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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받는 성녀
[139] 시험받는 성녀
“ 으응, 읏, 아아……. ”
기분 좋은 쾌감에 나른한 숨을 흘리면서, 아리스텔라는 손을 뻗어 아론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히페리온과 마찬가지로 검은 머리인데, 아론의 머리카락은 굵고 뻣뻣했다. 마치 그의 성격을 대변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허리를 흔들었다.
촉촉한 혀가 클리토리스를 부드럽게 감싸며 빨아들이고, 긴 손가락이 마치 건반을 연주하는 것처럼 부드럽게 휘어졌다가 빙글 돌아갔다.
“ 아으응! ”
“ 이곳인가 보군요. ”
“ 아, 아, 아아아……! ”
손가락만으로 이렇게 쾌감을 느껴본 것은 처음이었다. 아리스텔라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높아져만 가는 교성에 당황하면서도, 제 안을 누비는 남자의 손가락을 속살로 조였다. 이대로 몇 번이나 가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 하응, 아……읍. ”
문득, 부드러운 것이 아리스텔라의 입술을 덮었다.
아론의 입술일까?
아니, 그것은 분명 그녀가 기억하고 있는 달콤한 입맞춤이었다.
촉촉한 입술을 부비며 간지럽게 입가를 핥고, 마치 사탕을 빨듯이 느릿하게 빨아들이는 다정한 입맞춤.
아리스텔라는 이런 식으로 키스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이런 식으로 입맞춤을 해주는 남자는, 단 한명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깊은 물속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무겁게 몸을 압박하던 것이 사라졌다. 음부에서부터 기어올라 몸 안을 간질이는 아슬아슬한 쾌감에 초조했던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아 간다.
속살을 비비면서 왕복하던 단단한 손가락도, 잔뜩 흥분해서 부풀어 오른 클리토리스를 핥아주던 혀놀림도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아리스텔라는 허리를 흔드는 대신 입술과 혀를 움직여 제게 키스하는 남자의 입술을 핥았다. 나른하던 몸이 조금 개운해졌다.
“ 으응, 으으응……. ”
“ 후우……. ”
겹쳐진 입술 사이로 달콤한 한숨이 오갔다. 뭔가 머릿속이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무거웠던 눈꺼풀이 저절로 올라갔다. 자신을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가 보였다.
“ 응, 히페리온……. 대신관님……. ”
자고 있던 그녀에게 키스하던 것은 히페리온이었다. 어째서 그가 이곳에 있는 것일까. 아리스텔라는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히페리온은 안도한 듯 한숨을 내쉬고는, 타액으로 젖어 붉어진 입술을 손등으로 닦았다. 천천히 일어난 그는 제 뒤에 서있던 조슈아를 향해 보고했다.
“ 성녀님께서 깨어나셨습니다. 조슈아 신관. ”
히페리온이 조슈아의 이름을 부르자, 아리스텔라는 화들짝 놀라 이불을 끌어당겼다. 히페리온과 키스하는 모습을 조슈아가 보고 있었단 말인가.
침대의 차양이 걷히고 조슈아가 들어오자, 아리스텔라는 이불로 입가를 가린 채로 눈만 깜박거렸다.
“ 계속 깨어나지 않으셔서 걱정했습니다, 성녀님. 불편하신 곳은 없으십니까? ”
“ 네, 네에……. ”
아리스텔라의 어설픈 대답에 조슈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히페리온과 키스한 것 때문일까. 아리스텔라는 당황한 듯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대저 히페리온이 왜 자신의 방에 와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고, 어째서 그녀에게 키스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콩닥거리는 가슴을 어떻게든 진정시키려고 천천히 숨을 내쉬는데, 조슈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 성녀님의 신성력이 오염되어 있었습니다. ”
“ 네? 오염……이요? ”
“ 분명 성녀님의 신성력은 이 신전에서 가장 풍부하고 정순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통제하는 <막>은 불완전하지요. ”
당대의 처녀들 가운데 가장 신성력이 강한 여인이 성녀가 된다. 아리스텔라의 신성력의 총량 자체는 분명 대신관 히페리온보다도 한 수 위였다. 그러나 그녀는 제 신성력을 운용하는 방법을 몰랐다. 신성 마법은 이제 겨우 초급을 떼었을 뿐이다.
대개 신성력이 뛰어난 자들은 어려서 사제가 되기에 제 신성력을 운용하고 보호하는 방법을 함께 배운다. 신성력은 깨끗한 물과도 같았다. 그것을 어디로 어떻게 흘려보내느냐에 따라 비가 되기도 하고 폭포가 되기도 한다. 그것이 신성력의 운용이었다.
