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금된 성녀와 비밀의 밤-141화 (14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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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받는 성녀

[141]

아리스텔라는 다툼을 싫어했다. 서로의 이익 때문에 분쟁이 발생하면 먼저 뜻을 굽히고 물러나는 쪽이었다. 조금 손해를 보는 편이 싸우는 것보다 낫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번에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이 신전에서 그녀의 위치를 아론에게 자각하게 만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리스텔라는 신을 자처할 생각은 없지만, 자신의 신성을 부정한다면 이 신전에 자신을 따르기 위해 모여든 모든 이들의 마음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그들의 충성스러운 마음을 모욕할 수는 없었다.

“ 저는 여신 위그멘타르를 모시는 17대 성녀입니다. ”

그녀의 몸으로 다른 남자를 유혹하여 관계를 가지고, 헐벗고 돌아다니며 입에 담기 민망한 사고만을 치고 다니는 골칫덩이 여신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 아론 신관님. 당신은 이 신전의 신관이면서, 여신의 현신인 저를 주인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건가요? ”

“ 그것은 제가 묻고 싶은 말이로군요. ”

“ 네……? ”

“ 성녀님께서는, 당신을 섬기는 이 신전의 남자들을 <종>으로 여기고 계시는 것이 맞습니까? ”

아론의 금색 눈동자는 마치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듯했다. 날카로운 시선이 아리스텔라의 심장에 꽂혔다. 턱 하고 숨이 막혔다. 다시금 심장이 쿵쿵거리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어째서일까. 아론은 그저 무뚝뚝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인데, 그와 눈을 마주친 아리스텔라는 숨이 가빠오는 것을 느꼈다. 그저 서있을 뿐인데도 현기증이 나서 넘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아리스텔라는 강연대를 짚었다. 그러자 강연대를 짚은 손을 타고 욱신거리는 감각이 흘러들어왔다.

“ 아읏! ”

갑작스러운 자극에 반사적으로 손을 떼느라 균형을 잃은 몸이 비틀거렸다. 아리스텔라는 그대로 뒤로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 아야! ”

“ 성녀님! ”

가장 가까이에 있던 노엘이 깜짝 놀라 아리스텔라에게 다가와 그녀를 부축하려 했다. 노엘의 손끝이 어깨에 닿는 순간, 갑자기 온몸에 찌르르한 쾌감이 돌았다. 무심코 신음을 흘릴 것 같아서, 아리스텔라는 다급하게 노엘의 손을 뿌리치며 어깨를 감싸 안았다.

“ 내 몸에 손대지 마세요! ”

“ 성녀님? 하지만……. ”

가슴이 뛰었다. 주저앉아 있는데도 눈앞이 빙글빙글 돈다. 그러면서도 몸 속에서 간질거리는 감각이 피어올라, 아랫배가 시큰거렸다. 아리스텔라는 움찔거리면서 어떻게든 몸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성서 대신 전대 대신관의 일기를 펼쳐놓도록 지시한 것은 아마도 아론일 것이다. 조슈아는 아론이 아리스텔라와 그의 관계를 의심하고 있다고 말했으니까. 그리고 그 의심은, 방금 아리스텔라가 보인 반응으로 인해 확신이 되었다.

‘ 안 돼. 일어나야 해……! ’

아리스텔라는 바닥에 손을 짚고 간신히 상체를 일으켰다. 하지만 어지러워서 시야가 분별이 가지 않았다. 귓전이 윙윙 울리는데, 그것이 다른 이들의 목소리인지 이명인지도 구분할 수가 없다.

“ 으읍……! ”

속에서 뭔가 울컥거렸다. 어지러워서 토할 것 같았다. 갑자기 제 몸이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론이 눈빛으로 무슨 짓이라도 한 것일까.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히페리온이나 조슈아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상황을 살피고 싶은데 시야는 빙글빙글 돌기만 한다.

“ 앗! 뭐 하는 겁니까! ”

노엘의 목소리가 당황한 듯 높아졌다. 왜 저러는 것일까.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눈앞이 핑 돌아, 아리스텔라는 또다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졌다. 하지만 몸에 닿는 것은 딱딱한 바닥이 아니었다.

