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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질 수 없어도
[146] 만질 수 없어도
아리스텔라는 조슈아와 함께 천천히 걸어 제 방으로 돌아왔다. 문을 여니 아침에 보았을 때와 똑같은 방 안의 풍경이 보였다. 변한 것은 해의 위치뿐일까. 이곳을 나올 때는 아침이었는데, 지금은 벌써 해가 내려와 방 안이 붉게 물들었다.
“ 성녀님. 어지럽지는 않으십니까? ”
“ 조금 나아졌어요, 조슈아. 급하게 움직이지만 않으면 될 것 같아요. ”
성기사와 사제들 앞에서 당당한 모습을 보이느라 자신을 다잡은 것이 신성력에도 영향을 준 덕분일까, 처음 불균형을 일으켰을 때처럼 눈앞이 빙글빙글 돌지는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몸은 무거웠고 머릿속은 멍했다.
피곤한 것도 아픈 것도 아닌데 몸이 무겁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기분이었다.
“ 조슈아. 아론이 어떤 사제를 보낼까요? ”
“ 글쎄요. 하지만 아론 신관이 누구를 보내든지 간에, 성녀님의 몸을 회복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
아론이 그녀와 밤을 보낼 사제를 불러들이기 전에, 적어도 다른 사람의 신성력이 흘러 들어와도 현기증이 나지 않는 상태까지는 회복해야 했다.
사제인 조슈아가 손을 대면 신성력이 뒤섞여 정신을 차릴 수가 없으니 성기사를 불러들여야 할까. 몸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이제까지보다 더 큰 자극을 얻는 수밖에 없다는데, 케인을 부를 용기는 나지 않았다.
‘ 케인. 내가 아론과 내기를 한 일로 무척 화를 냈지. ’
몸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며 걱정을 담아 한 소리를 한 것뿐이지만, 그의 착잡한 어조와 슬픔이 가득한 눈에서 케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아리스텔라가 몸을 치료하기 위해 잠자리를 요구한다면 성심성의껏 따르겠지만, 그것은 케인을 상처 입히는 일일 터였다. 그래서 그에게는 요구할 수 없었다.
‘ 누구를 부르면 좋을까. ’
아리스텔라는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욕구가 일 때마다 그녀를 도와주었던 조슈아가 바로 곁에 있는데, 그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없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 조슈아는 화내지 않는 건가요? ”
“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요? ”
“ 제가 아론과 내기를 했잖아요. 아론이 보내는 사제하고 그……. 밤을 보내겠다고. ”
사랑이 없는 섹스는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해놓고서, 이런 식으로 쉬이 다른 남자와 섹스하겠다고 약속한 그녀를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을까. 자신의 몸을 가벼이 여기는 여자라 생각해 경멸하지 않을까. 조금이라도 이성적으로 그녀를 좋아하고 있다면, 그녀와 잠자리를 하려는 다른 남자를 질투하지는 않을까. 그러다가 마음을 다치지는 않을까.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려 성기사들을 이끌고 기사단으로 돌아간 케인의 뒷모습을 본 아리스텔라는 조금 걱정이 되었다.
“ 성녀님의 뜻이 신의 뜻. 당신을 따르는 것은 제 역할입니다. ”
“ 제가 그런 말을 한 게……. 싫지 않나요? ”
“ 성녀님께서 결정하신 일인데, 제가 감히 반대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
그렇게 말하고 있지만, 조슈아의 낯빛은 어두웠다.
“ 찬성인지 반대인지를 묻는 게 아니에요. ”
조슈아는 그녀가 다른 남자와 밤을 보내도 질투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질투에 사로잡히면 그도 그녀도 괴로워질 뿐이니, 단지 함께 있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싶다고도 말했다.
‘ 어쩌면 그건, 그저 내 욕심을 채워주기 위한 대답이었는지도 몰라. ’
부드러운 갈색머리에 안경 너머로 보이는 연독색의 눈동자. 늘 부드럽고 온화한 표정의 조슈아는 아리스텔라에게 마음의 안식처와도 같았다.
아리스텔라가 원하는 방식으로 그녀를 사랑해주지 않을 뿐, 조슈아는 늘 그녀에게 헌신적이었다. 사제의 계율을 깨고 그녀가 요구하는 대로 몸을 겹쳤고, 비밀을 지켜주었다. 힘들어하는 그녀와 함께 고민하고 생각하며 답을 찾아주었다.
오늘은 몸 상태가 좋지 않으니 미사에 참석하지 않고 방에서 쉬라는 조언을 따르지 않고 미사에 참석했다. 케인의 품에 안겨 휴게실에 온 뒤에는, 굳이 그녀를 찾아와 당분간 나서지 말고 몸을 사리는 편이 좋을 거라는 조언을 따르지 않고 미사실로 돌아와 사제와 성기사들에게 진실을 밝혔다.
