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금된 성녀와 비밀의 밤-145화 (145/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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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결하다는 것은

[145]

“ 당신들의 눈에는, 제가 더러운 여자로 보이나요? ”

“ 서, 성녀님……. ”

아리스텔라의 질문을 받은 에른스트가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주위의 성기사들이 난처한 눈빛을 주고받는 것이 보였다.

“ 남자를 모르는 숫처녀가 아니면 더럽다고 생각하시나요? 정말로? ”

에른스트는 주저하며 한 발짝 물러난 뒤, 성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몸매가 그대로 드러날 정도로 얇은 성의를 입고 있는 성녀의 몸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툭 건드리기만 해도 쓰러져버릴 만큼 가냘픈데, 마수를 상대할 때 이상의 위압감이 느껴졌다.

무거운 갑주를 두르고 성검까지 차고 있는 에른스트는 얇은 옷 하나만을 걸친 성녀를 앞에 두고도 긴장으로 몸이 뻣뻣해졌다. 처음 훈련소에 입단해서 무서운 교관을 마주했을 때도 이런 기분을 느꼈던 것 같았다.

성녀 아리스텔라는 아름다웠다. 물론 용모도 아름답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은 외적인 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상대의 진실한 표정을 그대로 비추는 투명한 보라색의 눈동자는 맑고 깨끗했다. 뽀얗고 매끄러운 피부에는 순백의 성의가 잘 어울렸다.

신성력이 약한 그로서는 신과 교감한 적이 없을 터인데도, 에른스트는 아리스텔라의 모습을 처음 보는 순간 그녀가 여신의 현신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 성녀님은……. 순결하십니다. ”

맑은 물에 잉크 한 방울을 떨어뜨리면 금세 탁해져버린다. 그러나 아리스텔라의 맑음은 더러움을 정화하는 성수와도 같았다. 무엇이든 정화해내는 성수는 결코 오염되지 않는다.

그녀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인간인 자신들이 성녀를 더럽힐 수 있을 리 없다. 그녀는 여전히 아름답고 순결하며 지엄한 존재였다.

“ 성기사 에른스트, 여신의 현신이신 아리스텔라 성녀님께 경배합니다. ”

에른스트가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아리스텔라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성기사인 그는 처음 이 미사실에 발을 들였을 때 그녀로부터 축복을 나누어받았다. 그때의 벅차오르는 기쁨을 기억한다. 자신에게 축복을 내려준 성녀를 의심하는 일 따위를 할 수 있을 리 없다. 그것은 분명 다른 성기사들도 마찬가지리라.

“ 성기사 미하엘, 성녀님께 경배합니다. ”

“ 성기사 루커스, 성녀님께 경배합니다. ”

이어서 차례차례 성기사들이 무릎을 꿇으며 아리스텔라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신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마수와 싸우던 성기사들은, 자신들의 주인을 모욕하려는 더러운 편견과 오만을 성검으로 베어냈다. 타락한 것은 성녀가 아니라 자신들의 낡은 사고방식이었다.

젊고 혈기왕성하여 무엇이든 하겠다는 의욕이 넘치던 그들이 낡은 관습에 얽매인 뒷방 늙은이 같은 사고방식을 가지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이었던가.

“ 성녀님. 당신을 경애하는 미천한 종에게, 부디 여신의 은총을. ”

끝에 서있던 이자크까지 무릎을 꿇으며 아리스텔라를 향해 고개를 숙이자, 케인이 사제들을 향해 외쳤다.

“ 우리 성기사들은 성녀님이 여신의 현신이며, 무엇으로도 성녀님의 신성을 더럽힐 수 없다는 것을 믿습니다. ”

“ 아니, 대체……! ”

“ 사제들이여, 그대들은 성녀님을 어디까지 모욕할 셈입니까? ”

미사실의 허공을 채우는 케인의 노성에 사제들은 몸을 움츠리며 뒤로 물러났다.

아무리 성기사의 지위가 사제보다 낮고, 사제들이 성기사를 얕잡아본다 하더라도 물리적인 힘의 차이는 명확했다. 게다가 케인은 본디 교황청 소속의 성기사가 아니었다. 내내 전장에서 무훈을 세워 황궁 기사단에 몸담다가 처음으로 신전에 배치된 것이다.

마수를 상대하던 다른 성기사들과는 달리, 전장에서 실제로 사람을 베어본 자의 눈빛은 사제들에게 공포심을 느끼게 하기 충분했다. 그들은 차마 케인에게 맞서지 못하고 서로 눈치만을 주고받았다.

