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금된 성녀와 비밀의 밤-124화 (124/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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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아직 길기에

[124]

방으로 돌아온 이자크는 옆 침대에서 자고 있는 에른스트를 깨우지 않도록 조심해서 자신의 침대로 돌아왔다. 시간은 자정이 넘었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이자크는 성녀의 방에서 내쫓겼고, 히페리온은 남았다. 히페리온이 시종이니 그럴 법한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에게 진 듯한 기분이 들어 울컥 화가 났다.

‘ 대신관과 말단 성기사니까, 그래서……. ’

거기까지 생각하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성녀는 직위로 사람을 차별하는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사제와 성기사 사이에는 분하게도 < 급 >이 존재했다. 그에 동의하고 반발하고는 둘째치고라도, 그 현실을 모르는 사람은 이 신전에 없었다.

단 한 사람, 성녀 아리스텔라를 제외하고는.

도움을 청하기 위해 기사단을 찾아온 아리스텔라를 모욕하고 범한 죄는 죽음으로도 갚기 힘들었다. 그런데도 아리스텔라는 이자크를 처벌하지 않았고, 그가 자신을 범하고 모욕한 일을 비밀로 해주었다.

자신을 범한 남자를 다시 마주하는 것이 괜찮을 리가 없었다. 신전에서 내쫓거나 접근금지 처분을 내려도 모자랄 판에, 아리스텔라는 이자크를 피하지도 원망하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대했다.

아니, 그러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그것은 그녀가 신전의 주인인 성녀이기에, 제 종의 허물을 덮어주려는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이자크에게도 로이드처럼 곁을 지킬 기회를 주려는 것일까.

이자크는 그날로 돌아간다면 제 멱살을 쥐고 바닥에 처박았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했고, 오늘 겨우 용기를 내 찾아간 방에서는 히페리온이 내내 감시한 탓에 이자크는 그날의 일을 사과하며 제 진심을 전하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 진심이라. ’

이자크는 가볍게 한숨을 쉬고 선반 위의 작은 상자를 바라보았다. 붉은 색의 비단으로 표면을 싸고 금박의 인장이 찍힌 상자였다. 거짓을 삼키고 진실을 말하게 하는 꽃, < 카루스 엔타타 >. 스프라우트 지역의 특산품으로, 한 송이에 저택 한 채가 왔다 갔다 하는 보물이었다.

클로비스는 신전을 떠나 황궁으로 돌아가면서, 제가 챙겨온 나머지 꽃차를 이자크에게 건네주었다.

< 뭐야. 이런 거 필요 없어. >

< 너는 솔직하지 못한 놈이니, 꽃차의 힘이라도 빌려야 할 거다. >

< 필요 없다니까! >

< 그렇게 뜨거운 눈빛으로 성녀님을 뚫어져라 쳐다본 주제에 말이냐? >

< ……. >

< 마도구의 힘이라도 빌리지 않으면 분명 말 한마디 걸지 못하고 속앓이만 하겠지. 못난 놈. >

쯧쯧 혀를 차면서, 클로비스는 싫다는 이자크의 허리춤에 비단으로 싼 작은 상자를 찔러 넣었다.

< 성녀님은 상냥하고 정이 많은 분이니까 말이야. 네가 좋다고 매달리면 내치시진 못할 거다. >

< 매달리긴 뭘 매달려. 쪽팔리게……. >

< 가진 것을 전부 내던지고 전력으로 매달려도 얻기 힘든 게 사람의 마음인데, 자존심부터 따지고 있으니 네 녀석이 아직 덜 굶었구나. >

그렇게 비난조로 말하면서도, 풋, 하고 웃으면서 클로비스는 이자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신전에 오기 전에는 그렇게나 싫어하던 형이었는데, 이상하게 제 머리에 손을 대는데도 싫지가 않았다.

< 너무 망설이지 마라. 빼앗길 테니까. >

욱씬.

