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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증명하는 것
[155] 마음을 증명하는 것
“ 수도원의 지도 사제에게 제가 신전 안에서 겪었던 일을 이야기해도, 어린아이의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
애초에 아론 자신이 어떻게 신전에 있었는지를 증명할 수단도 없었다. 여신의 현신인 성녀를 음해하는 헛소문을 퍼뜨려서는 안 된다며 혼쭐이 났다. 반성실에 갇혀 성서를 외워야 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소문이 빨랐다. 성녀와 사제들이 매일 밤 음란한 관계를 가진다는 이야기는 수습사제들 사이에서 화젯거리가 되었다.
하지만 당대의 성녀를 모욕하는 일은 곧 신에 대한 모욕이라 여긴 지도 사제들은 소문을 말하고 다니는 수습사제들을 엄히 단속했고, 어차피 진심으로 믿는 자들은 거의 없었기에 소문은 곧 사라져버렸다.
명확한 증거가 없으면, 진실조차도 헛소문에 지나지 않는다. 아론은 그렇게 속세의 이치를 배웠다.
“ 그래서 저는 다시 이 신전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번에야말로 이 지긋지긋한 타락의 연쇄를 끓기 위해서. ”
“ 이 신전의 결계를 지우고, 밖으로 나가……. 제가 타락했다는 것을 교황청에 알리려는 건가요? ”
아리스텔라는 자신이 타락하지 않았다고 확신했지만, 이 일이 신전 밖으로 새어나간다면 분명 그녀는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녀와 관계를 가진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겠지.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는 것은 아리스텔라에게 어려웠다. 자기변명으로 가득 찬 전대 신관들의 기록이 날조임을 증명하는 일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자신이 심판대에 오르는 일을 생각하니 소름이 끼쳤다.
“ 타락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으면서, 심판을 받는 것이 두려우신 겁니까? ”
“ 아론도 증거가 없기 때문에 진실을 말해도 헛소문으로 끝났다고 말했잖아요. 언제나 진실이 사실로서 인정받는 것은 아니에요. ”
도서관에 가득한 수많은 신전의 기록이 날조임을 공표한다면, 자신들의 진실조차도 의심을 받을 것이다. 증거가 없으면 진실조차도 거짓이 되어버리는 세상이다. 아리스텔라는 증거를 마련할 생각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 기록된 모든 것이 거짓이라면, 이야기의 마지막까지 거짓으로 끝나도 좋겠지요. ”
“ 네……? ”
“ 죽으면 증언이 필요 없어지니까요. ”
아론의 손이 아리스텔라의 목을 감쌌다. 가느다란 그녀의 목은 남자가 힘주어 비트는 것만으로 쉽게 부러져 버릴 것 같았다.
“ 아, 아론? ”
“ 성의는 성녀님을 보호하는 옷이지만, 남자의 손으로 쉽게 벗겨버릴 수 있습니다. 몸을 가릴 것도 보호할 것도 없는 알몸의 성녀님을 해치는 일은 검을 든 성기사가 아니라도 가능한 일이지요. ”
아론은 무덤덤한 얼굴로 오싹한 소리를 했다. 그러나 아리스텔라는 겁을 먹지 않았다.
사제는 생명을 해칠 수 없는 몸이다. 로이드를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피를 볼 수 없다는 이유로 황성에 연락해서 집행관을 불러오지 않았나.
여신의 현신인 성녀를 해하려는 자가 이 신전 안에 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교황청에서 신심은커녕 그 정도의 상식도 없는 자를 선별하여 이 폐쇄된 신전으로 보냈을 리도 없다.
“ 사제는 사람을 해칠 수 없다고 들었어요. ”
“ 만약 제가 타락한다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
타락한 성녀라 할지라도 사제는 성녀를 해치지 못한다. 하지만 타락한 것이 사제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아리스텔라는 관계를 마친 후 아론이 한탄하듯 토해내던 말을 기억해냈다.
‘ 사실 아론이 확인하고 싶었던 건, 내가 타락했는지가 아니라……. ’
성녀와 성관계를 가지더라도 자신이 타락하는지 아닌지를 알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자 아리스텔라는 아론이 말한 <다른 사람은 믿을 수 없다>는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이 아리스텔라와 섹스하여 타락하든, 혹은 타락하지 않든, 그것은 아론에게 어떠한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
아론은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전대 성녀를 모시던 이들이 모두 타락해버린 것이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는지 아닌지를.
“ 제가 이 손에 힘을 주면, 성녀님의 목뼈는 부러질 겁니다. ”
“ 아론. 당신은 저를 죽이지 못할 거예요. 타락하지 않았으니까. ”
아리스텔라는 제 목을 감싼 커다란 손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남자의 손은 이토록 크고 단단하다. 여자와 남자의 몸은 어째서 이토록 다르게 생겼을까.
아론이 아리스텔라에게 순결을 증명하라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아리스텔라도 아론의 품에 안기면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파악하려 애썼다. 그는 관계하는 내내 아리스텔라를 시험하는 행동을 했지만, 그녀를 강제로 억누르거나 제멋대로 굴지는 않았다.
“ 아론과 섹스하면서, 저는 무척 기분이 좋았거든요. ”
“ 마음에도 없는 남자와 정을 통하는 행위가 말입니까? ”
“ 없지는……. 않은 것 같은데요? ”
아리스텔라의 대답에 아론의 표정이 미묘하게 흐트러졌다. 그녀는 미혹으로 일렁이는 황금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 이 신전에 온 뒤로, 아론의 꿈을 두 번 꾸었어요. ”
“ 제 꿈을요? ”
“ 꿈속에서 당신에게 안길 때도, 무척 기분 좋았어요. ”
아론의 신성력이 그녀와 닮았기 때문일까, 섹스의 스킬과는 별개로 그와 몸을 섞는 일은 너무도 기분이 좋았다. 어쩌면 이것이 어른들이 말하던 속궁합이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론과 몸을 섞은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 마음이 없는 관계라고 해서 비참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오늘 밤의 섹스로 꿈속의 아론과 현실의 아론이 겹쳐져, 그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된 것 같았다.
