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금된 성녀와 비밀의 밤-135화 (135/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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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꽃이 맺은 열매는

[135]

“ 그럼 저를 버리실 건가요? ”

아리스텔라의 몸이 움찔 떨렸다. 버리다니, 어째서 갑자기 그런 말이 나오는 것인가.

그녀를 좋아한다면, 배려해달라는 뜻이었다. 때와 장소를 가리며 욕망을 자제하라는 뜻이었다. 크리스에게 안기는 것이 싫다는 뜻이 아니었다.

크리스가 원한다면, 아리스텔라는 그와 밤을 보낼 생각이 있었다. 천천히 대화를 나누기를 원하지만, 몸을 섞기를 원한다면 거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저 이런 곳에서, 노엘의 앞에서, 예고도 없이 저를 함부로 대하는 것이 싫었다. 그런데 크리스는 그것조차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건가.

“ 저는 성녀님을 사랑해요. 옆에 있으면 만지고 싶고, 껴안고 싶고, 키스하고 싶어요. 어쩔 수 없을 만큼 성녀님을 원해요. 잘못된 건가요? ”

“ 그러니까 그런 건, 저기, 누가 보는 앞에서는……. ”

“ 다른 사람한테 신경 쓰지 마세요. 저는 늘 성녀님만 보고 있으니까. 성녀님께서 바라신다면, 저는 미사 한중간에 옷을 벗어버리고 당신 품으로 뛰어들 수도 있다고요. ”

“ 그런 걸 바랄 리가 없잖아요! ”

어이가 없어서 아리스텔라가 소리를 높여도, 크리스는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대로 두면 노엘의 앞에서 무슨 소리를 할지 모른다. 위기감이 든 아리스텔라는 노엘을 불러 일으켰다.

“ 노엘. 밖으로 나가요. ”

“ 네? 제, 제가요? ”

“ 수업은 끝났잖아요? 크리스와 할 이야기가 있어요. 나가주세요. ”

아리스텔라가 단호하게 말하자 노엘은 우물쭈물하다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온실 안은 거대한 나팔꽃 덩굴이 휘젓고 다닌 탓에 엉망이었다. 나중에 관리 사제에게 대체 어떤 변명을 하면 좋을까. 골치가 아파오는 것을 깊은 한숨으로 달래며 노엘은 꽃의 방을 나갔다.

◇ ◆ ◇ ◆ ◇

무거운 문이 닫히고, 꽃의 방 안에는 크리스와 아리스텔라 두 사람만이 남았다. 문이 닫힌 것을 확인한 아리스텔라가 크리스를 바라보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 성녀님께서는 제가 무엇을 어쩌길 바라시는 건가요? ”

“ 뭔가를 해주길 바라는 게 아니에요, 크리스. 저는 그냥 예전처럼 당신과 다정하게 지내고 싶어요. ”

“ 이제 다시는 예전처럼 괴로워하고 싶지 않아요. ”

절실함을 담은 크리스의 목소리에 아리스텔라는 흠칫 놀라 어깨를 떨었다. 무심코 한 발짝 뒤로 물러나자, 크리스가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 성녀님은 제 주인이시니까, 제 모든 걸 가져가셨잖아요. 그러니까 조금만, 조금만 제게도 보답을 해 주시면 안 되나요? ”

“ 크리스……. ”

“ 성녀님께서 늘 저를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도 제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주셨으면 좋겠어요. 다른 사람에게 안길 때도 저를 생각해주셨으면 해요. 아침에 일어났을 때, 밤에 잠들 때, 미사 중에, 식사 중에, 수업을 할 때, 책을 읽을 때, 기사들의 훈련을 구경할 때……. 언제라도, 저를 곁으로 부를 수 없다면, 하다못해 떠올려 주셨으면 해요. 저는 성녀님께 잊혀지고 싶지 않아요. ”

“ 크리스. 당신은 내 첫 시종이에요. 그리고 소중한, 그……. 동생 같은 존재라고요. 잊을 리가 없잖아요. 나는 당신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데……. ”

“ 성녀님과 이어져 있다는 기분이 들지를 않아요. ”

사제가 기도를 올리면 신의 축복을 받아 신과 교감할 수 있다. 수습사제라고는 해도 사제가 될 소질이 있기에 이 신전까지 따라온 것이다.

