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금된 성녀와 비밀의 밤-128화 (128/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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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욕의 꽃, 파토스티아

[128] 정욕의 꽃, 파토스티아

이번 신성 마법 수업은 돌의 방이 아닌 꽃의 방에서 이루어졌다. 꽃잎과 넝쿨 문양이 새겨진 돌문 앞에서 조슈아가 문고리에 손을 대고 신성력을 발하자, 무거운 문이 저절로 열리며 상쾌한 풀잎 향기가 안에서 흘러나왔다.

조슈아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간 아리스텔라는 상상하지도 못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 우와아……. ”

꽃의 방은 거대한 온실이었다. 둥글고 높은 천장은 유리로 되어 있어 햇볕이 그대로 내리쬐었고, 곳곳에 굵은 기둥을 타고 올라온 넝쿨이 만들어내는 새하얀 기둥과 푸른 줄기의 조화가 아름다웠다.

골렘이 관리하는 정원에는 꽃을 찾아보는 것이 어려웠는데, 이 안에는 꽃이 가득했다. 꽃의 방이라고 하니 당연한 것이겠지만, 아리스텔라가 시골에서 살 때 보았던 꽃들은 물론이고 처음 보는 화려한 꽃들도 주위에 가득했다.

사계절의 꽃이 한군데 피어있는 광경이라니, 마법의 힘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같이 탐스럽게 피어있는 모습이 마치 온실에 찾아온 그녀를 환영하는 꽃의 인사 같아서, 아리스텔라는 볼을 발갛게 물들이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새하얀 제라늄을 보고 감탄하고 있는데, 옆의 분수대 쪽에서 노엘과 크리스가 걸어왔다.

“ 어서 오세요, 성녀님. 꽃의 방은 처음이시죠? ”

“ 너무 예뻐요.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어요. ”

“ 신전의 제단에 올릴 꽃을 고르는 곳이랍니다. 개중에는 인간의 손이 닿으면 시들어 버리는 꽃도 있는지라 관리하는 사제 이외에는 평소 출입을 금지하고 있지요. ”

본래는 돌의 방에서 수업을 계속할 셈이었지만, 이번 수업부터 크리스가 조교를 맡기로 한 이상 제대로 선생 노릇을 하고 싶었던 노엘은 아리스텔라의 기분을 풀어줄 만한 장소를 물색했다.

수습 사제 시절 읽었던 <여자는 꽃을 좋아한다>는 구절이 생각나 수업 장소를 꽃의 방으로 옮겼다.

방을 관리하던 사제는 난감한 기색을 표했지만, <성녀님을 위해서>라는 명분에는 반박할 수 없었는지 사람의 손이 닿으면 안 되는 꽃의 종류를 알려주며 건드리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고는 온실의 문을 열어주었다.

아리스텔라가 오기 전까지 노엘과 크리스는 새벽부터 사람의 손에 예민한 꽃을 건드리지 않도록 동선을 짜 수업의 예행연습을 했다. 물론 아리스텔라에게는 비밀이었다. 노엘과 크리스는 어디까지나 수업을 진행하기 위해 아리스텔라보다 조금 일찍 온 것으로 되어 있었다.

꽃의 방을 관리하는 사제만 입을 다문다면 말이다.

“ 아무래도 성녀님께서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빛의 구슬로 형태를 잡는 것을 어려워하시는 듯해서요. 매개가 있으면 좀 더 쉬이 마법을 발현하실 수 있을 겁니다. ”

어제 히페리온이 가르쳐주었던 매개물을 변형시키는 마법일까. 히페리온에게 배웠다고 말하면 자존심 센 노엘이 불쾌한 얼굴을 할 것 같아서, 아리스텔라는 처음 듣는 이야기인 척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 흥미로운 이야기네요. 그럼 이 방에 있는 꽃을 매개물로 마법을 사용하는 건가요? ”

“ 신성력은 식물의 생장을 빠르게 한답니다. 그것을 응용하는 마법을 가르쳐 드릴게요. ”

“ 아, 노엘이 어제 그렇게 말했지요. 기억하고 있어요. ”

특별히 관리를 하고 있지 않음에도 정원의 나무들이 키가 크고 울창한 것은 이 신전에 신성력이 가득하기 때문이라고 그랬지. 아리스텔라는 어제 노엘이 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넓은 온실에 가득한 색색의 꽃들. 그 꽃들만큼이나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의 외양도 화려했다. 물빛의 긴 머리카락에 맑은 보라색 눈동자의 아리스텔라를 보고 조슈아는 제비꽃을, 크리스는 수국을, 노엘은 나팔꽃을 떠올렸다.

