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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의 해답
[126]
“ 시종 없이 혼자 다녀도 되나요? ”
“ 예? ”
“ 다들 저를 걱정하시는 건 알겠는데요, 시종이 되면 온종일 제 곁에 붙어 계셔야 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노엘에게 마법 수업도 들어야 하고, 기도도 하고, 누군가를 만나러 가기도 해야 할 텐데……. 계속 바깥에 세워두는 건 미안해서요. ”
“ 성녀님. 그것은……. ”
히페리온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자, 아리스텔라는 아, 하고 짧게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신전의 주인이자 사제와 성기사들이 보호해야 할 대상인 성녀가 시종도 없이 혼자서 다닌다니 안 될 일이다. 아무리 아리스텔라가 부담스럽다고 해도 < 섬기는 자 >로서 양보할 수 없는 선은 있었다.
분명 성녀의 의사는 사제의 계율보다 위에 있었다.
그러나 성녀의 안전은 그녀의 의사보다도 더 위에 있었다.
따라서 누구를 시종으로 둘 것인가에 성녀의 의사를 반영할 수는 있어도, 시종도 없이 혼자서 다니도록 두는 것은 불가능했다. 시종을 두는 것을 성녀가 거부한다 하더라도, 그녀의 안전을 위해서는 따를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 죄송해요. 역시 안 되겠죠? ”
“ 성녀님께서 용무를 보실 때 시종을 홀로 두는 것이 마음에 걸리신다면, 혼자 있는 것을 괘념치 않는 이를 시종으로 두시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만. ”
“ 네? 그런 사람도 있나요? ”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하고, 오랜 시간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을 힘겨워하지 않는 사람. 히페리온은 그가 알고 있는 한 사람을 아리스텔라의 시종으로 추천했다.
◇ ◆ ◇ ◆ ◇
“ 오늘부터 잘 부탁해요, 조슈아. ”
성녀의 방을 찾아온 조슈아는 평소의 모습과 같았다. 부드러운 갈색머리를 하나로 묶고 안경을 낀 그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며 아리스텔라를 향해 가볍게 목례했다.
“ 성심껏 성녀님을 모시겠습니다. ”
성기사인 케인과 로이드를 시종으로 삼은 일로 사제들의 반발이 대단했기에 히페리온은 또다시 성기사를 새 시종으로 추천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사제들 가운데서 성녀의 시종을 고르려니 그녀를 제대로 보필할만한 이가 떠오르지 않았다. 사제 무리는 대부분 신관 아론을 지지하고 있었고, 성기사를 싫어하는 그들이 성녀의 시종을 맡는다면 그녀를 곤란하게 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히페리온은 사제이면서, 성기사와 척을 지지 않고, 아리스텔라의 마음을 편하게 할 수 있는 조슈아를 추천했다. 아리스텔라가 조슈아를 의지하는 것은 내심 속이 상했지만, 그 이상의 인선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사랑하는 여인에게 다른 남자를 소개해야 하는 히페리온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조슈아는 흔쾌히 수락했다.
“ 성녀님. 오늘은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
“ 오후에 노엘에게 마법 수업을 들을 거예요. 저녁에는 기사단의 성기사분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보러 갈 거고요. ”
“ 그럼 오전에는 특별한 예정이 없으시겠군요. ”
아리스텔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은 아직 오전이라 사제들은 회의와 미사 준비로, 성기사들은 순찰로 바빴다. 두 사람은 차를 마시면서 오랜만에 느긋하게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 그래서 저는 토끼 모양의 인형을 만들었는데, 이자크는 이상한 모양의 새를 만들었어요. ”
아리스텔라는 주섬주섬 테이블 위에 제가 어제 만든 봉제인형과 이자크가 남겨두고 간 인형을 올렸다. 이자크의 것은 새라고도 사람이라고도 알아보기 어려운 모양이지만, 아리스텔라의 것은 눈만 없을 뿐 완전한 토끼 모양이었다.
“ 성녀님께서 기르기를 원하는 동물이 있다면 말씀하십시오. 교황청에 연락해 데려오겠습니다. ”
“ 네? 동물도 기를 수 있나요? ”
“ 동물은 신전 안의 비밀을 밖으로 전하지 않으니까요. ”
여신 위그멘타르의 폐쇄된 신전.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신전 밖으로는 새어나가지 않는 비밀이었다.
밖에서는 재앙의 여신을 감금하기 위해 신전을 폐쇄하였다고 말하지만, 본래 이 신전에 인간의 출입이 불가능한 것은 신전 안에서 성녀와 사제들이 난교를 벌인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 성녀님께서 기분을 안정시킬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무엇이든 말씀해 주십시오. 교황청에서도 적극적으로 도움을 줄 것입니다. ”
“ 아니, 그렇게까지는 하실 거 없어요. 지금도 충분히 안정을 취하고 있는 걸요. ”
“ 그 이후로는, 별일이 없으셨나요? ”
조슈아가 묻는 < 별일 >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깨달은 아리스텔라는 고개를 들어 달력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는 여신 위그멘타르에게 몸을 빼앗긴 일이 전혀 없었다. 마지막으로 잠식당했던 것이 언제였던가. 아마 집행관 클로비스와 몸을 섞었을 때일 것이다. 그날 밤 침실에 숨어든 이자크와 말싸움을 하고, 로이드를 구해 시종으로 삼은 이후로는 죽 제 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 네……. ”
“ 욕구를 잘 조절하고 계신 모양이군요. ”
조슈아의 말에 아리스텔라는 조용히 뺨을 붉혔다. 제 스스로 원해서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가져놓고, 남자와 몸을 섞었다는 사실을 지적받는 순간은 언제나 가슴이 뜨끔하다. 아리스텔라는 조심조심 조슈아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여전히 평온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 아직까지는, 그런 것 같아요. ”
“ 아직까지……라 하심은? ”
“ 여신 위그멘타르는 음욕의 여신이면서, 탐욕의 여신이라고도 하잖아요. ”
어제 히페리온은 아리스텔라를 안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런 그를 유혹해서 밤새도록 몸을 섞었다.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상상조차 하지 못할 일이다. 의식을 잃지 않았으니 여신에게 몸을 빼앗겨 저지른 일이라 변명할 수도 없었다.
