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금된 성녀와 비밀의 밤-149화 (149/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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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시험의 밤

[149] 첫 번째 시험의 밤

아리스텔라를 데리러 온 것은 아론이었다. 그가 직접 올 줄은 몰랐다. 그를 따르는 사제는 많았고, 아론쯤 되는 신관이라면 굳이 대신관 히페리온을 거치지 않더라도 수습사제를 뜻대로 부릴 수 있을 터였다.

“ 아론. 당신이 직접 올 줄은 몰랐어요. 당연히 수습사제를 보낼 거라고 생각했는데. ”

“ 원하신다면, 내일부터는 그리 하겠습니다. ”

“ 아니에요. ”

조슈아와의 키스를 방해받은 일은 아쉽지만, 그녀를 부르러 온 것이 아론이라서 불쾌하던 마음이 조금 수그러들었다. 신관이 성녀인 그녀에게 수습사제를 보내 오라가라 한다면 더욱 불쾌했을 것이다. 아리스텔라는 흘러내린 옆머리를 쓸어 넘기고 천천히 일어났다.

“ 조슈아. 시종 일은 이제 끝났으니, 당신도 방으로 돌아가세요. ”

“ 성녀님께서 오실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

“ ……. ”

아론이 그녀에게 어떤 사제를 소개할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것은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들은 아닐 것이다. 이 신전의 모든 이들이 그녀의 종이라 하더라도, 마음이 없는 관계를 나누고 돌아온 모습을 조슈아에게 바로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 기다리지 마세요. ”

단호하게 딱 잘라 말하고, 아리스텔라는 등을 돌렸다. 조슈아도 고집은 부리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따라 일어나 아리스텔라의 어깨를 감싸 아론에게 이끌었다.

“ 성녀님을 잘 부탁드립니다. ”

“ 편히 쉬시길. ”

아론은 아리스텔라의 손을 잡지도 어깨를 안지도 않았다. 그녀와 한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손짓으로 문가로 안내했다. 아론을 따라 나가는 아리스텔라의 뒷모습을 향해 조슈아는 가볍게 목례했다.

무거운 문이 닫혔다.

‘ 별일 없어야 할 텐데. ’

흐트러진 신성력은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으니 사제와 성관계를 나눈다 해서 또다시 현기증을 유발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극에 약한 성녀의 몸이라면 사제와 몸을 섞으면서 느낀 쾌락으로 확실하게 안정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니 걱정할 일은 없을 터인데도, 조슈아는 입맛이 썼다.

주인이 나가버린 빈 방안을 둘러보며 조슈아는 창문을 닫고 침대를 정돈했다. 방금 전까지 그녀가 앉아있던 탓인가, 침대 시트와 베개에서는 희미하게 달콤한 향기가 남아 있었다.

시트에 약간의 온기가 남아 있다. 더 이상 주인이 이곳에 있지 않은데도 침대는 제 주인의 온기를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아서, 조슈아는 하얀 시트를 아쉬운 듯이 쓰다듬었다.

‘ 다른 남자와도 이 침대에서 밤을 보내셨겠지. ’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욕구가 일면 참지 말고 다른 남자와 몸을 섞으라고 그녀에게 조언했던 것은 조슈아다. 조슈아는 이제까지 아리스텔라가 다른 남자와 육체관계를 가지는 것에 질투해본 적이 없었다.

여신인 그녀는 이 신전의 모든 종이 섬겨야 할 주인이었으니, 매일 다른 종이 그녀의 밤시중을 든다한들 그것은 하등 문제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로이드도 케인도 크리스도 아리스텔라와 밤을 보냈다. 노엘도 꽃의 방에서 아리스텔라를 안았을 것이다. 아마도 조슈아가 모르는 다른 신전의 남자들 가운데 그녀의 향기로운 육체를 탐했던 이는 더 많을 것이다. 그들에게 일일이 질투할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도 안 되었다.

가장 큰 은총을 받은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타인을 질투하는 것은 과욕이었다. 게다가 아리스텔라는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자기 때문에 상처받는 것을 싫어했다.

질투에 마음을 사로잡히면 결국 서로를 상처 입힐 뿐이라는 것을 조슈아는 알고 있었다. 조슈아는 욕심을 버리고 자기 자신을 지키기를 택했다. 한평생을 방관자로 살아온 그는 성녀와의 관계에서도 직접적인 삽입을 피함으로써 한 발 떨어져 객관적인 위치를 고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저녁에 경험한 강렬한 쾌감은 선 밖에서 꿋꿋하게 버티고 있던 조슈아를 단숨에 중심으로 끌어들였다.