“ 아, 응……? ”

“ 미사를 보실 수 없는 상태입니다. 성녀님을 휴게실로 뫼시지요. ”

깊은 물속에 가라앉는 것처럼 묵직하게 내려앉는 목소리. 하지만 그 음성은 더할 나위 없이 깊고 부드러웠다. 커다랗고 단단한 손이 그녀의 몸을 안고 있었다. 아리스텔라의 눈에 금빛의 머리카락이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 케인……. ”

“ 성녀님.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곧 편히 쉬실 수 있는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

어느새 단상 위까지 올라온 케인이 노엘을 밀어내고 아리스텔라를 안아든 것이었다.

다른 사제들이 기겁을 하거나 말거나, 케인은 그대로 몸을 휙 돌려 단상에서 내려왔다. 그대로 성큼성큼 문으로 나가는 케인을 부르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막지는 못했다.

미사실의 스테인드글라스에 비치는 햇살이 현란한 빛으로 반짝였다. 하지만 아리스텔라는 그것을 아름답다고 느낄 수가 없었다. 가뜩이나 어지러운데 시야의 풍경까지 현란하게 흐트러지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 케인, 놓, 놓아주세요. 이런 짓을 하면, 당신이 곤란해지잖아요……. ”

“ 놓아드릴 수 없습니다. 휴게실까지 금방이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

“ 안 돼요. 케인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요……! ”

성녀의 권위로도 미사 예식을 바꾸는 것을 지적받았다. 그런데 기사단장이 미사 도중에 성녀를 데리고 미사실을 빠져나가는 행위가 용인될 리 없다.

안 그래도 사제와 성기사의 사이가 좋지 않은데, 이러다가 케인이 난처한 처지에 놓이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나 아리스텔라는 걱정이 되었다.

“ 성녀님께서 제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

어느새 주위의 풍경이 현란한 스테인드 글라스에서 흰 대리석으로 바뀌었다. 주위에 녹색의 이파리가 흔들리는 것을 보아하니, 회랑으로 나온 것 같았다.

“ 잘못된 행동을 하면, 엄하게 꾸짖어 달라고 하셨지요. ”

“ 네? 무슨……. ”

미사 예식을 바꾼 것이 잘못된 행동이라는 말인가. 잘 분별이 가지 않는 시야로 애써 케인의 눈빛을 파악하려 눈동자를 굴리던 아리스텔라의 시야가 곧 어두워졌다.

“ 읍……, 으응……. ”

탄력 있는 입술이 아리스텔라의 입술을 덮었다. 아직 숨이 가빠 벌어진 상태였던 입술 사이로 혀가 밀려들어왔다. 길고 두툼한 혀가 제 입안을 휘젓는 느낌에 아리스텔라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머릿속의 현기증이 조금 가라앉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쿵쿵거리며 뛰는 심장과, 아랫배에서부터 욱신거리며 피어오르는 야릇한 감각은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 폐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

“ 아, 응. 케인……. ”

“ 당신은 제게 무엇을 하셔도 되는 분이니까요. ”

저울에 무거운 추를 올려놓은 것처럼, 쿵 하고 심장이 울렸다. 아리스텔라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다시 입술이 겹쳤다.

손끝과 발끝이 차가워졌다가, 다시 가슴에서부터 뜨거운 열기가 피어올랐다.

지금 자신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미사실에서 이렇게 뛰쳐나왔으니 사제와 성기사의 사이는 더욱 나빠질 텐데,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까.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지 못하고 생각의 바다에서 방황하던 아리스텔라에게 케인의 입맞춤은 그녀를 구원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온 밧줄과도 같았다.

키스의 달콤함에 빠져, 아리스텔라는 케인의 목 뒤에 팔을 두르고 그에게 매달렸다.

◇ ◆ ◇ ◆ ◇

아리스텔라를 휴게실 침대에 눕힌 케인은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다친 곳도 없어 보이는데 이상하게 안색이 창백했다. 아리스텔라는 여전히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인상을 찌푸린 채였다.