‘ 조슈아는 나를 원망하고 있을까. ’
조슈아는 사제들 사이에서도 방관자라고 했다. 누군가와 어울리는 일 없이 혼자서 책을 읽으며 지식을 쌓고, 주위를 관찰하며 탐구한다고 그랬지. 사람과 어울리기를 꺼려하는 그라면 아리스텔라를 대하기 어려워할 법도 한데, 조슈아는 늘 그녀에게 친절했다. 그것이 얼마만큼의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인지, 아리스텔라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남자를 어려워하는 아리스텔라가 다른 이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몇 번이나 떨리는 마음을 다잡고 어렵게 웃으며 인사하던 것처럼, 조슈아도 누군가와 어울리는 일이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종으로서 역할을 다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의 기분을 섬세하게 파악하고 배려하며 어울려 주고, 도와주었다.
조슈아는 스스로 나서 제 욕심을 말하지는 않지만, 그도 아리스텔라에게 바라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의 상냥함과 배려를 받아놓고 아리스텔라는 조슈아의 마음을 죽 내버려두었다.
“ 조슈아. 내게 바라는 게 있나요? ”
“ 성녀님 당신께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아끼고 사랑하시는 것. 그거면 충분합니다. ”
몸과 마음을 아낀다. 평소라면 그녀를 배려하는 말로 이해했겠지만 지금 듣기에는 가슴이 뜨끔한 말이다. 아리스텔라는 제 결정을 번복할 생각이 없었지만, 조슈아에게는 미안한 일을 했다고 생각했다.
“ 조슈아. ”
아리스텔라는 살며시 손을 뻗어 조슈아의 흘러내린 긴 옆머리를 넘겨주었다. 그의 머리카락은 여전히 부드러웠다. 사락사락. 손가락에 감기는 느낌이 편안했다.
“ 성녀님. 아직 신성력이 안정되지 않으셨습니다. 제게 닿으면 어지러우실 겁니다. ”
마음이 복잡해도, 혼란스러워도, 조슈아의 시선과 음성은 따스하게 내리쬐는 오후의 햇볕처럼 그녀를 감싸 준다. 그래서 좋았다.
“ 괜찮아요. 조슈아인걸. ”
손끝이 뺨이나 귓가를 스칠 때마다 살짝 따끔한 느낌이 들었다. 겨울에 정전기가 오를 때처럼 찌르르한 감각이 손끝에서 팔을 타고 올라오다가 점점 옅어져 사라진다. 신기한 감각이었다. 아리스텔라는 조슈아의 머리카락과 뺨을 쓰다듬으면서 그의 연녹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 조슈아는 내 옆에 있는 것이……. 나를 보필하는 일이, 힘들지 않나요? ”
“ 성녀님? ”
조슈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리스텔라는 조금 우물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 그렇지만 어쩐지 저는……. 이 신전에 온 후로 늘 사고만 치는 것 같단 말이에요. 대미사 때도 저 때문에 미사 순서가 바뀌었고, 그날 밤에는 산책을 하다가 사고를 당했고……. ”
성욕을 참으려다 이성을 잃고 방에서 뛰쳐나가 크리스와, 그리고 조슈아와 관계를 가졌다. 조슈아로서는 얼굴을 한 번 보았을 뿐인 성녀와 하루 만에 두 번이나 관계를 가졌어야 했으니 얼마나 황당했을까.
게다가 그 다음에는 크리스에게 붙들려 빈 방에 갇히질 않나, 로이드에게 강제로 안긴 일을 사제들에게 들키기도 하고, 형을 집행하려 신전을 찾아온 클로비스에게도 큰일을 당했다. 그리고 겨우 로이드를 구해냈나 했더니 그 다음에는 크리스가 괴물이 되어버렸다.
어쩌면 제 안에 있는 여신의 음욕이 아니라, 성녀 자체가 신전에 사고를 몰고 오는 것은 아닐까. 아리스텔라는 조금 우울해졌다. 그녀 자신이 더러운 존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지만, 저를 따르는 사제와 성기사들이 자신 때문에 곤란해 하는 일은 더 이상 없기를 바랐다.
“ 당신과 의논하지 않고, 덜컥 그런 약속을 해버려서 미안해요. ”
조슈아는 아리스텔라의 몸을 무척 아껴주었는데, 그녀는 아론에게 그가 정해준 사제와 세 번의 밤을 보내겠노라 약속했으니. 어쩌면 배신감도 느끼지 않을까. 말을 듣지 않고 늘 사고만 치는 자신에게 질려버렸을지도 모른다. 아리스텔라는 제가 한심해서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내쉬었다.
