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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된 성녀와 비밀의 밤-125화 (125/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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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의 해답

[125] 질투의 해답

아리스텔라가 눈을 뜬 것은 이미 동이 튼 후였다. 평소보다 조금 밝은 새벽빛이 커튼 사이로 스며들어 방 안을 청량한 푸른빛으로 밝히고 있었다.

‘ 벌써 동이 텄네. 이걸 어쩐다? ’

고운 미간을 살며시 찡그리며 아리스텔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리스텔라가 완전히 해가 뜬 뒤에야 일어나는 것이 드문 일은 아니었다. 전날 미리 깨워달라고 말하지 않는 한, 그녀가 침대에서 일어나 머리맡의 종을 울리기 전까지는 시종이 방문하지 않으니 원한다면 얼마든지 늦잠을 자도 좋았다.

문제는, 아리스텔라가 아니라 그녀에게 팔베개를 해주고 있는 이 신전의 대신관에게 있었다.

아리스텔라는 히페리온의 팔을 베고 누워있었다. 예전에 하룻밤을 함께 보냈을 때는 그가 새벽에 그녀를 깨워 옷차림을 정돈하고 새벽 기도를 하러 나갔는데, 간밤의 행위가 너무 격렬했기 때문일까, 히페리온의 얼굴은 몹시 지쳐 보였다.

한 번도 계율을 어긴 적이 없다고 했으니, 이제까지 히페리온은 늘 동이 트기 전에 일어났을 것이다. 아리스텔라가 먼저 깨어날 때까지 그가 깨어나지 않은 것은 아마도 처음 있는 일일 터였다.

‘ 많이 피곤하셨나 봐. ’

도중부터는 제정신이 아니라서 몇 번이나 몸을 겹쳤는지, 몇 시까지 계속 몸을 섞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두 사람이 욕실에서 나왔을 때는 분명 자정이 지난 시각이었으니 아마 새벽까지도 내내 섹스에 열중하고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잠을 잔 것은 길게 잡아도 2, 3시간 정도일까. 히페리온이 깨어나지 못하고 잠들어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히페리온을 유혹한 것도, 새벽까지 그를 무리시켜 지쳐 쓰러지게 한 것도 결국 아리스텔라였다. 피곤해 보이는 그를 깨우고 싶지 않았다. 조금 더 쉬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어슴푸레하던 방안이 점점 더 밝아져 오는 것을 보니 이대로 둔다면 곤란한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아무리 성녀의 시종이라고 한들 히페리온이 아침에 아리스텔라의 방에서 나오는 것을 누군가 본다면 뒷말이 나오지 않을 리가 없다. 불미스러운 일이 없었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도 마음이 켕기는 일이지만, 성녀의 밤에서 아침까지 함께 있어야 할 마땅한 이유를 만드는 것도 어려웠다.

“ 대신관님. ”

아리스텔라가 작게 불러도, 히페리온은 미동조차 하지 않고 편안한 호흡을 반복하고 있었다.

“ 히페리온 대신관님. ”

“ 으음……. ”

“ 새벽이에요. 일어나셔야 해요. ”

피곤에 절어 새벽에야 겨우 잠든 사람을 큰 소리로 깨우는 것도 못할 일이라 작은 소리로 부른 탓일까, 히페리온은 아리스텔라가 부르는데도 일어나지 않고 팔을 뻗어 그녀의 몸을 꼭 껴안았다.

“ 어머나! ”

잠결에 따스하고 말랑말랑한 것이 옆에 있으니 무심코 껴안아버린 것이리라. 아이가 뽀송뽀송한 인형을 안고 자는 것처럼 히페리온은 아리스텔라를 끌어안은 채 기분 좋은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리스텔라는 고개를 들어 저를 안고 있는 히페리온의 모습을 살폈다. 자신보다 여덟 살이나 연상인데도, 잘 때는 마치 아이처럼 천진한 얼굴이다.

‘ 대신관님의 자는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네. ’

평소엔 엄격한 대신관답게 딱딱한 표정이고, 아리스텔라를 마주대할 때는 살짝 부드럽게 풀어진다. 몸을 섞을 때는 뜨겁게 젖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본다.