‘ 안지 말 것을 그랬어. ’

처음으로 환각 성분을 가진 독초를 맛보았을 때 이상으로 아찔한 경험이었다. 그 어떤 독보다도 달콤한 그녀의 몸에 중독된 것 같았다.

“ 성녀님……. ”

그녀에게 닿지 못한 입술이 말라갔다. 살짝 혀를 내밀어 입술을 축여도 달콤하고 부드러운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론의 방문에 멈추지 않고 그녀의 입술을 탐했으면 이 허전함이 채워졌을까. 조슈아는 안경을 벗고는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 ◆ ◇ ◆ ◇

아론은 아리스텔라를 데리고 북쪽 탑으로 향했다.

사제들의 구역은 동쪽, 성기사들의 구역은 서쪽, 성녀의 사적인 공간은 중앙. 남쪽 탑은 주로 실험이나 마법 수련을 위한 공간, 그리고 제례에 쓰이는 식물과 물품을 가꾸고 보관하는 장소였다.

북쪽 탑에 무엇이 있는지 아리스텔라는 잘 몰랐다. 로이드가 갇혀있던 감옥이 이곳에 있고, 이곳 지하에서 크리스가 괴물이 되었다는 것만을 기억하고 있었다.

“ 아론. 이렇게 멀리까지 올 필요가 있나요? ”

“ 성녀님께 보여드릴 장소가 있습니다. ”

아론과는 전에 지하 탐방을 했던 적이 있다. 그러니 지하는 아닐 것이다. 북쪽 탑에는 또 무엇이 있을까. 아리스텔라는 아론을 따라 긴 계단을 올라갔다. 어두운 밤인데도 푸른 신전의 공기와 주홍빛의 등불이 계단을 밝혀주어, 발을 디디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긴 계단을 올라간 끝에, 아론은 낡은 문을 열었다. 이곳이 탑의 꼭대기 층일까. 아론의 안내에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간 아리스텔라는 깜짝 놀랐다.

고급스러운 자줏빛 커튼으로 창을 가리고, 화려한 문양의 양탄자가 깔린 침실이었다. 탁자 위에는 제단에 놓인 것보다 더 고급스러워 보이는 금으로 된 촛대와 보석으로 만든 듯한 장식품이 놓여 있었다.

네 개의 큰 기둥이 달린데다 높이 차양이 드리워진 침대는 성인 남자 세 사람이 족히 누워서 잘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다. 침대 양옆에는 긴 의자가 놓여 있었고, 천장에는 보석으로 만들어진 모빌이 늘어져 있었다.

신전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방이다. 아무리 신전 청소는 마법으로 만들어진 요정들이 한다지만, 이런 북쪽 탑의 꼭대기에서 잠들 사람은 없을 터인데도 침실은 아주 깨끗하게 관리되어 있었다.

“ 여긴……. 무엇을 하는 곳인가요? ”

“ 타락한 아이들이 <교육>을 받던 방입니다. ”

“ 타락한 아이들이요? ”

타락한 아이들이라. 타락한 사제를 말하는 것일까.

성녀를 모시는 서른 명의 사제 가운데는 수습사제도 있었으나, 그들은 대부분 성년식을 마치고 이제 정식 사제가 되기만을 기다리는 10대 후반부터 20대 초반의 청년들이었다. 어리다고 말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 이런 곳에서 무엇을 가르치는 건데요? ”

“ 자신이 어떻게 태어났는지를 가르치지요. ”

아론의 대답에 아리스텔라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어떻게 태어났는지를 가르친다. 단순한 성교육은 아닐 것이다. 이 침실은 지나칠 정도로 장식적이었고 침대도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누기에는 너무 컸다.

게다가 침대 양옆에 놓인 긴 의자가 신경 쓰였다. 담소를 나누기 위한 공간이라면 응당 의자 옆에 테이블이 있어야 하는데, 없었다. 긴 의자는 마치 침대 위의 광경을 보기 위한 좌석처럼 보였다.

“ 설마, 이 의자에 앉아서 보는……. 건가요? ”

“ 예. ”

“ 누, 누가요……? ”

“ 타락한 여인의 배에서 태어나, 죄를 회개하며 살아가야 할 아이들이지요. ”

아리스텔라는 심장이 얼어붙는 듯했다. 타락한 여인이란 성녀를 말하는 것일 터였다. 그녀의 배에서 태어난 아이들이라니, 설마 성녀가 임신하여 아이를 낳았다고 말하는 것일까.

