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금된 성녀와 비밀의 밤-136화 (136/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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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전야

[136] 태풍 전야

“ 죄송합니다. ”

“ 죄송합니다. ”

노엘과 크리스가 관리 사제 마르코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마르코는 엉망이 된 온실을 보고 울상을 지었다.

“ 이게, 대체……. ”

꽃의 방은 본래 관리인인 마르코 외의 사람은 출입이 불가능한 곳이었다. 성녀에게 신성 마법을 가르치는 노엘이 수업을 위해 필요하다기에 개방해 주었더니만, 하루도 안 되어서 온실이 엉망이 되어버렸다.

화분은 엎어지고 깨지고,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야 할 꽃들이 마치 향기에 취해 질펀하게 놀아나다가 지쳐 곯아떨어진 것처럼 여기저기에 드러누워 있었다.

“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

“ 죄송합니다. 저희가 정리하겠습니다! ”

“ 꽃의 취급 방법은 알고 계십니까? 깨진 화분을 갈아야 하는데, 어느 흙이 필요하고, 화분의 물받이는 어떤 종류의 것을 놓아야 하는지, 같이 두어선 안 되는 꽃이 어떤 것인지, 햇볕을 가리지 않도록 늘어놓으려면 어느 자리에 두어야 하는지 아십니까? 모른다면 함부로 돕는다고 말씀하지 마세요! ”

화가 난 마르코가 다다다다 쏘아붙였다. 노엘과 크리스는 아무소리도 못하고 입을 꾹 다문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노엘의 길게 땋아 내린 고수머리도 마치 풀죽은 강아지의 꼬리마냥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두 사람에게 화가 났음에도 마르코에게 혼나는 모습을 보니 아리스텔라는 마음이 좋지 않았다. 애초에 이 온실을 어지럽힌 것은 아리스텔라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과도하게 신성력을 불어넣은 탓에 거대해진 나팔꽃 덩굴이 온실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노엘과 크리스가 그녀에게 엄한 짓을 한 것은 그 상황을 수습한 이후였으니, 엄밀히 말하자면 마르코에게 혼나야 할 사람은 노엘과 크리스가 아니라 아리스텔라 쪽이었다.

“ 미안해요, 마르코. 온실이 이렇게 된 건 두 사람의 잘못이 아니에요. ”

“ 성녀님? ”

“ 제가 마법 훈련을 하다가 신성력을 과도하게 불어넣은 탓에 나팔꽃이 거대해져서……. 다른 꽃들까지 엉망이 되어버렸어요. ”

“ 아, 아닙니다. 성녀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

이 온실에 꽃의 방을 만든 이유는 미사에 쓸 꽃을 준비하기 위해서였고, 그 미사란 여신의 현신인 성녀를 찬양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니 이 온실 안의 꽃을 어떻게 하든 그것은 성녀의 마음이었다. 꽃을 전부 불태우고 새로운 꽃을 구해 와서 채우라고 명령해도 그들은 당연히 그렇게 해야만 했다.

이 신전 안에서, 성녀는 인간이 아닌 <신>이었기에.

“ 성녀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더는 문제 삼지 않겠습니다. 청소를 해야 하니 이만 나가주시죠. ”

“ 저 때문에 온실이 엉망이 되어 버렸는걸요. 청소를 도울게요. ”

“ 아닙니다. 성녀님께 어찌 그런……. ”

“ 돕게 해주세요. ”

아리스텔라에게 이 신전은 자신의 집이나 마찬가지이니, 제가 어지럽힌 온실 또한 제 방이나 마찬가지였다. 방을 어지럽혀놓고 다른 사람에게 치워달라고 말하는 것은 무척이나 게으르고 무책임한 행동이었다.

어지른 책임을 지고 싶었던 아리스텔라가 단호하게 돕고 싶다고 말하자, 마르코도 차마 성녀의 의사를 무시할 수 없어 그녀와 두 사람에게 청소 방법을 알려주었다.

◇ ◆ ◇ ◆ ◇

“ 그럼 저는 교황청에 새로운 꽃씨를 보내달라는 전갈을 보내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

“ 미안해요, 마르코. 저 화분이랑 흙은 어디에 치우면 될까요? ”

“ 부서진 물건은 모두 신의 품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신전의 원칙. 뒤처리는 저희 사제들이 할 터이니 성녀님께서는 더 신경 쓰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

“ 음……. 네. 알았어요. ”

아리스텔라를 향해 꾸벅 인사하고, 마르코는 꽃의 방을 나왔다. 아리스텔라와 노엘, 크리스도 청소가 덜 된 곳이 있는지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본 다음 방을 나왔다.