다른 하나는 신성력의 보존이다. 물이 깨끗하면 깨끗할수록, 아주 조금만 오염되어도 금세 신성력은 흐트러진다. 총량이 많으면 많을수록 위험했다. 신성력이 적은 자는 다소 오염되어도 금방 정화할 수 있지만, 풍부한 신성력을 가진 자의 신성력이 오염되면 어지간한 정화술로는 원래의 깨끗함을 되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침에 성녀를 깨우기 위해 방문한 조슈아는 아리스텔라의 모습이 심상치 않은 것을 느끼고 상태를 살폈다. 단순한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치 저주라도 받은 것처럼, 그녀로부터 흘러나오는 신성력에 부정한 기운이 섞여 나왔다.
자신의 깨끗한 신성력을 상대의 몸에 흘려보내고, 상대의 오염된 신성력을 제 안으로 빨아들여 정화한다. 그것이 통상의 치유술이었다.
조슈아는 신관으로 평사제 이상의 신성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그로서도 성녀의 신성력을 정화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궁여지책으로 조슈아는 대신관 히페리온을 불렀다. 성녀를 제외하면, 이 신전에서 가장 정순하고 풍부한 신성력을 지닌 남자였기 때문이다.
히페리온은 천천히 숨을 고르며 제 안에 흘러든 아리스텔라의 신성력을 갈무리했다. 그리고는 신성력을 오염시키는 근원을 찾아 하나하나 정화했다. 강력하지는 않지만, 제법 피곤한 일이었다.
“ 제 신성력이 오염되어 있었다고요? 어째서……. ”
“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녀님의 신성력이 보통 사제들의 것을 아득히 웃도는 만큼, 약간만 오염되더라도 그 피해가 막심하지요. ”
“ 어제는 분명 무리하지 않고 일찍 잤는데……. 아, 새! ”
“ 새요? ”
“ 어젯밤 작은 새가 제 방에 날아들었거든요. 주인을 찾아줘야 하는데……. ”
아리스텔라는 테이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옆으로 세워둔 바구니와 밑에 깔린 수건, 손잡이를 펼쳐 걸어둔 홰는 그대로였다.
하지만 새는 보이지 않았다.
“ 없네……. 조슈아가 주인을 찾아준 건가요? ”
“ 제가 이 방에 들어왔을 때, 새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만. ”
“ 그래요? ”
아리스텔라는 고개를 돌려 창가를 바라보았다. 창문이 약간 열려 있었다. 밤새 이곳에서 날개를 쉬다가 새벽에 잠에서 깨어 날아간 걸지도 모른다.
주인의 품으로 돌아가면 좋을 텐데.
아리스텔라는 살짝 결리는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 걱정 끼쳐서 미안해요, 조슈아. ”
“ 아닙니다. 성녀님께서 무사히 깨어나셔서 다행입니다. ”
“ 정화해주셔서 감사해요, 대신관님. ”
“ 성녀님을 보필하는 것이 제 의무입니다. ”
히페리온은 아리스텔라를 향해 살며시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돌렸다.
“ 하지만, 저……. 그, 아침부터, 저 때문에 고생하셨잖아요. ”
“ 아닙니다. ”
사실 신성력으로 치료를 하는데 입맞춤을 할 이유는 없었다. 가슴이나 이마에 손을 대고 제 신성력을 불어넣으며 성녀의 신성력을 흡수했으면 됐을 일이다.
그러나 아리스텔라는 악몽을 꾸는 것 같았다. 로이드에게 강제로 안긴 날도 그러했다. 잔뜩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마치 남자에게 안겨 쾌감을 느끼는 것처럼 달콤한 신음을 흘리며 허리를 흔들었다.
괴로워하는 그녀를 달래주려는 의도도 있었다. 지하에서 벽화에 빨려 들어가, 거울의 방에 갇혔을 때의 그녀는 히페리온이 키스해주자 곧 안정되었으니까.
하지만 히페리온이 아리스텔라에게 키스한 것은 단지 그 이유만이 아니었다.
꿈속에서 그녀와 섹스하는 남자를 지워버리고 싶었다. 어차피 누군가에게 안겨야 하는 꿈이라면, 차라리 자신을 떠올리길 바랐다. 악몽으로 괴로워하는 그녀를 보고도 이기적인 욕망을 떠올린 자신에게 히페리온은 환멸을 느꼈다. 그런데도 멈출 수가 없었다.
‘ 어째서 욕심은 가질수록 더욱 커지는 걸까. ’
처음은 아리스텔라를 멀리서 바라보는 것으로 좋았다. 다음은 하룻밤 안는 것으로 좋았다. 그 다음은 온종일 그녀의 곁에서 함께하며 그녀의 웃는 얼굴을 기억에 새기는 것으로 좋았다. 그날 밤은 제 의무를 잊어버리고 사랑하는 여인을 마음대로 안았다. 울다 지쳐 기절할 때까지.