그런데 이렇게 잠들어 있을 때의 그는 정말로 순수한 어린아이 같다. 얼굴이 어려 보이는 것은 아닌데, 사람의 온기에 안도하는 듯한 얼굴을 보면 어쩐지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감싸 안고 싶어진다.

아리스텔라는 히페리온의 팔 안에서 꼼지락거리며 몸을 돌린 뒤 그의 뺨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조금 더 위로 올라가 그의 귓불을 살짝 깨물고, 양 눈가에 쪽쪽 입을 맞췄다.

“ 읏, 으……. ”

“ 일어나세요, 대신관님. ”

“ 음……? ”

히페리온이 아름다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가, 부스스 눈을 떴다. 몇 번 눈꺼풀이 감겼다가 위로 올라가며 주위를 확인하듯 붉은 눈동자가 또르륵 굴러갔다.

“ 아, 이런! ”

“ 엄마야! ”

늦잠을 잔 것을 깨달은 히페리온이 황급히 몸을 일으키는 바람에, 아리스텔라는 히페리온의 몸 위에서 침대로 떨어졌다.

“ 성녀님, 괜찮으십니까? ”

“ 네, 괜찮아요. 그런데……. ”

주위를 둘러보던 히페리온은 제 상태를 확인하고는 이마를 짚었다. 새벽 기도를 건너뛰었다. 본디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목욕을 하고 기도를 올린 뒤 사제들의 지도에 나서야 하는데, 까맣게 잊고 잠들어 버렸다.

시간은 아직 새벽이었으니 오전 회의에는 늦지 않겠지만, 이제까지 한 번도 새벽 기도를 빠뜨린 적이 없었던 히페리온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한숨을 내쉬면서 마른세수를 했다.

“ 대신관님, 미안해요. ”

“ 어째서 성녀님이 사과를 하십니까. ”

“ 제가 어젯밤에 너무, 그……. 그런 걸 요구하지만 않았어도……. ”

철야기도나 단식에는 익숙했으니 체력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그렇다 해도 사람의 몸이었다. 하룻밤 사이에 몇 번이나 여자를 안고 지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아리스텔라는 자신 때문에 히페리온이 사제의 계율을 또 깨뜨려야 했던 것이 미안해서 우물쭈물하면서 수습할 방도를 찾았다.

“ 저 때문에 새벽 기도를 빠진 거라고 변명하는 건 안 되나요? ”

“ 성녀님, 그건……. ”

“ 그, 이상한 짓을 한 게 아니라요! 그러니까요, 이를테면 제가 몽유병이라서 침대에 가둬놓고 감시하느라 밤을 새웠다든가, 그런 이유를 댈 수 있지 않을까요? ”

귀엽고도 어설픈 변명에 히페리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훗 하고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아리스텔라의 어깨를 안았다.

“ 변명 같은 건 필요 없습니다. ”

“ 대신관님? ”

“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성녀님을 보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요. ”

그렇지만 히페리온이 곤란해지는 것이 아닐까. 곧이곧대로 성녀의 밤 시중을 들었다고 말할 수 있을 리도 없지 않은가. 아리스텔라는 상황 파악도 못하고 욕심을 부린 간밤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뭐라고 변명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어, 조용히 히페리온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그의 등을 쓰다듬었다.

‘ 세상에……. ’

매끄러운 등에는 간밤에 자신이 할퀸 자국이 가득 남아있었다. 히페리온은 아리스텔라의 무리한 요구에도 응해 밤새도록 그녀를 기쁘게 해 주었는데, 그녀가 그에게 남긴 것은 피로와 상처와 사제의 계율을 깼다는 오명뿐이었다.

“ 흐윽……! ”

“ 성녀님, 울지 마세요. 저는 괜찮습니다. ”

“ 그렇지만……. ”

왈칵 눈물이 흘러나오는 것을 참으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훌쩍훌쩍 우는 아리스텔라의 눈물을 닦아주며 히페리온이 난처한 듯 미소 지었다.

“ 성녀님께서 우시면 제가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진정하세요. ”

“ 흐윽, 네……. ”

히페리온은 아리스텔라의 어깨를 토닥이며 진정시키고는, 옷을 입기 위해 일어났다. 아니, 일어나려고 했는데.