“ 서, 성녀는 신을 모신 순간 인간의 굴레에서 벗어나, 임신을 할 수 없는 몸이 된다고 들었어요. ”

“ 어머니는 신의 저주를 받으셨으니까요. ”

어머니.

그 단어에 아리스텔라는 현기증을 느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부드러운 양탄자에 발이 푹 파묻히는 것 같아 휘청거리다가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녀가 앉은 자리에서는, 저 쓸데없을 정도로 화려하고 커다란 침대가 잘 보였다.

“ 아론. 당신은……. ”

“ 어릴 적에는 이곳에 앉아, 제가 어떤 죄를 받아 태어났는지를 교육받았습니다. ”

아론은 전대 성녀 밀리아리아와, 그녀를 범한 사제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였다. 아이의 아버지는 누구일까. 그녀가 꿈에서 보았던 아론을 닮은 사제일까. 그것은 알 수 없었다. 성녀 밀리아리아를 섬기던 사제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녀를 범했다고 전대 대신관의 일기에 적혀 있었으니까.

“ 아이가, 태어날 수 있었던 거군요……. ”

그것은 밀리아리아가 순결을 잃고 저주받은 몸이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강간으로 인한 임신과 출산. 여자가 겪는 가장 끔찍한 고통.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의 아이를 배고 낳아야 하는 최악의 고문을, 그녀는 받아야 했다.

“ 세상에……. ”

“ 기도실에 있던 긴 의자를 기억하십니까? ”

히페리온과 기도를 했던 기도실의 뒤편에는 낮고 긴 의자가 있었다. 본래는 어린 수습사제들을 그곳에 앉혀놓고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라고 들었다.

생각해보니 이상한 일이었다. 성녀와 비슷한 나이대의 젊은 청년들만이 들어오는 이 폐쇄된 신전에, 오래 서있지 못해 의자에 앉혀야만 하는 <어린 수습사제>가 있을 리가 없거늘. 어째서 그 의자가 존재하는 것에 의문을 품지 않았을까.

“ 태어나서는 안 되는 타락한 아이들이라고 하시더군요. 매일 성수로 목욕을 하고 성서를 외우고, 밤에는 <교육>을 받으며 죄를 회개했습니다. ”

전대 대신관도 성녀의 아이들에 대해서만큼은 기록하지 않았다. 애초에 자신들의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한 기록이었으니 불리한 내용은 빼는 것이 당연했다.

성서에서 산모는 신성한 존재로 여겨졌다. 천벌을 받을 죄를 진 여인이 임신한 탓에 신의 노여움을 피한 일이 있었다.

성녀가 음란해져 남자들과 섹스했다면 그녀에게로 비난의 화살이 날아갈 테지만, 성녀가 아이를 낳았다고 기록한다면 그녀를 임신시킨 사제들에게로 비난의 화살이 날아갈 것이다.

기록이 발견되는 것은 이미 그들이 죽거나 노쇠하여 일선에서 물러난 후일 텐데도, 제 잘못을 들키고 싶지 않았던 사제들은 아이들에 대한 기록을 지워버렸다.

이곳에서 태어나, 출생의 기록조차 남지 않은 아이들은 전부 어디로 가 버렸을까.

전대 성녀를 모시던 사제들은 태어난 아이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태어나서는 안 되는 타락한 여인의 자식이니 회개해야 한다고.

그들은 아이들을 강압적으로 교육하고, 매일 밤 사내들에게 범해지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주며 저런 추잡하고 음란한 행위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각인시켰다.

전대 성녀를 모신 사제들이 어째서 구원받지 못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자신들의 주인인 성녀는 물론이고 죄 없는 아이들마저 그렇게 괴롭혔으니 멀쩡하게 성불한 영혼이 있을 리가 없었다.

‘ 잔인한 사람들. ’

아리스텔라는 머리를 감싸 쥐며 몸을 웅크렸다. 속에서 울컥거리며 혐오스러운 감정이 치밀었다.

“ 그래서 아론, 당신은 이곳에서 무엇을 하려는 건가요? ”

“ 제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녀님께서 하셔야지요. ”

다가온 아론이 아리스텔라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리스텔라의 보라색 눈동자와 아론의 황금색 눈동자가 마주쳤다.

“ 당신만이 특별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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