사랑이란 지엄하며 아름다운 것이어야 할 텐데, 제가 가진 욕망은 추하고 더럽기 짝이 없다. 다른 남자에게 범해지는 꿈을 꾸며 괴로워하는 아리스텔라를 걱정하고 슬퍼해야 할 텐데, 히페리온은 꿈속에서 그녀를 안는 남자에게 질투가 났다.
“ 성녀님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했습니다. 이 신전 안에서 성녀님을 안전하게 모시는 것이 제 책임인데……. ”
“ 대신관님? 저는 이제 괜찮아요, 정말로. ”
“ 죄송합니다. 신전 내부를 정비해야겠습니다. 성녀님께서는 오늘 하루 푹 쉬시지요. ”
“ 정말로 괜찮다니까요? 정오 미사에도 참석할 거예요. ”
아직 조금 나른하긴 하지만, 악몽을 꾼 때문일 것이다. 오염되었다는 신성력은 히페리온이 정화해주지 않았나. 몸이 불편한 것도 아니었고 기분이 우울한 것도 아니었다. 아리스텔라는 조슈아의 손을 잡았다.
“ 대신관님께서 일하실 동안 저도 얼른 준비를 마칠게요. 조슈아. 아침 준비를 도와주세요. ”
“ 예, 성녀님. ”
조슈아는 한손으로 성녀의 손을 잡고, 다른 한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그녀를 욕실로 안내하며 조슈아는 히페리온을 향해 미소 지었다.
“ 바쁜 걸음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히페리온 대신관. 정오 미사 때 뵙지요. ”
형식적인 인사보다 조금 더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조슈아는 히페리온에게 감사를 담아 말했지만 히페리온은 그의 감사 인사가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히페리온이 정화를 핑계로 아리스텔라의 입술을 탐하는 모습을 봐 놓고도 저 남자는 참으로 태연하기만 했다. 그것이 성녀에 대한 마음의 여유를 의미하는 것 같아서, 히페리온은 속이 상했다.
“ 정오미사 때 뵙겠습니다. ”
두 사람을 향해 인사하고 히페리온도 몸을 돌려 성녀의 방을 나왔다.
정화는 무사히 성공했고, 성녀도 깨어났다. 다시 접촉하는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던 그녀와 입을 맞췄다. 감사 인사도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이 무거웠다.
‘ 설마 내 신성력도 오염되어버린 것은 아니겠지. ’
히페리온은 우울한 얼굴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 ◆ ◇ ◆ ◇
정오 미사는 예식의 시작을 알리는 성가가 끝나면, 대신관 히페리온의 주도로 신에게 바치는 기도가 이어진다. 그 다음은 그날의 기도에 준하는 내용을 발췌한 성서를 낭독하게 된다.
대신관 히페리온은 단상의 중앙에, 아론은 그의 오른쪽 뒤편에 선다. 아리스텔라는 두 사람으로부터 조금 떨어져 왼쪽 뒤편에 서있다가, 기도를 받을 때만 앞으로 나아갔다. 조슈아는 왼쪽 끝, 노엘은 오른쪽 끝, 크리스는 단상 아래에 서서 미사를 본다.
히페리온이 기도를 마치고 눈짓을 하자, 수습사제 둘이 오른쪽의 강연대에 오늘 낭독할 성서의 페이지를 펼치고 물러났다. 본래 미사 때 성서에 적힌 신의 말씀을 낭독하는 것은 신관들의 일이나, 오늘은 아리스텔라가 대신하여 낭독을 하게 되었다.
‘ 내 차례구나. ’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성서의 내용을 그냥 읽기만 하면 되니까. 혹시라도 어려운 단어가 나와 머뭇거리지 않도록 미리 여러 번 읽어두었다.
오늘 낭독할 성서의 내용은 농작물을 수확한 농부가 신께 감사하는 제사를 올린 일로 은총을 받은 이야기였다. 추수가 끝난 지금 시점에 어울리는 내용이다.
아리스텔라는 히페리온의 뒤로 돌아가 오른 편의 강연대로 걸어갔다. 강연대 위에는 두꺼운 성서가 펼쳐져 있었다.
떨지 않고 또렷한 목소리로 낭독할 수 있도록, 아리스텔라는 침을 꼴깍 삼키고 강연대 앞에 서서 사제와 성기사들을 향해 목례했다.
“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
자신을 바라보는 칠십여 명의 남자들을 향해 가볍게 미소 지은 후, 아리스텔라는 성서를 낭독하기 위해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강연대 위에 펼쳐져 있던 것은 성서가 아니었다.
‘ 전대 대신관의 일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