클로비스의 마지막 말에 이자크는 심장이 조여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때 조여든 심장은 그가 신전을 떠나고 며칠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제 형인 클로비스와 함께 성녀를 안았다. 성녀 아리스텔라와 위그멘타르가 다르다는 것을 아직 인지하지 못하는 이자크는 아직도 눈을 감으면 알몸으로 신음하는 아리스텔라의 환상이 떠올라 금세 몸이 뜨거워졌다. 고개를 붕붕 저어 불온한 상상을 떨쳐내고, 이자크는 대충 옷을 벗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은 제법 밝아서, 천장의 무늬까지도 잘 보였다.

‘ 성녀님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시는 걸까. ’

이자크가 아리스텔라의 요염한 모습을 떠올리고, 꿈속에서 몇 번이나 그녀를 안는 것처럼, 그녀도 자신과 몸을 섞었을 때의 기억을 떠올릴까. 그의 꿈을 꿀까. 이자크는 마음을 전할 기회를 만들지 못하는 지금의 현실이 답답했다.

‘ 빼앗기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지. ’

가져본 적이 있어야 빼앗길 것이 아닌가. 지금 성녀 아리스텔라는 대신관 히페리온과 전 단장 로이드, 거기에 현 단장인 케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모르긴 몰라도 사제들 가운데 성녀를 흠모하는 자는 더 있을 것이다. 그런 쟁쟁한 남자들 사이에서 이자크가 아리스텔라의 마음 한 구석이나마 차지할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이자크는 손안의 작은 상자를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안에 들어있는 꽃 덩어리가 사브작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것을 몇 번 더 굴리며 상태를 살피다가, 다시 선반 위에 올려놓았다.

아직 이것을 쓸 필요는 없을 것이다. 마도구의 힘을 빌려 하는 고백이라니, 남자답지 못했다. 정 그녀와 대화할 기회를 잡지 못하면 억지로라도 만들면 되는 것이다. 혈기왕성한 훈련생 시절부터 그 무대포 기질 때문에 사고뭉치로 불리던 이자크는 제 별명을 다시금 상기하며 눈을 감았다.

◇ ◆ ◇ ◆ ◇

“ 아응! 아아……! ”

벌써 몇 번이나 몸을 섞은 것일까, 가늘가늘 요염했던 목소리가 끊어질 것처럼 힘겹게 흘러나왔다.

땀으로 번들거리는 피부가 맞닿은 채로 문질러질 때마다 야릇한 신음이 흐르며 물방울이 튀었다. 그것은 달빛을 받아 은색으로 반짝이며 흩어졌다가 시트 위에 후두둑 떨어졌다.

“ 하으, 대신관, 님……. 제발……. ”

“ 제발, 무엇을 말입니까? ”

희고 매끄럽던 남자의 등에는 붉은 실선이 가득했다. 절정의 순간, 욕망에 삼켜지는 것을 두려워한 아리스텔라가 필사적으로 매달려 할퀴어댄 탓이었다. 평생 등에 상처 한 번 입어본 적이 없거늘, 히페리온은 그녀가 남긴 붉은 자국이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처음에는 아리스텔라를 보고 순진한 인상 때문에 토끼를 닮았다고 생각했고, 그 다음은 작게 몸을 움츠리고 경계하는 모습이 작은 새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사정없이 할퀴어대는 것을 보면 고양이를 더 닮은 것 같았다.

“ 제발, 앗……. ”

“ 더 해 달라는 말씀이신지요? ”

히페리온이 상체를 일으켜 허리를 부여잡자, 안쪽을 찌르던 각도가 바뀐 탓에 아리스텔라는 또 신음하며 몸을 비틀었다.

“ 흐읏, 아……. ”

커다란 침대 위에 몸을 축 늘어뜨린 아리스텔라는 이제 눈물을 닦는 것조차 하지 못하고 히페리온이 흔드는 대로 가련하게 이리저리 몸을 떨고 있었다.

