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금된 성녀와 비밀의 밤-140화 (14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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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받는 성녀

[140]

강연대 위에 펼쳐져 있던 것은 성서가 아니었다.

‘ 전대 대신관의 일기……! ’

전대 대신관의 일기.

그것도 타락한 성녀를 사제들이 정화하는 정화의 의식을 서술한 부분이다.

정갈한 필체로 적어나간 문장의 내용은 음란하기 짝이 없었다. 제 욕망대로 성녀를 범한 죄를 감추기 위한 변명을 늘어놓은 전대 대신관의 기록은 타락한 성녀의 음행을 강조하는 관점에서만 적혀 있었다.

성녀가 제단에 누워 사내들에게 범해지면서 어떤 표정으로 어떻게 신음했는지, 몇 명의 남자와 어떤 체위로 관계를 가졌는지, 몇 번의 절정에 오르고 기절했는지, 놀라울 정도로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 대체 누가, 어째서 이런 짓을 한 거지? ’

정오 미사는 일과지만 허투루 준비하는 일이 없었다. 사제들은 오전 회의가 끝난 후부터 정오 미사가 시작되기 전까지 내내 미사의 준비를 해야 했다.

강연대에 성서를 놓는 것은 수습사제의 일이나 그들이 실수로 성서 대신 전대 대신관의 일기를 놓아둘 리는 없었다. 오늘 낭독할 부분을 찾아 펼쳐야 하기 때문이다.

낭독용 성서와 전대 대신관의 일기는 표지도 두께도 다른데다, 긴장으로 실수했다 한들 페이지를 펼치기 위해 내용을 보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러니 수습사제들로 하여금 성서 대신 전대 대신관의 일기, 그것도 사제가 성녀를 범하는 구절이 적힌 부분을 펼쳐놓도록 지시한 사람은 수습사제의 행동을 강제할 수 있는, 그들보다 훨씬 지위가 높은 사제일 것이다.

오늘 아리스텔라가 성서 낭독을 한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 장난을 치는 거라고도 생각할 수 없었다.

성녀 아리스텔라는 여신 위그멘타르의 현신이었다. 이 신전의 주인이며, 이 자리에 모여 있는 사제와 성기사가 한평생 섬겨야 할 존재였다.

‘ 나를 시험하려는 거야. ’

예상치 못한 상황 속에 상대를 밀어 넣어 모욕하고, 당사자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뒤에 숨어서 지켜본다니, 신을 모시는 이들이 선택한 방법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치졸했다.

아리스텔라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주먹을 꼭 쥐었다. 수치와 분노를 느낀 그녀의 어깨가 저절로 파르르 떨렸다.

지금 당장 소리를 지르며 그녀를 모욕한 이를 색출하라 화를 내야 할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이 외설스러운 내용을 낭독해야 할까.

오늘 낭독할 성서의 내용을 외워두었더라면 차라리 좋았을 것을, 아쉽게도 아리스텔라의 기억력은 히페리온처럼 좋지는 않았다. 대강의 내용은 기억하지만, 성서를 줄줄 읊을 정도로 문장 하나하나를 암기해둔 것은 아니었다.

“ 이야기를 하나 할까요. ”

아리스텔라는 전대 대신관의 일기를 덮었다. 허리를 곧게 펴고 고개를 들었다.

성서를 낭독해야 할 성녀가 성서를 덮고―물론 그것은 성서가 아니었지만―예상치 못한 태도를 보이자 사제들과 성기사들의 표정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

평범한 시골 농가에서 태어나, 평범하게 자랐다.

아버지가 일찍이 집을 나가는 바람에 어머니와 어린 남동생을 돌봐야 하는 생활은 고되었지만, 제가 특별히 불행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부모 중 한쪽이 없는 집은 많았다. 아이를 낳다가 죽기도 하고, 일을 하다가 사고로, 병으로 죽기도 했다. 혹은 세금을 내지 못해 가정을 버리고 야반도주를 하는 일도 있었다.