“ 아, 성녀님. 나팔꽃을 보시겠습니까? 이쪽에 굉장히 예쁘게 피어 있더군요. ”

“ 정말요? 어디요? ”

새벽에 이곳에서 동선을 측정하면서 본 맑은 하늘색과 보라색의 나팔꽃은 무척 아름다웠다. 작은 화분이 가득한 탁자가 주르륵 놓여 있는 지점을 지나면 낮은 펜스가 빙 둘러진 공간이 나온다. 펜스에 감겨서 피어난 나팔꽃을 보여주고 싶었던 노엘은 아리스텔라를 새벽에 봐 두었던 곳으로 안내했다.

“ 어라? ”

그러나 펜스에 감겨서 활짝 피어났던 아름다운 나팔꽃은 보이지 않았다. 초록의 잎사귀 사이에서 꽃잎을 쭉 오므리고 잠든 꽃을 보고 실망한 노엘의 어깨가 추욱 처졌다.

“ 벌써 시들었네요……. ”

“ 나팔꽃은 아침에 피었다가 오후에 지는 꽃이니까요. ”

허탈한 듯 한숨을 내쉬는 노엘을 위로하듯 조슈아가 대답했다. 그 말을 듣고 크리스가 아쉬운 듯이 아, 하고 작게 내뱉었다.

“ 미리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요. 새벽에는 정말 예쁘게 피어 있었는데 말이죠. ”

“ 야, 크리스! ”

그냥 자연스럽게 넘어갔으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을, 관리 사제에게 허락을 구하고 새벽부터 내내 이곳에서 연습하던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던 노엘은 버럭 소리치며 크리스의 등을 때렸다.

공기를 가르는 매서운 소리가 들리고, 철썩! 하고 등짝을 가격하는 손바닥의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 악! ”

“ 꺄아, 노엘? 뭐 하는 거예요? ”

“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

크리스의 비명에 아리스텔라가 깜짝 놀라 바라보자, 노엘은 지레 찔린 얼굴로 뒷걸음질을 치다가 어색하게 헤헤 웃었다.

“ 폭력은 안 돼요. 크리스는 노엘보다 어리잖아요? ”

“ 아닙니다, 성녀님! 저기, 때린 것이 아니고……. 그! 버, 벌레를 잡았습니다! ”

“ 벌레요? ”

꽃이 피어있는 온실이니 벌레가 있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다. 아무리 보아도 노엘이 벌레를 잡았다기보다는 크리스가 벌레 씹은 얼굴을 하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지만 말이다.

“ 크리스. 등은 괜찮아요? ”

“ 괜찮습니다. ”

아픈 등을 슥슥 어루만지며 크리스가 대답했다. 노엘은 필사적으로 시치미를 뗐고 크리스는 뚱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기에 더 추궁할 수는 없었다.

‘ 노엘과 크리스는 사이가 좋다고 하는데, 남자끼리라서 저런 과격한 장난을 치는 걸까. ’

아리스텔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시선을 주변으로 돌렸다. 나팔꽃은 시들었지만 여기저기에 꽃이 가득했다. 꽃을 구경하던 그녀의 시선이 문득 한 지점에 가 닿았다.

“ 노엘. 저 커다란 꽃은 뭔가요? ”

아리스텔라는 꽃의 방 귀퉁이에 있는 가장 굵은 두 기둥 사이에 피어 있는 거대한 붉은 꽃을 가리켰다.

“ 글쎄요. 저것은 저도 잘……. ”

“ 노엘 사제님. 관리 사제님이 저것도 취급주의라고 하셨던가요? ”

“ 아, 좀! 그런 말은 귓속말로 해야지! ”

또다시 옥신각신하는 노엘과 크리스를 무시하고, 조슈아가 진귀한 것을 발견했다는 듯 안경을 고쳐 쓰고는 꽃이 피어있는 귀퉁이를 향해 다가갔다. 세 사람도 조슈아를 따라갔다.

“ 이런, 설마 이곳에 피어 있을 줄이야. ”

“ 그게 뭔데요? ”

다홍색의 둥글넓적한 꽃잎이 마치 접시처럼 꽃술을 에워싸고, 꽃술 위에는 마치 금을 가루로 만들어 담아놓은 듯 황금색의 꽃가루가 가득했다.

“ 이것은 <파토스티아> 라는 꽃입니다, 성녀님. ”

“ 파토스티아요? 고향에 있는 것은 이렇게 생기지 않았는데……. 이렇게 붉고 거대한 것은 처음 봐요. ”

고향에서 본 파토스티아는 엄지와 검지로 고리를 만든 정도 크기의 작은 꽃이었다. 그러나 이곳의 파토스티아는 어리아이의 머리통만한 크기였다. 물론 신전의 신성력이 식물의 생장을 돕는다는 것은 노엘의 설명을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녀가 기억하는 것과는 색도 형태도 달랐다.