아리스텔라의 허리를 단단히 부여잡고서, 히페리온은 삽입한 채로 허리를 진동했다. 안쪽에서 꿈틀거리며 굵직한 성기가 내벽을 문질러주는 쾌감에, 아리스텔라는 말을 잇지 못하고 새된 교성을 흘렸다.

“ 하으으응……! ”

허벅지와 엉덩이가 애액으로 질척했다. 두 사람이 엉켜있는 침대 시트 또한 체액과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상태였다. 그런데 아리스텔라는 조금도 불쾌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잘 움직이지 않는 손에 힘을 주어 구겨진 시트를 다시 움켜쥐고 히페리온을 바라보자, 그가 천천히 허리를 뒤로 뺐다가 다시 앞으로 움직였다.

느릿하게 빠져나갔던 성기가 다시 안으로 밀려들어오며 그녀의 질 내벽의 주름을 하나하나 맛보듯이 침범했다.

“ 아, 아읏, 아아응……. ”

“ 후우……. ”

눈물 때문에 시야가 흐릿했다. 힘들고 지쳐서 시트를 움켜쥐는 것이 고작이다. 그런데도 아리스텔라의 몸은 여전히 민감하고 뜨거웠다.

그렇게 몸을 섞었으면 물릴 만도 하건만, 제 안으로 남자의 성기가 밀려들어올 때마다 속살을 오물거리며 맛있다는 듯이 집어삼켰다.

“ 좋아……, 좋아요……. 흐윽……! ”

이성도 감정도 마비되어, 오로지 색정만을 느끼게 된 몸은 히페리온의 허리가 움직일 때마다 찌르르한 쾌감에 전율했다. 온 몸이 녹아버리는 것처럼 뜨거운데, 벗어날 수가 없었다. 연결된 성기에서 뚝, 뚝 떨어진 음란한 액체가 침대 시트에 또다시 물방울 자국을 남겼다.

“ 하아, 하아……. 대신관님……. ”

“ 아름다우십니다, 성녀님. ”

“ 아읏, 그럴……리가……. ”

아리스텔라는 헉헉거리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엉망이 되었고, 온몸이 체액과 땀으로 흠뻑 젖어 번들거렸다. 쾌감에 머릿속이 몽롱해져 표정관리가 되지 않을 정도로 풀어진 자신의 얼굴이 예뻐 보일 리 없었다.

그러나 히페리온의 눈에는 아리스텔라의 흐트러진 모습이 무엇보다도 아름다웠다. 제 팔 안에서 쾌감을 느끼고 절정에 오르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히페리온은 진정으로 기쁨을 느꼈다. 성교에서 얻는 쾌감과는 다른 벅차오르는 무언가가 가슴을 꽉 채웠다.

사랑하는 여자가 자신으로 인해 쾌감을 느끼고 기뻐한다. 그것만으로 히페리온은 몇 번이나 절정에 올랐다. 그녀를 더욱 만족하게 해주고 싶었다. 밀려드는 쾌락을 감당하지 못하고 덜덜 떨다가 비명을 지르며 가버리는 모습을, 다시 보고 싶었다.

“ 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당신입니다……. ”

세상을 창조하고, 세상을 다스리며, 온 세상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전능하고도 지엄한 존재. 제 안의 세계를 지배하는 신은 바로 눈앞에 있다.

이것이 신과의 교감이 아니라면 무엇이라는 말인가.

“ 앗, 으응, 아앙! ”

“ 성녀님, 부디……. ”

부디 그 아름다운 자태를 자신에게만 보여 달라고 말하려 했으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부드럽고 쫄깃하던 속살이, 지금은 마치 남자의 정액을 남김없이 뽑아내기라도 할 것처럼 강하게 수축했기 때문이었다.

“ 흐읏……! ”

기둥을 조이는 압박감과 함께, 귀두에 닿는 말랑한 속살이 꿈틀거리며 끝을 간질이자, 히페리온은 버티지 못하고 아리스텔라의 몸 위로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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