술을 마시고 아이들에게 매질을 하는, 차라리 집을 나가는 게 더 나을 듯한 부모도 있었다. 반대로 패륜을 저지르는 자식도 있었다. 그러니 아리스텔라 자신이 그 마을에서 특출 날 정도로 불행한 존재는 아니었다.

“ 평범하게 운명에 순응하고, 평범하게 가진 것에 만족하며 살았습니다. ”

분수를 알아라.

가진 것에 만족하라.

그것이 분명 성서가 전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제 분수를 넘는 행위를 하는 것을 교만으로 판단한 신은 인간에게 벌을 내렸다.

“ 그러나 신께서는 운명에 순응하는 자에게 축복을 내려주시지 않고, 더 큰 시련을 주셨지요. ”

아리스텔라는 부귀영화를 바라지 않았다.

귀족의 눈에 들어 신분이 상승하기를 바라지도 않았고, 어느 날 갑자기 다락에서 큰 공훈을 세울만한 비전이 발견되기를 바라지도 않았고, 집 앞마당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금괴가 발견되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하루하루 일해서 먹고살며, 동생이 자라 어른이 되면 자신도 적당히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평범하게 살다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상은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했는가.

집 떠난 아버지가 빚쟁이들을 달고 와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고 처녀만 찾는다는 나이 든 영주에게 팔려갈 뻔했다. 그마저도 가는 길 도중 산장에서 무뢰배들에게 온갖 희롱을 당했다.

자신을 구해준 로이드로부터 그녀가 성녀라는 것을 알게 되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 신전으로 왔다.

폐쇄된 신전, 낯선 사람들.

그래도 제 운명에 저항하려 하지 않고, 이곳에서 평생 조용하게 살다 가리라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그녀의 몸에 봉인된 여신은 음욕의 여신이었다.

아리스텔라가 아무리 조용히 살려 해도, 눈에 띄지 않고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 해도, 제 안의 여신이 날뛰면 욕망을 참을 수 없어진다. 발정이 난 짐승도 그처럼 시도 때도 없이 남자와 섹스하고 싶은 기분이 들지는 않을 것이다.

저절로 욕구가 일었다. 참으려 하면 의식을 잃었다. 깨어난 후에는 몸에 정사의 흔적이 가득 남아 있었다. 괴롭고 비참했다.

처음 죽음을 결심했을 때, 그대로 죽어버렸더라면. 그랬으면 편해졌을까.

히페리온의 위로를 받고 제 안의 여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아무 때나 성욕이 이는 것을 막기 위해 스스로 남자와 성관계를 가졌다. 자신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남자와의 섹스는 그렇게 무섭거나 힘들지는 않았다.

아리스텔라는 조금씩 섹스의 기쁨을 알아갔다. 쾌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사랑을 나누는 행위는 육체의 쾌락 외에도 그녀의 마음을 충만하게 해주었다.

이대로라면 제 안의 욕구를 컨트롤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성녀가 자신을 따르는 사제와 성기사와 성관계를 가진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알릴 수는 없었다.

위그멘타르가 음욕의 여신이라는 것을 아는 이들은 이 신전 안에도 많지 않았다. 그들은 성녀가 타락하여, 남자와 잠자리를 가지는 것을 합리화하려 변명을 하는 것이라고 여길 것이다.

시련이 닥쳤을 때 해답을 찾아 버텨내면, 신이 내린 운명에 순응하는 인간에게 복이 주어져야 할 터인데, 시련을 견뎌내면 또 다른 시련이 주어졌다. 계속해서 시험이 이어졌다.

지금 이 자리에서, 전대 성녀의 음행을 기록한 것을 펼쳐놓고 아리스텔라의 반응을 숨어서 지켜보고 있는 자들처럼.

시련이 반복되면, 마음속에 미혹이 커진다.

이 시련을 견디어 내면 다음에는 또 어떤 시련이 이어질까.