“ 파토스티아의 암꽃은 분홍색의 작은 꽃으로 어디에나 피어있지만, 수꽃은 야생에서는 자생하지 않는답니다. 마력이 흐르는 땅에서만 피어나거든요. 신전에 가득한 신성력 덕분에 통상보다 크기가 훨씬 거대해졌습니다만. ”

파토스티아는 암꽃과 수꽃의 형태가 달라, 암꽃은 감자꽃을 닮은 분홍색 꽃이지만 수꽃은 꽃잎이 붉고 큰데다 접시와도 같은 꽃의 중앙에 꽃가루를 잔뜩 머금고 피어난다고 조슈아는 설명했다.

이 꽃가루가 바람에 날려 암꽃에 닿아야 수정이 이루어지는데, 어디에나 자생하는 암꽃에 비해 수꽃은 마력이 흐르는 땅에서 아주 극소수밖에 피지 않기 때문에 파토스티아 꽃의 열매가 맺히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한다.

“ 이 꽃잎 위에 가득 담긴 것이 꽃가루인 거죠? 이게 다른 곳으로 날아가야 수정이 되어 열매가 맺힐 텐데……. ”

“ 성녀님! 안 됩니다! ”

아리스텔라가 손끝에 꽃가루를 묻히려 하자, 조슈아가 깜짝 놀라 아리스텔라의 손목을 붙들었다.

“ 조, 조슈아? ”

그답지 않게 과격한 행동에 아리스텔라가 당황하여 이름을 부르자, 조슈아 역시 당황하여 그녀의 손끝을 살폈다. 다행히 꽃가루가 묻은 것은 아니었다.

“ 성녀님. 이 꽃은……. ”

꽃가루에 대해 설명하려다, 조슈아는 잠시 망설였다. 파토스티아의 수꽃은 인간의 정념을 자극하여 흥분시키는 꽃이었다. 여성에게는 효과가 미미하지만, 남성에게는 정력제로도 쓰이는 만큼 취급에 주의를 요했다.

향기가 아주 약한 꽃이라 가까이 다가가 냄새를 맡지 않는 한 꽃이 풍긴 향기는 곧 공기에 희석되어 사라지지만, 실수로라도 냄새를 맡거나 꽃가루가 눈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가뜩이나 유혹적인 성녀의 몸이 근처에 있는데, 노엘이나 크리스가 파토스티아에 홀리기라도 하면 곤란한 일이 일어날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곧이곧대로 파토스티아는 남자의 성욕을 부추기는 꽃이니 가까이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었다. 조슈아가 관찰해온 바로 노엘과 크리스는 호기심 강한 청년들이었다.

‘ 특히 허세가 강한 노엘이라면 욕구를 참을 수 있다 호언장담하고는 일부러 꽃향기를 맡으려 들지도 모르지. ’

애석하게도 정식 사제인 노엘은 수습 사제인 크리스보다도 조슈아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처지였다. 그래서 조슈아는 세 사람이 모두 주의를 기울일 만한 거짓말을 생각해냈다.

“ 파토스티아의 꽃가루에는 독이 있답니다. 가까이 하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

“ 독이요? 세상에……. ”

아름다운 꽃에는 가시가 있다고 하지만, 독이라니. 아리스텔라는 파토스티아의 황금색 꽃가루를 만지려던 손을 거두고 한 발 물러났다.

“ 조슈아. 독이 있는 꽃을 이런 방에 두어도 괜찮나요? ”

“ 건드리지 않으면 괜찮답니다. 다소 꽃가루가 날리거나 옷에 묻는 것은 신체에 큰 영향이 없지만, 눈에 잘못 들어가 비비기라도 하면 시력에 손상이 갈 수도 있으니 가까이 하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

“ 그렇군요. 알겠어요. ”

실수로라도 파토스티아의 근처에 가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며 아리스텔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 꽃가루가 날리지 않도록 저희가 성녀님을 보호하겠습니다. ”

노엘과 크리스가 의욕이 넘치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 모습을 보니 조슈아는 더더욱 안심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자신도 여기 남아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감시하겠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노엘이 앞으로 나서 호언장담하는 바람에 그럴 수가 없었다.

“ 신성 마법 수업 중에는 제가 책임지고 지도할 테니 안심하십시오, 조슈아 신관님. 크리스도 알고 보면 야무진 녀석이라 파토스티아를 가까이하는 실수를 하진 않을 겁니다. ”

“ 그렇……습니까. ”

크리스보다도 네가 더 불안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을 꾹 눌러 삼키고, 조슈아는 빙긋 미소 지었다.

“ 성녀님의 지도를 부탁합니다, 노엘. ”

도무지 사라지지 않는 불안을 애써 억누르고, 조슈아는 아리스텔라와 노엘, 크리스를 향해 가볍게 목례한 뒤 꽃의 방에서 나왔다.

============================ 작품 후기 ============================

조슈아의 불안은 과연 현실로 일어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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