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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전야
[137]
“ 성녀님과 저의 관계를, 아론 신관이 의심하고 있습니다. ”
“ 네, 네? 아론이요? ”
조슈아의 입에서 흘러나온 뜻밖의 이름에 아리스텔라가 몸을 움츠렸다.
조슈아와 히페리온을 비롯하여 친밀해진 사제가 있긴 하지만, 아직도 아리스텔라에게 사제들은 대부분 대하기 어려웠다. 케인의 명령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성기사와는 달리, 사제들은 히페리온의 명령을 충실히 따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도 사제 간의 서열은 성기사들의 그것과는 성격이 다른 탓이리라. 그 중에서도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이 아론의 존재였다.
“ 아론은 사실, 사제들 사이에서는 대신관님 이상으로 영향력이 강한 사람입니다. 척을 져서 좋을 것이 없습니다. ”
“ 척을 지다뇨……. 저는 아론을 나쁘게 대한 적이 없어요. ”
“ 성기사를 기피하는 사제 무리를 이끄는 것은, 아론이니까요. ”
사제 무리를 이끄는 것이 아론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아리스텔라는 처음 로이드에게 강제로 안겼던 밤 꾸었던 악몽이 떠올랐다.
처음 꿈속에서 < 정화의 의식 >을 경험했을 때, 그녀를 범한 것은 전부 모르는 사제들이었다. 어쩌면 전대 성녀를 섬기던 사제들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 악몽의 끝에 등장한 것이 아론이라는 점이다. 꿈속에서 아리스텔라는 아론에게 몸을 내맡긴 채 절정에 올랐다. 꿈속에서도 몇 번이나 정신을 잃을 만큼 지극한 쾌락을 느꼈다.
하지만 그때의 아론은 무척 괴로워하는 얼굴이었다.
한 번도 몸을 섞은 적 없는 남자에게 안기는 꿈을 꾸다니, 그때는 그것이 완전히 악몽이라 생각해 흘려 넘겼다. 그러나 지하에서 아론을 닮은 남자에게 범해진 후로 생각이 달라졌다.
케인조차도 성녀의 색향에 홀려 그녀를 범하고 말았다고 실토했다. 조슈아는 아리스텔라의 말에는 사제와 성기사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어, 그녀가 명령을 내리면 본능적으로 거절할 수 없게 된다고 설명했다.
아론만이 달랐다.
‘ 내 목욕 시중을 들 때, 아론은 흥분하지 않았어. ’
그는 아리스텔라를 범하지 않았다. 욕실 안에서 아리스텔라는 아론의 손가락에 분명 절정을 느꼈는데도, 그의 모습은 어디까지나 태연했다. 욕구를 참는 것 같지도 않았다.
‘ 아론은……. 성녀의 음욕에 영향을 받지 않는 걸까? ’
이 신전의 모든 이들은 성녀의 권속이었다. 대대로 사제들이 성녀를 범했던 것 또한 여신의 음욕에 이끌렸기 때문이다.
그 방법이 정화의 의식이라는 강제적인 형태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비극이었을 뿐, 사제와 성기사가 음욕의 여신을 품은 성녀에게 욕정하는 것 자체는 무척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어째서 그만이 다를까. 아리스텔라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 조슈아. 그럼 저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
“ 당분간은 크게 눈에 띄지 않는 행동을 하는 것 정도로 괜찮을 겁니다. ”
“ 그럴까요……. ”
아론을 찾아가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괜찮은 걸까. 사제들이 이제까지 차지하고 있던 특권을 조금만 성기사에게 양보해달라고, 대신 사제들이 서운해 하지 않도록 자신이 노력하겠다고 달래고 싶다.
‘ 그 아론을 달랜다니 나도 참 이상한 생각을 하네. ’
성기사와는 다른 의미로 강인한 남자다. 크리스처럼 그녀의 위로가 필요한 존재는 아닐 터인데.
아리스텔라가 살며시 기대자 조슈아는 그녀의 어깨를 안았다.