‘ 미사실에서 저런 불경한 언행을 보이는 것을 방치해야 합니까? ’

‘ 왜 저한테 이러십니까? 이런 일은 응당 저희 평사제가 아니라 신관님이 나서야지요. ’

‘ 아론 신관님은 어디 계십니까? 히페리온 대신관님은요! ’

자신들 대신 케인에게 맞서 사제들의 입장을 대변해주길 바라는 사제들의 눈치가 단상에 서있던 히페리온에게로 쏠렸다.

평소에는 사제와 성기사 사이에서 공정함을 유지해야 하는 히페리온을 공격하던 이들의 눈빛에 간절함이 담겼다. 히페리온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면서도, 무표정한 얼굴로 케인을 향해 나직이 말했다.

“ 케인 기사단장. 미사실에서 언성을 높이시면 안 됩니다. ”

“ 미사실은 신을 찬양하는 자리입니다. 찬양받아 마땅하신 성녀님을 모욕한 것이 바로 저 사제들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대신관께서는, 이자들의 죄를 묻지 않으시려는 것입니까? ”

“ 죄를 묻는 것도, 심판을 하는 것도, 저의 권한이 아닙니다. ”

히페리온은 그렇게 대답하며 아리스텔라를 바라보았다. 아리스텔라는 아직 서있는 것이 버거운지 한쪽 손으로 의자의 등받이를 짚고 있었다.

그녀를 쉬게 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다. 성기사를 설득한 것과 마찬가지로, 사제들을 설득할 책임 또한 성녀에게 있었다. 히페리온이 대신관의 지위를 이용하며 사제들의 의견을 억누르려 한다면 오히려 사제들의 성녀에 대한 불신만이 깊어질 것이다.

“ 성녀님께서 낭독하셔야 할 성서가 이것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

히페리온은 전대 대신관의 일기를 들어보였다. 그 안에 적혀있던 외설스런 내용을 상기한 사제들과 성기사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케인은 전대 대신관의 일기를 읽지 않았지만, 조슈아로부터 대강의 내용은 전해 들었다. 불쏘시개로도 쓰이지 못할 음행과 자기변명의 기록이다. 읽지 않아도 그 내용을 보고 아리스텔라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이런 일을 벌인 자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 미사의 준비를 맡는 것은 지도하는 사제들의 몫. 오늘의 실책에 대한 책임은 미사 후에 따로 물을 것입니다. ”

“ 실책이라니요, 이를 실수라 여기시는 겁니까! ”

성녀가 낭독할 성서 대신 전대 대신관의 일기를 펼쳐놓는 행위가 실수일리 없다. 명백한 고의인 것을, 히페리온은 사제들을 감싸려는 것인가. 사제에 대한 불신이 한층 더 깊어진 케인의 푸른 눈이 불꽃처럼 번뜩였다.

눈빛으로도 사람을 찌를 수 있었더라면 벌써 그의 검이 히페리온의 가슴에 꽂혔을 것이다. 그러나 히페리온은 케인의 살벌한 눈빛을 마주하고도 태연했다.

“ 신의 은총을 받는 자리에 가장 가깝다고는 하나 저는 인간입니다. 제가 보지 않은 일을 정황만으로 추측하여 처벌하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 ”

히페리온은 단상에서 내려와 아리스텔라를 향해 다가왔다. 케인이 그를 경계하며 검병을 거머쥐었지만, 히페리온은 개의치 않고 아리스텔라의 앞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 심판의 권한은 오로지 성녀님께 있습니다. ”

“ 대신관님……. ”

히페리온은 케인에게 분명히, 자신은 인간이기 때문에 이미 벌어진 일 이외의 것은 처벌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아리스텔라에게 심판의 권한을 넘겼다. 그것은 곧 그녀가 인간을 넘어선 존재, 여신임을 긍정한다는 뜻이었다.

이 신전에서 가장 신의 은총을 받는 자리에 가까운 대신관이 성녀의 신성을 긍정했다. 사제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서로 눈치만 주고받았다.

여기서 바로 성녀의 신성을 긍정하면 자신들의 꼴이 우스워지고, 그렇다고 성녀의 신성을 부정한다면 성기사들과 대신관까지 적으로 돌리는 것이 된다. 성녀와 대신관, 성기사까지 한 편이 된 마당에 교황청에서 사제들의 편을 들어줄 것 같지는 않았다.

난감한 기색을 표하는 그들을 향해 아리스텔라가 물었다.