히페리온이 곤란해 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아리스텔라는 제 욕심을 우선시해 그에게 요구했다. 그래서 명령을 충실히 따르는 성녀의 종은 복종하는 수밖에 없었다.
“ 성욕을 참지 못하는 것뿐만 아니라, 저기……. 다른 사람의 마음까지 원하게 되면, 어떻게 하죠? ”
“ 이 신전 안의 모든 이들은 성녀님의 소유입니다. 몸도 마음도, 말이죠. ”
“ 하지만 그런 건 너무하잖아요……. ”
사랑받고 싶다. 로이드에게, 크리스에게, 케인에게 고백을 받았을 때 곤란한 한편으로 가슴이 설레고 기분이 좋았다. 세 사람의 사랑을 받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조슈아를 끌어들였다. 그리고 어젯밤에는 히페리온을 유혹했다.
처음에는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고 애정 없이 몸을 섞는 것이 두려웠다. 그러나 지하를 탐색하러 갔다가 전대 성녀 밀리아리아를 모시던 사제들이 성녀를 사랑하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서로를 미워하고 원망하여 서로 죽고 죽이며 결국 원귀가 되어버린 사실을 목도하고 나니 문득 두려워졌다. 이래도 괜찮을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 저는, 좋아요. 사랑받으면 기뻐요. 욕심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저를 좋아해줬으면 좋겠어요. ”
“ 이 신전의 모두가 성녀님을 흠모하고 있답니다. 감정의 무게는 다르더라도. ”
“ 저는 괜찮지만, 다른 사람들은요? 그 사람들은 제게 온 마음을 다 바치는데, 제 몸과 마음은 하나잖아요. ”
“ 신께서 수많은 종을 거느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
“ < 종 >이 아니에요. 저는 사랑을 하고 싶다고 말했잖아요. ”
그저 받기만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애정 없는 관계는 싫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아리스텔라는 사랑을 하고 싶었다. 저를 향해 사랑을 바치는 남자들에게 마찬가지로 사랑을 나누어주고 싶었다. 비록 그와 몸을 겹치는 하룻밤뿐이더라도, 그 순간만은 온전히 그의 연인으로 있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욕심일 뿐이다.
사랑하는 여자를 남과 공유하고 싶어 하는 남자가 있을 리 없다. 서로를 탐하는 순간에는 현실을 잊을 수 있을지 몰라도, 행위를 마치고 나면 현실로 돌아와 버린다. 함께 잠들고 일어난 아침, 로이드나 히페리온이 보였던 평소와 같은 태도를 보면 더욱 그러했다.
사랑하기 때문에 존중하고 배려하고 싶다. 만약 아리스텔라가 다른 남자와 섹스하는 것을 그들이 원하지 않는다면, 그러나 차마 그녀의 행동을 강제할 수 없어 속으로 삼키며 괴로워하는 거라면,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할까.
아리스텔라는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그의 연녹색 눈동자는 오묘한 빛을 띠고 있었다. 의식을 잃고 방을 뛰쳐나와 그와 몸을 섞었던 밤, 자신을 데려다주며 조슈아가 건넸던 조언을 기억한다.
“ 조슈아. 욕구가 일면, 주위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했잖아요. ”
“ 예. 그리 말했습니다. ”
“ 당신은 그래도 괜찮은가요? ”
“ 예? ”
아리스텔라는 테이블 위의 토끼 인형을 꼼지락거리면서, 그의 눈치를 살폈다.
“ 제가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가져도,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은 거예요? ”
만약 이 신전에 아리스텔라 이외의 여자가 있다면, 그래서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하던 로이드가, 크리스가, 케인이 그 여자와 입을 맞추고 살을 섞는다면, 버티지 못할 것이다. 질투로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어쩌면 위그멘타르의 신전이 금녀구역인 것은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이 제멋대로인 욕망을 어찌해야 할까. 제가 사랑하는 남자가 다른 여자와 잠자리를 함께 한다면 질투할 거면서, 그들의 마음을 뻔히 알면서도 매번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가진다니. 아리스텔라는 제 욕심밖에 챙기지 않으려는 자신이 너무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제들이 그녀에게 헌신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게 되어버리면 정말 걷잡을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꿈속에서 아리스텔라를 재판했던 사제들처럼, 제 지위와 권력을 이용하여 제 욕구만을 채우려 들지도 모른다.
아리스텔라는 그것이 두려웠다.
“ 금욕과 절제는 사제의 기본적인 덕목이랍니다. 큰 의례가 있을 적에는 몸을 정결히 하기 위해 물 이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며칠간 기도를 하지요. ”
욕구를 절제할 수 있다는 말일까.
“ 하지만 식욕이나, 그……. 성욕이랑, 감정은 다른 거잖아요. ”
“ 예. 욕구는 육체에 의한 것이고, 감정은 마음에 의한 것이니 다르지요. ”
조슈아는 천천히 찻잔을 들어 입가로 옮겼다. 소리 나지 않도록 한 모금 차를 마시고는 역시 소리 나지 않도록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은 조슈아가 그녀를 바라보며 빙긋 웃는다.
“ 제가, 질투하기를 바라시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