“ 윽! ”

“ 아얏! ”

따끔, 하고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느낌에 두 사람이 동시에 신음했다. 잡아당기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아리스텔라의 머리카락과 히페리온의 머리카락이 엉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두 사람 모두 머리카락이 길기 때문일까. 히페리온은 좀처럼 머리가 헝클어지지 않는 편이었는데, 지금은 마치 아리스텔라에게 매달리듯이 그녀의 머리카락에 제 것이 휘감겨 있었다.

“ 어쩌죠? 엉킨 걸 잘라내야 하는데, 여기는 가위가……. ”

“ 아, 아닙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

성녀의 방에는 날붙이가 없었다. 성의를 입은 상태라면 그 어떤 날붙이의 공격이라도 막아낼 수 있지만, 혹시라도 그녀가 다치는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지금처럼 알몸인 상황을 가정해서가 아니라.

히페리온은 손 위에 검은 머리카락과 물빛 머리카락이 복잡하게 엉켜 있는 부위를 올려놓고, 손끝으로 슬슬 돌리며 문질렀다. 그의 손끝에서 하얀 빛이 반짝이더니, 엉켜 있던 머리카락이 스르륵 풀렸다.

“ 와아, 금방 풀렸어요. 꼼짝없이 잘라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

“ 잘라내면 아깝지 않습니까. ”

“ 아, 그러네요. 대신관님 머리카락이 그렇게 아름다운데 자르면 아깝죠. ”

히페리온은 아리스텔라의 머리카락을 차마 자를 수 없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으나, 아리스텔라는 태연하게 그것이 히페리온의 머리카락을 가리키는 거라고 오해했다. 히페리온은 일순 묘한 표정을 지었으나 굳이 그녀의 오해를 정정하지는 않았다.

침대에서 내려온 히페리온은 성의를 갖춰 입었다. 넓은 등에 가득한 붉은 손톱자국을 보고 아리스텔라는 민망해서 얼굴을 붉혔지만, 그녀가 남긴 흔적이 성의에 가려지자 이상하게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 내가 정말 미쳤나 봐. 왜 이러지? ’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한 남자들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누구를 선택해야 하나 끙끙 앓던 것이 불과 며칠 전이다. 그런데 간밤에는 저를 안기를 망설이는 히페리온을 유혹하고, 그를 잔뜩 곤란하게 한 주제에 반성은커녕 아쉬운 기분을 먼저 느껴버린다.

정말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여자가 된 것 같아 아리스텔라는 가벼운 자기혐오를 느꼈다. 그런 아리스텔라의 마음을 모르는 히페리온은 그저 간밤의 정사 때문에 그녀가 지쳤다고 생각해 성의를 입혀주고는 도로 침대에 눕혔다.

“ 죄송합니다, 성녀님. 어제는 제가 시종을 맡았지만, 오늘부터는 다른 이를 시종으로 들이셔야 합니다. ”

“ 대신관님은 할 일이 많을 테니까 바쁘시잖아요. 이해해요. ”

“ 바빠서가 아니라……. ”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해 성녀의 시종을 자처했으나 언제까지고 대신관의 직권을 남용할 수는 없었다. 사제와 성기사를 통솔하는 대신관은 공명정대해야 했다. 단 하루의 일탈이라면 몰라도, 계속해서 그녀의 시종을 자처하는 것은 히페리온은 물론이고 아리스텔라를 위해서도 좋지 않았다.

“ 원하시는 이를 들이겠습니다. 누구를 시종으로 삼으시겠습니까? ”

“ 어라……. 제가 고르는 건가요? ”

“ 성녀님께서 원하시는 자가 있다면, 말씀하시길. ”

그녀와 친한 조슈아일까, 아니면 기사단의 단장인 케인일까. 어쩌면 어제 저녁 그녀를 찾아온 이자크를 부를지도 모른다. 아리스텔라의 입에서 누구의 이름이 흘러나오더라도 질투하지 않으리라. 마음 깊이 다짐한 히페리온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고 아리스텔라를 바라보았다.

“ 으음……. ”

고민하는 듯, 보라색의 맑은 눈동자가 또륵또륵 굴러간다. 그 모습마저도 사랑스럽고 귀여웠다. 그러나 그녀의 입술이 오물거리며 뱉은 것은 누군가의 이름이 아니었다.

“ 시종 없이 혼자 다녀도 되나요? ”

“ 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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