평생 신전에 갇혀 지내야 하는데, 사제가 되지 못할 일반인을 위그멘타르의 신전으로 보내지는 않는다. 수습사제라도 이 신전에 들어온 이상, 그 자질을 인정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봄이 되면 크리스는 정식으로 서품을 받을 것이고, 신전의 사제 명부에도 제 이름이 올라갈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 왜죠? 왜 점점 더 멀어지는 기분이 드는 거죠? ”

새벽에 일어나 기도를 할 때면 늘 몸과 마음이 깨끗해졌다. 미사를 볼 때면 신성한 기운으로 충만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더는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녀를 바라보고 이야기하고, 끌어안고 몸을 섞으면 여신의 종으로서 그녀와 이어져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눈물이 나올 만큼 행복했다.

그러나 몸이 멀어지고 시야를 벗어나는 순간, 신성한 기운으로 충만했던 세상이 아득하게 흐려지면서 신전의 차가운 공기가 아프게 피부를 찌른다. 그녀를 만나지 못하는 시간이 너무나 길고 외로웠다.

진정 신과 교감하는 사제라면 기도를 올리지 않는다 하여 신과의 연결고리가 끊어진 느낌을 받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성녀가 다른 남자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느라 저를 잊어버려, 그녀에게 바친 육신과 영혼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는 탓은 아닌가.

“ 제가 태어난 이유는 성녀님께 저 자신을 바치기 위해서예요. 그러니까 제발 저를 버리지 마세요. ”

“ 크리스. 당신의 몸과 마음은 당신 거예요. ”

“ 그럼 이 자리에서 혀를 깨물고 죽어버려도 되나요? ”

“ 크리스! ”

“ 이 몸의 주인이 성녀님이시기 때문에, 저는 죽을 수도 없었어요. 성녀님. 제게 사랑을 돌려주실 수 없다면 차라리 제 목숨을 거두어주세요. ”

“ 크리스, 제발……. ”

“ 성녀님께서 정화해주셨는데, 다시 타락했나 봐요. 조슈아 신관님은 제 신성력이 이제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 했지만 그건 저를 안심시키기 위해 하신 거짓말인지도 모르죠. 어쩌면 이미 손쓸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인간이 되어 버렸을지도……. ”

크리스의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지하에서 괴물이 되어 덮쳤을 때처럼 분노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지금 크리스로부터 느껴지는 것은 혼란과 슬픔이었다.

“ 성녀님을 곤란하게 하고 싶어요. 괴롭히고 싶어요. 그러면 그 순간에는 저를 봐주시니까, 제 이름을 불러주시니까. 당신의 안에 제가 들어갈 자리가 생긴 것 같아 기뻐요. 그렇게라도 안에 머물고 싶어요. 이건 제가 타락했기 때문인가요? ”

“ 크리스. 당신은 타락하지 않았어요. ”

“ 그럼 어째서 이런 기분이 드는 건가요? ”

예전의 그는 아리스텔라의 웃는 얼굴을 보고 싶어 했다. 그녀의 눈물을 보면 제 억장이 무너지는 듯했다. 함께 밤 산책을 하다가 촉수괴물의 습격을 받았을 때, 그녀가 괴물을 만나 무서워했으리라 생각해 얼마나 괴로워했던가. 대신할 수 있다면 그녀가 받았을 고통을 대신하고 싶었다.

어쩌면 자신이 흉측한 괴물이 되어버린 것은 그때부터 예견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 아리스텔라 성녀님. ”

아리스텔라의 이름을 부르며 크리스가 눈물을 흘렸다. 아리스텔라는 크리스에게 다가가 살며시 손을 뻗어 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하얗고 매끄러운 뺨. 가느다란 금발이 햇빛을 받을 때마다 반짝반짝 빛이 난다. 유리를 녹일 때 만들어진 빨간 구슬처럼 붉고 동그란 눈동자를 지닌 그는 아직도 소년처럼 어린 태가 나는 인상이었다.

밝고 천진하고, 여자를 어려워하면서도 그녀에게 친절하게 대하려 노력하던 크리스. 그것이 아리스텔라가 기억하는 크리스의 모습이었다.

지금처럼 제멋대로에, 불안정하고, 변덕스러운데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격정적이고 위험한 남자가 되어버릴 줄은 몰랐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눈앞에 있는 남자도 분명 크리스였다.

“ 크리스. 당신이 변한 것은 언제부터인가요? ”

“ 성녀님을 다치게 한 죄로 기도실에서 참회하던 날 밤, 당신이 제게 은총을 내려주셨을 때……. ”

조슈아와 관계를 가졌던 밤이다. 설마 그날 밤, 자신은 조슈아를 찾아가기 전에 먼저 크리스를 찾아가 그와 몸을 섞었던 것인가.