홀을 지나 계단을 올라 복도를 걸으며, 아리스텔라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 ◆ ◇ ◆ ◇
방으로 돌아온 아리스텔라는 목욕을 마치고, 내일 아침에 깨우러 와달라는 말을 조슈아에게 전하고는 그를 돌려보냈다. 성기사들의 저녁 훈련을 보러가지 않은 탓일까, 어둑어둑하긴 해도 잠들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 환기라도 좀 시킬까. ”
성녀의 방은 마력석을 통해 언제나 최적의 온도와 청정한 공기를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환기는 불필요했으나, 그냥 잠들기 아쉬웠던 아리스텔라는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열었다.
“ 후우~! ”
시원한 바람이 얼굴에 닿았다. 기지개를 켜고 눈을 뜨니, 붉은 하늘과 남색의 하늘이 자연스럽게 섞이면서 만들어내는 오묘한 하늘의 빛깔이 눈에 들어왔다. 아름다웠다.
한쪽 끝에서 구름이 흘러가는 모습과 별이 반짝이는 모습을 천천히 살피고 있는데, 어디선가 푸드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 응? ”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아리스텔라는 창틀에 얹은 제 손 옆에 앉아있는 하얀 새를 발견했다.
“ 어머나……. ”
이 신전에 온 뒤로 처음 보는 동물이었다. 작고 하얀 새는 아리스텔라가 빤히 쳐다보는데도 도망가지 않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 귀엽네. 넌 이름이 뭐니? ”
새가 알아듣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아리스텔라는 말을 걸었다. 동물을 만나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예기치 못한 손님이라 더욱 반가웠다.
“ 어디서 왔어? 먹이를 찾으러 온 거야? ”
아리스텔라의 질문에 새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촉촉한 발바닥을 그녀의 손바닥 위에 얹었다. 고향에 있을 때도 새를 많이 보긴 했지만, 이 정도로 사람을 잘 따르는 새는 본 적이 없다.
‘ 누군가 키우던 새일까? ’
털 빛깔도 곱고 깨끗한 것이 야생동물 같지는 않았다. 아리스텔라가 천천히 손을 가슴께로 올려도 새는 얌전히 앉아있었다. 그녀가 손을 뒤집으려 하자, 파드득 날아서 손바닥 위에 안착했다.
“ 후후후. 귀여워라. ”
제 손바닥 위에 앉아 날갯짓하는 하얀 새를 살살 쓰다듬으며 아리스텔라가 미소 지었다.
새의 깃털은 놀랄 만큼 부드러웠다. 노엘이 만든 빛의 구슬도 보들보들했는데, 확실히 이쪽은 살아있는 새라서 그런가, 손끝에서 따스한 체온과 두근거리는 맥박이 느껴져 느낌이 달랐다.
하얀 새는 아리스텔라가 쓰다듬어주는 것이 기분 좋은지 새까만 눈을 깜박이다가 가볍게 삐―하고 우는 소리를 냈다.
“ 배가 고픈 거니? 음, 차를 마실 때 먹고 남은 빵이 있을 텐데……. ”
새를 어깨에 태운 채, 아리스텔라는 침대 맡의 간이 테이블로 걸어갔다.
테이블이 놓인 벽 쪽의 선반 위에는 예쁜 레이스 커버로 덮인 빵 바구니가 있다. 그 안에는 빵과 쿠키가 조금 들어있었다. 점심에 조슈아와 차를 마실 때 남긴 다과를 내놓지 않고 덮어 남겨둔 것이다.
“ 딱딱하지 않으려나? ”
아리스텔라가 손끝으로 빵을 집어 눌러보았지만 구운지 오래되었는데도 빵은 아직 보드라웠다.
음식이 쉽게 식거나 상하지 않는 것도 신전의 특수한 공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것을 만든 요리장이 엄청난 실력자이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마침 잘 되었다고 아리스텔라는 생각했다.
빵을 잘게 찢어 테이블에 놓아주자, 새는 어깨에서 내려와 그것을 쪼아 먹었다.
“ 맛있니? 잘 먹네. ”
아리스텔라는 의자에 앉아 테이블 위에서 새가 빵을 쪼아 먹는 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신전은 넓고 황량하기만 했고, 넓은 정원에는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곳에서 동물을 보는 것은 처음이다.
‘ 누가 키우던 것일까? 신전 안의 누군가가……. ’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니 아무리 신전이 폐쇄되어 있다 한들 하늘은 어디로든 통하는 곳이었다. 결계가 둘러져 있다고는 하지만, 새들은 이곳까지 날아들 수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신전 밖의 사람이 키우던 새일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다.