“ 문은 열어두면 될까요? 마르코가 다시 돌아오겠다고 했는데. ”

“ 남쪽 탑은 평소에 사용하는 이가 없으니 열어둔 채라도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

노엘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복도 쪽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저 멀리서 계단을 올라오던 조슈아와 눈이 마주쳤다.

“ 조슈아. ”

“ 성녀님. 수업은 잘 끝마치셨는지요? ”

빙긋 웃으며 걸어오던 조슈아는 아리스텔라의 머리가 다소 헝클어진 것과, 아침에 제가 곱게 여며준 옷깃이 원래보다 조금 느슨하게 여며져 있는 것을 보고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 조슈아는 어디에 가 있었나요? ”

“ ……도서관에 있었습니다. 조사할 것이 있어서요. ”

“ 조슈아는 늘 열심이네요. ”

조슈아는 지식욕이 왕성하여 신관이 된 후에도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고 히페리온이 평을 했던 것이 기억난다. 크리스도 조슈아가 의술을 포함한 잡지식에 해박하여, 도움을 받는 사제가 많다고 이야기했다. 다른 사람과 어울리지 않고 늘 혼자서 돌아다니는 것도 탐구에 열심이기 때문이라고.

아리스텔라는 조슈아가 당연히 평소의 공부를 하느라 도서관을 들렀던 거라고 생각해 생긋 웃었다. 그러나 조슈아는 그녀에게 미소를 돌려주지 않고 목례만 하고는, 몸을 돌려 문 쪽으로 걸어갔다.

열린 문틈으로 안쪽을 보니, 온실을 어지럽히는 일이 있었는지 한쪽 구석에 깨진 화분과 흙더미가 쌓여있었다.

“ 노엘. 꽃의 방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

“ 네? 아, 저……. ”

“ 수업 중에 사고가 있었습니다. ”

말을 더듬는 노엘 대신 크리스가 대답했다.

노엘은 확실히 거짓말이 서툴다. 허세를 부리기 위한 거짓말을 할 때는 얌체같이 잘 둘러대지만, 미리 어떤 거짓말을 할지 계획해두지 않았을 때는 어린아이도 속지 않을 만큼 심하게 버벅거린다. 크리스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 저희가 성녀님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했습니다. 호언장담을 해놓고 책무를 다하지 못해 사과드립니다, 조슈아 신관님. ”

크리스는 노엘의 앞을 가로막으며 조슈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성녀를 가르치는 중에 일어난 <사고>라면 마땅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시종에게 낱낱이 고해야 하는 것임에도 그는 자세한 정황을 말하지 않았다.

태연한 태도의 크리스를 조슈아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처음 성녀와 밤 산책을 하다가 그녀를 위험에 처하게 했을 때, 조슈아는 크리스에게 크게 화를 냈다. 다리를 다친 크리스를 응급처치만 해두고는 기도실에서 밤새 반성하라는 벌을 내렸다. 그때 얌전하게 제 처우를 받아들인 순진한 아이의 얼굴이 아니었다.

크리스의 옷자락에 미처 털어내지 못한 황금색의 꽃가루가 붙어있는 것을 보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 우려하던 일이 현실이 되어버렸구나. ’

성녀의 머리카락이 헝클어진 것은 마법 수련을 하다가 넘어지거나 바람에 날려 그랬다고 변명할 수 있지만, 남자의 손이 아니면 벗을 수 없는 성의가 벗겨질만한 일은 하나밖에 없었다.

“ 성녀님. 몸은 괜찮으십니까? ”

“ 네, 네. ”

크리스와 대화를 나누고 청소를 하며 진정되었다고는 해도, 아리스텔라로부터는 아직도 달콤한 향기가 흘러나왔다. 눈물을 흘렸는지 눈가가 약간 발갛고, 약간 나른한 분위기였다.

‘ 어떤 사고인지 캐물어봐야 성녀님만 곤란해 하시겠지. ’

어딘가 개운해보이기까지 하는 두 남자의 얼굴을 보니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은 간다. 두 남자와 달리 아리스텔라는 무척 곤욕을 치렀으리라.

수줍음이 많은 아리스텔라가 어쩌다가 두 남자와 관계를 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파토스티아의 꽃가루에 홀린 두 남자가 관계를 요구하면 그녀로서는 거절할 수단이 없었을 것이다.