“ 성녀님. 어디가 안 좋으십니까? 토기가 인다면 참지 마시고 토해내십시오. 뒤처리는 제가 해드리겠습니다. ”

“ 으응, 그게 아니라……. ”

누워 있는데도 이상하게 현기증이 났다. 피를 흘린 것도 아닌데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손끝 발끝이 차가워서, 케인이 모포를 덮어준 뒤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감싸 온기를 전해주고 있었다.

“ 이상해요. 수면 부족일 리도 없는데……, 자꾸, 어지러워서……. ”

“ 성서 낭독을 하신 것은 처음이시니까요. 많은 사람 앞에서 말씀하시느라 긴장한 탓인지도 모릅니다. ”

긴장이나 스트레스로 인한 현기증은 아니었다. 아리스텔라의 몸속에서 뭔가 간질간질한 감각이 꾸물거리면서 몸 안을 배회하고 있다.

아론과 마주보는 순간, 그의 눈빛에 몸 안의 무언가가 균형을 잃은 것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노엘이 건드렸을 때는 마치 몸을 섞을 때처럼 강렬한 쾌감이 느껴져 참기 힘들었는데, 케인이 만져주는 것은 그리 자극적이지 않았다.

“ 일단 쉬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저는 밖에서 망을 보고 있을 테니 성녀님께서는 한 숨 주무시지요. ”

“ 시, 싫어요……. ”

아리스텔라는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손으로 케인의 손을 붙잡았다. 몸이 불편한데 혼자서 누워있는 것만큼 괴로운 일은 없었다. 누군가 곁에 있어주는 것이 좋았다. 몸을 덮어주는 모포보다도 케인이 손을 잡아주는 것이 따스했다.

“ 혼자 있고 싶지 않아요. 케인, 옆에 있어주세요……. ”

“ 예. 그리 하겠습니다. ”

케인은 아리스텔라의 손을 잡은 채로 고개를 숙여, 그녀의 손끝에 입을 맞췄다. 그의 입술이 닿는 순간, 또다시 현기증이 조금 줄어들었다.

“ 케인……. ”

케인의 손길이나 입술에 그녀를 안정시키는 힘이 있는 것일까. 아리스텔라는 케인의 이름을 부르며 입가를 핥았다. 케인은 잠시 망설이다가 그녀에게 키스했다. 입술이 겹치고 서로의 혀가 뒤섞이자 몸 안에서 겉돌던 무언가가 조금 더 안정이 되었다.

“ 흐응, 응, 으응……. ”

“ 성녀님. ”

“ 케인, 더……. ”

케인은 어지럽다는 그녀에게 이런 짓을 해도 괜찮은 것일까 망설였지만, 아리스텔라는 계속해서 그에게 키스를 졸랐다. 케인이 키스하고 손으로 만져주자 조금씩 현기증이 가라앉았기 때문이다.

“ 성녀님. 괴롭지는 않으십니까? 가슴이 답답하다거나, 몸이 불편한데 저와 이런 일을 하는 것은……. ”

“ 케인……. 당신이 만져주면, 안정이 돼요. ”

케인의 곤혹스러워 하던 표정이 아리스텔라의 말에 의아한 얼굴로 바뀌었다. 이내 깊게 숨을 들이쉰 그는 그녀의 몸에 덮인 모포를 살짝 벗겨내고, 옷 위로 가슴을 쓰다듬으며 뺨과 귓가에 키스했다.

“ 읏, 아응……. ”

케인이 만져주는 부위에 따끈따끈한 열이 피어오르면서, 혼란스러운 기분이 조금씩 안정되어 간다. 차가웠던 손끝 발끝에도 피가 돌고, 점차 팔다리에도 힘이 돌아왔다.

내내 어지럽던 것이 케인의 키스와 손길로 진정되다니 신기한 일이다. 몸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덮고 있던 모포는 어느새 저 아래까지 흘러내리고, 케인의 몸이 제 몸 위에 드리워져 있었다.

“ 제가 만져드리면 안정이 된다고 하셨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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