“ 우리는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거예요. ”
아론이 헉 하고 숨을 삼키며 손을 치웠다.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고, 아리스텔라의 위에서 벗어났다. 그는 난처한 얼굴로 손목을 쓰다듬었다.
아리스텔라는 천천히 일어나 아론을 바라보았다. 그가 시선을 피하며 허리를 조금 더 뒤로 뺐다.
“ 성녀님께서는, 부끄러움을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
남자와 눈만 마주쳐도 수줍어서 쩔쩔매던 아리스텔라에게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아마도 아론밖에 없을 것이다.
“ 자신의 감정을 거짓으로 포장하고 감추려 드는 것이야말로,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
“ 성녀와 사제의 관계는 주인과 종. 그 정도가 적당합니다. 사적으로 가까워져서 좋은 일이 있을 리 없습니다. ”
“ 저와 이런 관계를 가진 건 아론이잖아요. ”
“ 몸 만이라면, 괜찮습니다. 아직 버틸 수 있습니다. ”
아론은 성감이 둔하고, 욕구를 참는 것에 능숙한 것 같았다. 흥분했음에도 사정을 하지 못하면 괴로울 텐데, 빈틈없이 갖춰 입은 성의 너머로 비치는 실루엣은 평소와 똑같이 단정했다.
“ 사제가 성녀를 사랑하면, 모든 것이 어그러집니다. ”
전대 성녀의 시종이 성녀를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아론을 몰래 내보낼 일도 없었을 것이고 지하에 갇혀 괴물이 되어버릴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저 다른 대의 성녀와 마찬가지로, 신전의 비밀은 영원히 봉인된 채 흐르는 시간 속에 모두가 잠들어버렸을 것이다.
전대 성녀의 이야기는 가해자들이 자신들의 죄를 숨기고 성녀 혼자 희생하는 형태로 끝났어야 한다고, 아론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아론은 고개를 털고 일어났다. 의자에 걸쳐 있던 성녀의 성의를 들고 와 그녀의 몸에 걸쳐 주었다.
“ 아론에게 사랑은 뭔가를 위협하고, 부수는 감정인가요? ”
아론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는 행동으로 그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 남자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불신이나 혐오 때문이 아니었다.
아론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을 무서워하고 있다.
그리고 그 <누군가>에는, 자기 자신도 포함된다.
“ 아론. 저는 당신에 대해서 더 알고 싶어요. ”
“ 제 신상정보는 명부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
“ 당신이 이 신전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기록에 없잖아요? ”
옷자락을 여며주는 손을 붙잡고, 아리스텔라는 고개를 기울여 아론과 이마를 맞댔다. 입술이 닿은 것도 아닌데, 아론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 몸단장도 마쳤으니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성녀님께서 이곳에서 쉬시겠다면 내일 아침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
“ 아론? 같이……. ”
“ 그럼 편히 쉬시길. ”
아론은 아리스텔라의 대답도 듣지 않고, 도망치듯이 방을 빠져나갔다.
아리스텔라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연이은 절정으로 몸이 나른했다. 현란한 장식이 늘어져 있는 침실은 조명등의 불빛을 반사해 오색으로 반짝이는 빛이 가득했다. 이곳은 전대 성녀가 고통 속에 몸부림치던, 말하자면 고문실이나 마찬가지인 곳이었다. 아무리 피곤하다지만 이런 방에서 잠들고 싶진 않았다.
‘ 나도 그만 돌아가야지. ’
무거운 문을 여는 것은 힘들지 않았다. 신성력에 감응하는 문은 그녀가 문고리에 손을 댄 것만으로 스르륵 열려버렸다. 주홍색의 조명등이 늘어선 계단을 따라 걸어 내려오며, 아리스텔라는 북쪽 탑의 형태를 살폈다.
로이드가 갇혀 있던 감옥도 이곳에 있었고, 전대 성녀의 시종과 죽은 아이들이 갇혀있던 곳도 이 탑의 지하였다.
‘ 북쪽 탑은 어쩐지 기분이 나빠. ’
이제 정화가 끝나 평범한 공간으로 되돌아왔다 할지라도, 북쪽 탑에는 기분 나쁜 구역이 가득했다. 아리스텔라는 답답함에 잠시 난간에 손을 짚고 숨을 골랐다. 또 신성력이 혼란스러워진 걸까? 어쩐지 현기증이 일었다.
“ 후우……. ”
눈을 감고 깊이 숨을 내쉬자, 두근거리던 가슴이 조금 진정되는 것 같았다. 아리스텔라는 몇 번 더 심호흡한 뒤 몸을 일으켰다.
저벅. 저벅. 누군가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아래쪽 계단에 덩치 큰 남자의 실루엣이 보인다. 돌아가려던 아론이 아리스텔라의 대답을 듣지 않은 것을 신경 써서 다시 찾아온 건지도 모른다.
“ 아론. 데리러 온 건가요? ”
말을 걸었지만 대답은 없었다. 아론이 아닌가? 이런 시각에 이런 북쪽 탑을 찾아올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아리스텔라는 불현 듯 두려움을 느껴 어깨를 감싸 안았다.
“ 누, 누구세요? ”
설마 지하에 숨어있던 다른 괴물은 아니겠지. 겁에 질린 목소리로 정체를 묻자, 뜻밖에도 익숙한 목소리가 밑에서 들려왔다.
“ 성녀님. 접니다. ”
“ 케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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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 156화 연참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