“ 그렇군요. 확실히, 성녀님을 모시는 일은 암호문을 풀거나 새로운 약을 개발하는 것보다도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만. ”
“ 미안해요……. ”
“ 저는 어려운 문제를 푸는 것을 좋아한답니다, 성녀님. ”
조슈아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그가 속삭여주는 소리에 아리스텔라는 가늘게 몸을 떨었다. 마치 귓전을 깃털로 간질이는 것 같았다. 새가 날갯짓을 하듯 부드럽게 귓가를 간질이는 조슈아의 목소리에 아리스텔라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 다음에 어떤 행동을 할지 모르는 당신을 섬기는 일이야말로, 제게는 최고의 탐구 영역이거든요. ”
“ 으응, 사람을……. 연구대상 취급하지 말아요. ”
“ 신에 대해 탐구하고 그분의 말씀을 연구하는 것은 사제의 기본 소양이랍니다. ”
입술이 닿은 것은 아니었다. 조슈아는 아리스텔라가 현기증을 느끼지 않도록 지근거리에서 단지 속삭일 뿐이었다.
조슈아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한숨이 귓전을 간질이는 감각이 야속했다. 제게 접촉하지 않는 것에 초조해진 아리스텔라는 살짝 눈썹을 찌푸리며 그에게 물었다.
“ 그래서 저를 탐구하는 기분은……. 어떤데요? ”
귓가를 간질이던 숨결이 멀어지더니, 조슈아가 고개를 돌려 아리스텔라와 얼굴을 마주했다.
“ 나날이 새로워지는 당신을 마주할 때마다, 환희로 물든답니다. ”
살며시 고개를 기울이며 다가오는 그를 보고 아리스텔라는 눈을 감았다. 키스하려는 걸까. 조슈아의 숨결이 코끝에 닿았다. 입술이 겹치는 순간 현기증을 느껴 쓰러지지 않도록 중심을 잡으려 아리스텔라는 다리에 힘을 주고 양손을 꼭 모아 쥐었다.
“ 으응? ”
순간 차갑고 딱딱한 무언가가 입속으로 들어와, 아리스텔라는 깜짝 놀라 눈을 떴다. 혀끝에 단맛이 돌았다. 초콜릿이었다.
“ 조슈아, 이건……. ”
“ 점심을 드시지 않아 기운이 없으신 듯하여, 간식을 준비했답니다. ”
“ 으……! ”
키스하려는 줄 알고 두근두근한 기분으로 기다리고 있었는데, 놀림 받은 기분에 아리스텔라는 볼을 빨갛게 물들이며 입속의 초콜릿을 혀로 굴렸다. 혀끝에서 사르르 녹아 달콤하게 달라붙는 초콜릿은 확실히 맛있었다. 그녀가 기대한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지만.
“ 부족하시다면, 더 드릴까요? ”
“ 됐어요. ”
아리스텔라는 초콜릿을 우물거리며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정말이지 조슈아도 은근히 장난기가 많다.
히페리온은 그녀 앞에서 무척 당황하며 조심하려는 태도를 보이는데, 조슈아는 분명 정중하고 상냥한데도 의외로 거리낌 없이 그녀를 대한다. 처음에는 그 점 때문에 조슈아를 편안하게 느꼈지만, 요즘 들어 어쩐지 점점 그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듯한 기분이 든다.
“ 조슈아. 저, 아론이 사람을 보내기 전에 몸을 회복해야 하잖아요? 밤시중을 들 사람을 골라야 하는데. ”
“ 성녀님. 아직 저녁입니다만. ”
“ 하다 보면 밤이 되겠죠. ”
조슈아가 자신을 놀린 일로 살짝 분한 마음이 든 아리스텔라는 일부러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면서 보란 듯이 앞섶을 매만졌다.
“ 그런데 조슈아가 만지면 신성력이 흐트러져서 어지러우니까, 다른 사람을 골라야겠네요. 케인은 저한테 화가 나 있을 테니, 이자크를 부르는 게 좋을까요? ”
“ 성녀님. ”
“ 아니, 이젠 성기사분들도 제 사생활에 대해 알고 계시니까 다른 사람을……, 하윽? ”
새침하게 고개를 돌린 채로 도발하듯 말을 잇던 아리스텔라는 갑자기 귓전을 간질이는 보드라운 감촉에 신음하며 몸을 움츠렸다. 귓속을 파고들어 간질이는 부드럽고 가벼운 것은 새의 깃털이었다. 조슈아가 깃펜의 끝으로 아리스텔라의 귓가를 간질이고 있었다.
“ 아응, 조슈아. 뭐, 하는……. ”
“ 성녀님께서 밤시중을 원하시니, 시중을 들 뿐입니다만. ”
“ 지금 몸 때문에, 조슈아는 저한테 손댈 수가, 으응, 없잖아요……. ”
“ 반드시 손을 대야만 당신을 기쁘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
안경 너머의 연녹색 눈동자에, 요염한 빛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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