치고 있었다.

물에 비친 달. 아리스텔라는 케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 성녀님께 화가 난 것이 아닙니다. ”

“ ……? ”

“ 저 자신이 너무도 무력하여, 화가 납니다. ”

케인은 자신의 주인에게 충성하고, 주인의 명령을 완벽히 수행하며, 주인의 이름을 높이는 일을 제 삶의 원칙으로 삼았다. 그것은 황궁기사단에서 신전의 성기사단으로 옮겨온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성녀를 지키고 이 폐쇄된 신전에서, 그녀가 천수를 다할 때까지 몸과 마음을 지키는 것. 그것을 자신의 사명이라고 믿어왔다.

그런데 대체 자신은 그녀를 위해 무엇을 했나.

처음 시종을 맡은 날부터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그녀를 범했다. 죄를 이실직고하고 처벌을 요구해도 모자랄 판에 거짓으로 제 잘못을 감추었다.

성기사는 기도실에 들어갈 수 없다는 이유로 그녀를 홀로 보냈고, 성기사들이 폭동을 일으키려 한다는 이야기에 화들짝 놀라 자리를 비웠다. 그 사이에 성녀가 로이드에게 강제로 범해지고, 사제들에게 발각되었다.

사제들이 멋대로 로이드를 처형시키는 것이 부당하다며 성기사들을 설득하러 온 그녀는 이번에 이자크에게 범해졌다. 로이드의 뒤를 이어 기사단장이 되었음에도 케인은 제 밑의 성기사들을 제대로 통솔하지 못했다.

로이드를 처형에서 구해준 것도, 성녀에 대한 불신만 가득하던 이자크를 일깨워준 것도, 성기사들에게 축복을 내려 미사를 볼 수 있도록 한 것도, 사제들 앞에서 진실을 밝혀 성녀의 신성성을 증명한 것까지, 전부 그녀의 힘으로 이루어낸 일이었다.

성녀의 곁에서 그녀를 지키며, 그녀의 힘이 되어야 할 자신이 너무나도 무력했다. 케인은 자신이 더 현명하고 더 강하며 더 그녀의 마음을 빨리 눈치챘다면, 오늘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확신했다.

“ 성녀님의 의지가 되어드리지 못하고, 성녀님의 힘이 되어드리지 못한 제가 무슨 염치로 이곳에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

“ 케인. 그런 생각은 하지 마세요. ”

힘들게 한숨을 뱉으며 고개를 숙이는 케인의 뺨을 감싸며, 아리스텔라가 속삭였다.

“ 당신은 제게 용기를 주었는걸요. ”

“ 성녀님……. ”

“ 저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없었더라면, 제가 지켜야 할 사람이 없었더라면……. 저도 일찌감치 포기하고 전대 성녀님들처럼 욕망에 미쳐버렸을 거예요. ”

지킬 것이 있기 때문에 강해진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성녀가 되겠다 말했지만, 처음 신전에 왔을 때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당황과 혼란의 연속이었다. 남자가 옷을 벗기고 제 몸을 문질러 씻겨주는 것이 너무 무섭고 수치스러워서 울고 싶었다. 만지지도 않았는데 멋대로 흥분해서 다리 사이가 욱신거리며 젖어드는 일은 너무도 끔찍했다.

아리스텔라는 이제까지 다른 성녀들이 반쯤 미쳐서 사제들과 난교를 벌인 것이 단지 그녀들의 몸이 욕망에 약하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녀들에겐 이 신전에 지킬 것이 없었다. 성녀로서 자신의 종들을 지배하고 통솔하며 품어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첫 관계를 조슈아와 한 것이 다행이었다. 케인이 욕실에서 자신을 안은 것을 비밀로 해서 다행이었다. 로이드와의 관계에서 정신을 잃지 않아 다행이었다. 이자크에게 범해지고 알몸으로 신전을 돌아다니던 밤, 히페리온을 만나 위로를 받아 정말 다행이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아리스텔라는 정말 미쳐버렸을 것이다.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알몸으로 돌아다니며 아무 남자에게나 다리를 벌렸을지도 모른다.

처음 사제들 앞에 섰을 때는 겁이 나고 떨려서 심장이 쿵쿵 뛰고 눈물이 났다. 다리가 후들거려서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리며 주저앉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자신을 다잡아준 사람들이 있었다. 힘이 되고 용기를 주는 이들이 있었다. 그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고 싶었다. 그래서 아리스텔라는 두려움을 참고 일어나 맞섰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실천했다.