“ 처음에는 판자 하나에 의지하여 망망대해를 홀로 헤엄쳐 건너는 것 같았습니다. 막막해서 눈앞이 흐려졌지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

아리스텔라의 곁에는 히페리온이 있었고, 조슈아가 있었고, 케인과 이자크가 있었다. 크리스도 위급한 상황에서는 분명 사제들보다 그녀의 편을 들어줄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 없는 로이드는, 그야말로 그녀가 부른다면 가장 먼저 검을 뽑아들고 달려올 자다.

“ 제 곁을 지켜주는 분들이 계셨기에, 이 시련을 모두 감내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의 몸으로 여신을 품고, 그분의 현신으로서 한평생 살아야 하는 이 운명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

“ 성녀님. ”

아론이 부르는 목소리에 아리스텔라의 말이 끊어졌다.

의아해 하면서도 진지한 표정으로 아리스텔라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던 사제와 성기사들의 시선도 아론을 향했다.

“ 지금은 성서를 낭독하는 시간입니다. 강론은 성서의 낭독과 감사 기도를 마친 뒤에 하시지요. ”

아론은 무뚝뚝한 얼굴로 아리스텔라의 행동을 지적했다.

대미사 때는 성녀의 몸 상태를 염려한 히페리온이 의례 순서를 바꾸어 버렸지만, 몇 가지 예식이 생략되었을 뿐 전혀 생뚱맞은 일을 벌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리스텔라의 강론은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

즉, 지금 그녀는 미사와는 전혀 관계없는 말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성녀의 의사는 사제의 계율보다 우위에 존재한다.

그것은 성녀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미사에 빠지거나, 장시간 성서를 공부하면 쉬이 지쳐 흥미를 잃게 되니 천천히 수업 시간을 늘려 가는 상식적인 선의 이야기였다. 이런 식으로 미사 예식을 멋대로 무시해도 좋다는 뜻은 아니었다.

“ 아무리 성녀님이라 한들, 미사 예식을 마음대로 바꾸시면 곤란합니다. ”

아론의 말에 사제들의 표정이 난처하게 바뀌었다.

실로 성녀의 행동은 미사 예식을 무시한 것이었다. 그러니 지적받아 마땅하긴 했다.

‘ 하지만, 그것은 나중에 따로 알현하여 조언을 드릴 일이지 지금 이 자리에서 지적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

‘ 아닙니다. 성녀님의 잘못을 곧바로 지적하여 올바른 길로 이끌어드리는 것이 저희 사제들의 일이 아닙니까. ’

사제들이 불안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속닥거리는 것이 귀에 들어왔다.

쿵쿵 뛰는 가슴을 어떻게든 진정시키기 위해, 아리스텔라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호흡을 가다듬고, 아론을 향해 입꼬리를 당겨 웃어 보였다.

“ 아론 신관님. 성서 낭독은 신의 말씀을 전하는 시간이랍니다. ”

아리스텔라는 단상 위의 히페리온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조슈아와 노엘, 크리스를 바라보았다. 성기사들이 서있는 자리에는 케인과 이자크가 보인다.

아리스텔라가 의지하는 이들이지만, 그들의 역할은 성녀의 곁에서 몸을 보호하고 마음을 위로해주는 것이다. 닥쳐오는 시련을 막아내 주지는 못했다.

제게 닥친 시련은 오롯이 제가 해결해야 할 일이다. 혼자 해결하기 어려운 일에 도움을 요청할 수는 있어도, 저 대신 해결해달라며 뒤로 숨을 수는 없었다.

아리스텔라는 여신의 현신이며, 이 신전의 주인이고,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에게 경배를 받아야 할 존재였기에.

“ 신전의 성녀는, 여신의 현신. ”

강연대에서 한 발짝 물러난 아리스텔라는 단상 앞으로 나아갔다. 저를 우러러보는 이들을 향해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제가 당신들에게 이야기하는 시간이에요. ”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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