‘ 하지만 만약 신전 밖 사람이 키우던 거라면 돌려주기 난감해지는데. ’
신전 밖으로는 나갈 수 없는데 주인을 찾아줄 수 있을까. 난감해하는 아리스텔라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새는 열심히 빵 부스러기를 쪼아먹고 있었다.
“ 하긴, 너는 날개가 있으니 어디로든 날아갈 수 있겠구나. ”
새는 이렇게 작은데도 날개가 있어 하늘을 훨훨 날아갈 수 있다. 똑같이 하얀 옷을 입고 있는데도 그녀에게는 날개도 없고, 자유롭게 밖으로 나갈 수도 없다. 제 처지를 새삼 떠올린 아리스텔라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평생 빠져나갈 수 없는 폐쇄된 신전. 성녀로서 이곳에 갇혀 살아야 하는 것을 제외하면, 사실 생활에 불편함은 없었다.
고향에 있을 때처럼 일하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잡초를 뽑고 호미질을 하고, 추수한 작물을 수레에 실어 나르고, 닭 모이를 주고 마구간을 청소하는 일은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뿐인가, 그녀가 입는 성의는 사제들이 지어준 것이니 옷을 지어 입을 필요가 없었고 그녀가 먹는 식사는 요리장이 만드는 것이니 채소를 다듬고 불을 지피고 설거지를 할 필요도 없었다.
신전 안에서 지내야 한다는 것 이외에는 누구도 아리스텔라에게 이것을 해라, 저것을 해라 강요하거나 몰아세우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 목욕을 하고 정오 미사에 참석하는 것 정도가 유일한 성녀로서의 역할일까.
신성 마법을 배우는 것도 아리스텔라가 직접 요청한 것이고, 성기사들의 저녁 훈련을 참관하는 것 또한 그녀가 기분 전환을 위해 선택한 스케줄이었다.
‘ 분명 생활은 편한데, 뭐라고 해야 할까…….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지내도 되는 걸까. ’
겉으로는 성녀로서 사제와 성기사들에게 축복을 내리고 기도하는 성녀로서의 삶을 살면서, 음욕의 여신을 통제하기 위해 성욕이 일 때면 비밀히 남자와 잠자리를 가진다.
처음에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행위가 어느새 익숙해졌다.
처음엔 조슈아, 그 다음에는 케인, 크리스, 로이드, 이자크, 히페리온에 노엘까지. 게다가 집행관으로서 신전을 방문한 클로비스와도 관계를 가져버렸다.
아무리 음욕의 여신을 품은 몸이라 한들 대외적으로 성녀는 신성하고 순결한 존재일진데, 이런 생활이 반복된다면 언젠가 그녀의 음란한 사생활을 다른 사제나 성기사들도 알게 되지 않을까. 아리스텔라는 그것이 걱정스러웠다.
‘ 만약 내 안의 여신 위그멘타르가 음욕의 여신이라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믿지 않는다면……. ’
어쩌면 다른 사람들은 설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리스텔라는 아론의 얼굴을 떠올린 순간 오싹해져서 무심코 어깨를 떨었다.
아론은 사제들 사이에서 인망이 높다고 조슈아가 말했다. 아론이 믿지 않는다고 한다면, 사제들을 이끌고 꿈속에서처럼 아리스텔라를 재판하려 들 수도 있다. 남자와 성관계를 가진 것은 사실이니 처벌을 받을 지도 모른다.
만약 아리스텔라가 전대 성녀들처럼 타락한 성녀로 내몰려, 정화의 의식을 받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 절대로 싫어. ’
이제까지의 다른 성녀들처럼 기절할 때까지 남자에게 범해지는 정화의 의식 같은 것은 결코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수많은 남자에게 범해지면서 진심으로 쾌락을 느끼고 기뻐하는, 그런 여자는 되고 싶지 않았다.
비록 몇 명이나 되는 남자와 몸을 섞었다고는 하나 아리스텔라는 정욕에 지배당하는 인간이 되고 싶지 않았다. 허울 좋은 명분일지언정 그런 관계는 사랑하는 사람과 단둘이 나누고 싶었다.
비록 그 사랑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은 아닐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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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 138화 연참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