“ 그때 케인은 제게 보호받았다고 말했지만……. 당신이 저를 믿어주었으니까, 힘을 낼 수 있었던 거라고 생각해요. ”

아리스텔라는 케인의 목 뒤로 팔을 둘러 살며시 끌어안았다. 두근. 두근. 뜨겁게 맥동하는 심장의 고동이 느껴졌다. 목울대가 울컥하며 케인이 뭔가를 삼키는 것 같았다. 그는 떨리는 한숨을 내뱉으며 아리스텔라를 고쳐 안더니, 그녀의 등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 성녀님. 내일 시간을 내 주시겠습니까? ”

“ 내일이요? 딱히 예정은 없지만……. ”

“ 성녀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저희 기사단에서 준비한 것이 있습니다.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

“ 정말요? 뭔데요? ”

성기사들이 자신을 위해 준비한 선물이라니, 기대감과 기쁨으로 우울했던 기분도 피로도 싹 날아가는 것 같았다.

“ 내일 직접 보여드리겠습니다. ”

“ 후후. 케인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정말 기대돼요. ”

아리스텔라는 작게 웃으면서 케인의 뺨에 입을 맞췄다. 면도를 하지 못했는지 턱밑은 수염자국으로 꺼끌꺼끌했다. 손끝으로 그의 턱을 살살 쓰다듬자, 케인이 곤란한 듯이 시선을 돌렸다.

“ 성녀님. 면도를 하지 못했습니다. ”

“ 기사단장이 되면서 바빠졌잖아요. 알고 있어요. ”

“ 단정치 못한 모습을 보여 죄송합니다. 그러니……. ”

“ 케인의 얼굴이라면 수염이 있어도 어울릴 것 같은데. ”

“ 그렇……습니까? ”

케인은 이목구비가 뚜렷하면서도 눈이 깊고 입매가 다부졌다. 굵으면서도 결이 좋은 금발의 소유자니 턱수염을 질러도 매력 있지 않을까.

이 신전의 사제와 성기사들은 전부 젊은 청년들뿐이라, 서른이 넘은 케인은 그 중에서도 나이가 많은 편이었다. 수염을 기르면 위엄이 있을지도 모른다.

“ 수염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잖아요? ”

“ 그건 그렇습니다만……. ”

청소년 때부터 이미 성인만큼 훌쩍 자란데다 고생을 한 탓에 젊을 적에도 원래 나이보다 두, 세 살은 많게 보였지만 이제까지 케인은 자신의 나이를 신경 쓴 적이 없었다. 그런데 수염을 길러도 어울릴 것 같다는 아리스텔라의 말이 어쩐지 칭찬으로 들리지 않았다.

‘ 내가 나이가 많으니, 나이에 맞게 하고 다니라는 뜻인가……? ’

이자크는 갓 스무 살이 된 청년이고, 로이드도 아직 20대였다. 그런 남자들 사이에 있으니 확실히 케인이 나이 들어 보일지도 모른다.

기사로서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할 나이인데,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는 어쩐지 한걸음 다가가는 것조차 망설여야 하는 처지가 되어 케인은 우울해졌다.

“ 케인……? ”

칭찬을 했는데 왜 우울해하는지 모르는 아리스텔라는 케인의 착잡한 얼굴을 바라보며 머릿속에 의문을 띄웠다.

‘ 케인은 수염을 기르는 것이 싫은 걸까? ’

전쟁터에서는 어쩔 수 없이 수염이 자라게 둘 수밖에 없겠지만, 케인도 은근히 섬세하고 깔끔한 성품이었으니 수염이 자라면 단정하지 않다고 싫어할지도 모른다.

“ 저기, 케인. 명령이 아니니까, 당신이 좋을 대로 하고 있으면 돼요. ”

“ 하지만 성녀님께서 제가 수염을 기르기를 바라신다면……. ”

“ 바라는 게 아니라, 그……. 저는 지금 케인의 모습도 좋아하니까요. ”

수염이 있으면 야성적이면서도 부드러운 인상일 것 같지만, 지금의 단정한 모습도 좋았다. 애초에 남자를 어려워하는 아리스텔라에게는 이성의 외모에 대해 이렇다 할 취향이 없었다. 처음 케인을 마주했을 때는 그 무시무시한 눈빛 때문에 오금이 저렸지만.

“ 저는 케인을 좋아하니까, 당신도 당신 자신을 좋아했으면 해요. ”

그렇게 말하면서, 아리스텔라는 케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녀를 안고 있던 팔에 조금 힘이 들어가더니, 귓가에 낮고 깊은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 성녀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있겠습니다. ”

그것은 수염 이야기일까, 케인 자신을 사랑하겠다는 이야기일까. 물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어쩐지 피로가 몰려와, 아리스텔라는 케인의 품에 안긴 채 눈을 감고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을 안고 있는 단단한 팔은 따스했다.

그 기분 좋은 체온과 심장의 고동에 몸을 맡겨, 아리스텔라는 케인의 품안에서 잠이 들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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