“ 아니, 아니에요. ”

“ 네? 아닌가요? ”

“ 처음 성의를 입은 성녀님의 모습을 보았을 때부터, 당신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되어버렸어요. ”

낡은 시골 촌부의 의상을 입고, 넓은 방에서 뭘 해야 하는지 몰라 우물쭈물하며 그의 눈치를 살피던 소녀처럼 가녀린 여인. 그러나 눈가리개를 풀고 다시 눈을 뜬 순간, 새하얀 성의를 입은 자신의 주인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듯 고고한 자태로 그의 앞에 서있었다.

자신은 그때 이미 이 아름답고 순결한 주인에게 영혼까지 빼앗기고 말았을 것이다.

“ 이, 이렇게 타락한 저는……. 싫으신가요……? ”

크리스가 우울한 얼굴로 물었다. 아리스텔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착하고 얌전한 크리스를 바꾼 것은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이었다.

처음 사랑을 하게 된 소년은 제 마음을 표현할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섹스를 통해 쾌락을 주고받으며 하나가 되는 순간의 강렬함이, 그가 생각하는 최대의 마음표현이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아리스텔라도 남자를 어려워했다. 곁에 다가오기만 해도 위축되고, 남자의 손이 몸에 닿으면 소스라치게 놀라며 피하려 했다. 조슈아에게 처음 몸을 맡겼을 때, 과연 이래도 되는 것인지 두렵고 혼란스러웠다.

그런 자신이 지금은 스스로 남자를 유혹하고, 품에 안기고, 발가벗은 채로 쾌락에 취해 절정에 오르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렇게 변한 것 또한 이제까지의 경험과 마음을 나눈 이들의 조언 덕분일 것이다.

아리스텔라는 변했다. 크리스도 변했다. 서로 다른 사람이 만나 관계를 이루어 가는데 변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만약 과거의 자신을 아는 누군가가 저를 가리켜 < 남자를 어려워하지 않는 너는 아리스텔라가 아니다 >라고 한다면 얼마나 어이가 없을까.

아무리 변해도 자신은 자신, 아무리 변해도 크리스는 크리스였다. 기억 속의 사랑스러운 동생이 여인에게 욕정하는 남자가 되었다고 해서 슬퍼할 이유는 없었다.

“ 크리스. 당신은 누구인가요? ”

“ 저는……. 성녀님을 섬기는, 종입니다……. ”

“ 네. 당신은 제 사람이에요. ”

“ 성녀님……? ”

“ 위그멘타르 신전의 수습사제가 아니라, < 아리스텔라의 크리스 >예요. ”

아리스텔라는 크리스를 끌어안았다. 그녀보다 한 뼘 가량 키가 큰 크리스가 초조하게 내뱉는 숨이 이마에 닿았다.

“ 크리스. 당신은 타락하지 않았어요. 당신을 바꾼 것은 바로 저니까요. ”

여신의 종이 여신의 축복을 받고 그녀의 권속이 되었다. 그녀를 향한 사랑으로 바뀌었는데 그것이 타락의 증거일 리가 있겠는가. 아리스텔라가 조심스럽게 크리스의 등을 쓰다듬자 그도 안심한 듯 천천히 숨을 뱉으면서 그녀의 등을 어루만졌다.

“ 크리스. 지금도 질투가 나나요? 분노를 어쩔 수 없을 만큼? ”

“ ……. ”

“ 노엘은 밖으로 내보냈고, 이 온실 안에는 아무도 없어요. 제 곁에 있는 것은 당신뿐이에요. ”

아리스텔라의 말에 크리스가 어깨를 움찔거리며 허리를 세웠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눈동자가 확실하게 자신을 향해 있다. 다른 누구도, 무엇도 아닌 크리스의 모습을 비추고 있다.

이 순간, 아리스텔라는 온전히 크리스만의 주인이었다.

“ 아직도 제가 멀게만 느껴지나요? ”

“ ……아니요. ”

신을 찬양하는 미사에 올리기 위해 마련된 색색의 꽃이 지천에 피어있었다. 그러나 그 어느 꽃도 제 눈앞의 남자만큼 찬란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름다운 꽃도 어린 산양의 피도 필요 없었다. 여신에게 바쳐진 남자의 순정은 그 어떤 제물보다도 그녀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다.

“ 고마워요, 크리스. ”

“ 뭐, 뭐가요……? ”

“ 당신을 저에게 주셨잖아요? 정말 기뻐요. ”

정욕의 꽃 파토스티아는 그 꽃가루를 지상에 날려 확실한 열매를 맺었다. 분노와 질투라는 밑씨에 도달한 정욕이 만들어낸 것은 함께 있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었다.

촉촉한 입술에서 향기로운 숨결이 흘러나왔다. 아리스텔라는 크리스를 끌어안고, 사랑스러운 종에게 축복을 내려주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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