“ 사제분들은 아직도 제가 더러운 여자라고 생각하시나요? ”

“ 우웃……. ”

사제들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와 눈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녀의 맑은 눈동자가 자신들의 부끄러운 속마음까지 꿰뚫어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 제가 타락했다고 여기시는 분들은 앞으로 나와서 확인해보세요. ”

“ 화, 확인이라니요……. ”

“ 사제분들은 타인의 신성력을 감지하는 기술을 익히셨다 들었습니다. 분명 제가 처음 이 신전에 들어왔을 때, 아직 숫처녀였을 때의 신성력이 어떠했는지 기억하고 계실 거예요. ”

아리스텔라의 신성력이 그때와 비교하여 약해지거나 탁해졌는지, 혹은 그 반대인지를 감지하면 되는 일이다.

아리스텔라는 자신의 신성력이 조금도 약해지거나 탁해지지 않았다고 자신했다.

처음 이 신전에 들어왔을 때는 아무것도 모르던 그녀였지만, 마법 수업을 배우면서 아리스텔라는 자신 안의 신성력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비록 때때로 통제가 되지 않기는 하지만, 그녀의 신성력은 무척 맑고 깨끗했다. 혼란스럽게 요동치며 현기증을 유발하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말이다.

“ 신성력의 강함이 순결함의 증거가 되지는 않습니다. ”

사제들의 뒤편에서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낮게 울리면서도 귀에 또렷이 박히는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를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유달리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 아론은, 사제 무리 사이에서도 아주 잘 보였다. 굳이 다른 이들이 비켜서지 않아도 그는 아리스텔라와 시선을 마주할 수 있었다.

“ 성녀님의 신성력은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강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저희가 감지할 수 있는 경계를 아득히 넘어섰다고 볼 수 있지요. ”

“ 제가 타락했는지 아닌지, 파악할 수 없다는 건가요? ”

“ 색을 멀리하는 것은 사제의 기본 계율입니다. 그것을 어기신 성녀님께서는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순결한 몸이 아닙니다. ”

아론의 표정은 여전히 무표정했고 음성은 침착했다. 그에게로 쏟아지는 사제들의 불안한 눈빛과 성기사들의 분노 가득한 눈빛을 태연하게 받아내며 아론이 앞으로 나와 아리스텔라와 마주 섰다.

“ 단 한명의 성녀님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지금 성녀님께서는 당신만이 특별하다 주장하고 계시는 겁니다. ”

“ 성기사분들은 제 신성을 긍정했고, 사제분들도 제 말에 반박할 수 없었어요. 아론 신관님만이 제가 타락했다고 주장하고 계시네요. ”

과연 전대 성녀들이 정말로 타락했을까. 아리스텔라는 그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녀들은 다만 해답을 찾지 못했던 것이다. 어째서 이토록 몸이 음란해지고, 남자가 안아주지 않으면 견딜 수 없게 되었는지.

그녀들은 자신에게 닥친 시련을 이겨내지 못하고 욕망에 빠져 자신을 놓아버렸다. 그래서 매일매일 저 제단에서 사제들에게 범해지며 괴로워했다.

그 역겨운 자기변명과 책임회피의 고리를, 아리스텔라는 끊어내고 싶었다.

“ 그럼 저와 내기를 해요. ”

“ 내기 말입니까? ”

“ 사제분들과 세 번의 밤을 보내겠습니다. 누구와 함께 밤을 보낼지 상대는 아론 신관님이 정해주세요. ”

아리스텔라의 폭탄발언에 사제들과 성기사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 성녀님! ”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한 수단으로는 지나쳤다.

“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말씨는 속일 수 있어도, 몸을 섞을 때의 눈빛과 마음은 속일 수 없지요. 그것으로 제 신성을 증명해보이겠어요. ”

“ 제가 어떤 자를 보내더라도, 밤을 보내겠다고 약속하시겠습니까? ”

“ 네. ”

사람의 몸은 도구가 아니다.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혹은 이익을 얻기 위해 제 몸을 함부로 하는 일을 아리스텔라는 질색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 하는 행동은 아니었다.

이 신전에 있는 모든 이들은 여신의 종이었다. 아리스텔라를 주인으로 섬기며 한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이들이었다.

그들에게 납득시켜 보이고 싶었다. 음욕의 여신을 품은 성녀의 몸은 음란할지언정 타락하지 않았으며, 마음을 나누는 행위는 서로에게 기쁨을 준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 그리고 제 쪽에서도 조건이 있어요. ”

“ 조건이요? ”

“ 섹스할 때는 상대를 배려할 것. ”

아리스텔라는 고개를 들고 아론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 강압적으로 저를 범하려 든다면 용서하지 않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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