부디 그 방법이 강제적인 것이 아니었기를 바라면서, 조슈아는 아리스텔라의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빗어주었다.

“ 곤로하시겠군요. 저녁에는 성기사들의 훈련을 보러 가기로 하셨는데, 아무래도 그만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

“ 괘, 괜찮아요. ”

“ 성녀님의 몸 상태를 세심하게 파악하여 일정을 조절하는 것도 시종의 의무랍니다. 기사단까지 가서 훈련을 지켜보고 밤에 돌아오시면 정말로 녹초가 되실 겁니다. ”

조슈아의 말이 묘하게 날카롭게 느껴졌다. 혹여 꽃의 방에서 제가 노엘과 크리스와 몸을 섞은 것을 눈치챈 것은 아닌가, 내심 가슴이 켕겼던 아리스텔라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 네. 그렇게 할게요. ”

체력은 웬만큼 회복되었지만 살짝 나른한 기분이었다. 무리하지 않고 쉬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아리스텔라는 노엘과 크리스에게 인사하고, 조슈아의 손을 잡고 남쪽 탑을 나왔다.

◇ ◆ ◇ ◆ ◇

남쪽 탑을 나와 중앙 건물로 이어지는 회랑을 걸으니, 붉은 석양이 녹음으로 가득했던 정원을 노란 빛으로 물들이는 것이 보였다.

“ 이제는 이 시간이면 벌써 해가 저무는군요. ”

“ 가을이니까요. ”

“ 그러네요. 고향에서는 지금쯤 수확이 끝났을 텐데. ”

수확이 끝나면 기념으로 사흘간 축제가 이어진다. 마을 광장에 돌담을 만들어 놓고 모닥불을 피워, 모닥불을 둘러싸고 저마다 짝을 지어 춤을 춘다. 부부나 친구 간에 춤을 추기도 하지만 거의 대부분은 젊은 남녀가 마음에 든 상대를 고르는 자리였다.

“ 모닥불을 피워놓고 춤을 추면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기도 해요. 고향에 있을 때는 매년 있는 축제였는데. ”

“ 성녀님께서도 마을 축제에 참가하고는 하셨나요? ”

“ 저는 주로 음식을 만드는 쪽이었어요. 동생이 어려서 돌봐야 했거든요. 그래도 맛있는 것은 실컷 먹었어요. 춤 구경도 했고요. ”

직접 춤을 춰보지는 못했다. 당시에는 남자를 만나 연애를 하는 것은 무리라 생각해 들어오는 춤 신청을 거절했지만, 지금 와서는 신전에 오기 전에 한번쯤 춤을 춰봤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 조슈아는 춤을 춰본 적이 있나요? 으음, 사제분께 이건 이상한 질문인가. ”

“ 지금은 의례의 형태가 변하여 사라졌지만, 고대에는 신께 바치는 춤을 추는 의식도 있었답니다. 저도 수습사제 시절에 배웠지요. ”

신에게 바치는 춤이라. 그건 어떤 것일까. 뭔가 경건하면서도 아름다운 것이지 않을까. 부드럽고 나긋한 조슈아나 아름다운 히페리온이 춤을 추는 모습이라면 한번쯤 보고 싶었다.

“ 모두 모여서 즐거운 이야기를 하고, 춤을 추고, 신전 안에서도 바깥처럼 축제를 열 수 있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

“ 성녀님께서 원하신다면, 명령하시면 됩니다. ”

“ 네? 그래도 되나요? 계율로 금지하고 있는 건……. ”

“ 이 신전 안에서, 성녀님의 의사는 사제의 계율보다 중요하니까요. 당신께서 명하신다면, 저희들은 무엇이든지 따를 겁니다. ”

“ 어라, 그러면―. ”

마을 축제처럼 시끌벅적하게 놀면서 술을 마시는 것은 무리라도, 모여서 수다를 떨며 함께 노는 것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 아리스텔라가 축제를 열자고 말하려던 찰나, 조슈아가 다음 말을 이었다.

“ 하지만 당분간은, 다른 사제들이 달가워하지 않는 일은 삼가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

“ 네? 왜요? ”

사제는 성기사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데, 그것 때문일까. 어차피 미사도 함께 보는데 축제를 함께 즐기는 것이 뭐 어려운 일이라고. 아리스텔라가 고개를 갸웃하자, 조슈아가 그녀의 입술을 손끝으로 문지르며 조용히 속삭였다.

“ 성녀님과 저의 관계를, 아론 신관이 의심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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