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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진실을 알고 있다
[121]
뿌연 김이 가득 찬 시야 너머로 주홍색의 불빛이 아른거리는 것이 보였다. 욕실을 가득 채우는 수증기 때문일까, 두 사람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찰랑거리는 물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 아읏, 대신관님……. ”
히페리온은 성급하게 몸을 겹치지 않고, 단지 그녀를 안은 채로 천천히 몸을 매만졌다. 귀 뒤에서부터 가느다란 목덜미를 지나 등줄기를 따라 천천히 쓸어내리는 것만으로, 아리스텔라는 히페리온의 어깨에 기대며 젖은 한숨을 내쉬었다.
따스한 성수가 두 사람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손바닥으로 성수를 떠올려, 원을 그리듯 천천히 쓰다듬다가 등뼈를 따라 꾹꾹 눌러주자, 아리스텔라의 입에서 야릇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 하아, 기분 좋아요……. ”
따스한 물과 부드러운 손길, 피로를 풀어주는 시원한 마사지만 생각한다면 지금의 상황은 별로 색스러운 분위기는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을 쓰다듬는 우아한 손길과는 별개로, 성수에 젖은 얇은 성의 너머로 불쑥 솟아오른 히페리온의 성기는 아리스텔라의 다리 사이를 쿡쿡 찌르고 있었다.
“ 으응, 으으응……. ”
기분 좋은 부위를 건드리며 재촉하는 애무에 이끌려, 아리스텔라는 히페리온의 허벅지 위에 걸터앉아 그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봉긋한 여자의 가슴이 매끄럽고 단단한 남자의 가슴에 맞닿아 꽉 눌렸다.
몽글몽글하고 탄력 있는 가슴은 아리스텔라가 몸을 비척거릴 때마다 이리저리 눌렸고, 그럴 때마다 붉은 젖꼭지는 성의 너머로 히페리온의 가슴을 간질였다.
“ 성녀님. 고개를 드세요. ”
“ 하으, 네……. ”
아리스텔라가 눈을 깜박여 속눈썹에 맺혀있던 물기를 털어내고 히페리온을 바라보았다. 욕망에 젖어든 두 남녀의 눈동자가 서로의 모습을 비추었다가, 스르륵 도로 감겼다.
“ 읍, 흐응……. ”
촉촉한 입술이 겹치고, 말캉한 혀끝이 서로의 입술을 스쳤다. 히페리온은 손끝으로 아리스텔라의 젖은 머리카락을 빗어 내리며 각도를 바꾸어 키스했다.
‘ 기분 좋아……. ’
몸을 섞을 때의 쾌감과는 조금 다르지만, 아리스텔라는 키스하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 지금처럼 혀끝으로 서로의 입술을 간질이기만 하면서 가볍고 촉촉한 키스를 나누는 것이 기분 좋았다. 작은 혀를 빼꼼 내밀어 입가를 핥으면, 붉고 긴 혀가 부드럽게 그녀의 입가를 핥아준다.
“ 후우우……. ”
“ 성녀님. 입을 맞추는 것은 본래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어 상대를 높이는 행위였답니다. ”
“ 그런……가요? ”
“ 예. ”
성녀는 입맞춤으로 사제에게 은총을 내리고, 신의 은총을 받은 사제는 이전보다 조금 더 신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두 사람이 키스로 서로에게 나누어준 것은 무엇일까.
“ 성녀님께서는 제게 축복을 나누어 주시는데……. 저는 무엇을 드리면 좋을까요. ”
축복이라. 아리스텔라는 히페리온에게 축복을 나누어줄 생각으로 키스한 것이 아니었다. 그와 키스하면 기분이 좋으니까, 두근거리니까, 행복해지고 싶어서 입을 맞춘 것이다.
‘ 사랑을 주세요. ’
그렇게 말하면, 히페리온은 당황할까. 그녀를 섬기는 종에게 연인처럼 사랑해달라고 요청한 것은 확실히 제 권력을 휘둘러 무리한 요구를 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연애경험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색욕을 품는 것이 죄가 되는 사제에게, 연인 흉내도 아닌 진짜 연인이 되어 달라 말하는 것은 과한 요청일 것이다.
어차피 그가 아리스텔라의 진짜 연인이 된다 한들, 아리스텔라는 그만의 연인이 될 수 없으니.
“ 이미 많은 것을 주셨잖아요. 더 바라는 건 없어요. ”
“ 그렇……습니까. ”
이미 제 몸과 마음을 모두 바치겠노라 맹세하고서, 아직도 더 바칠 것이 남아있다는 말은 어불성설이었다. 확실히 히페리온은 성녀에게 거짓을 고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사랑을 바치고 있지만, 진실을 말하지 않은 죄를 짓고 있었다.
“ 그렇다면, 이쪽은요? ”
히페리온의 손이 미끄러져 내려와 엉덩이를 쥐더니, 제 쪽으로 끌어당겨 서로의 성기를 문질렀다.
“ 으응! ”
성수로 가득 찬 욕조. 얇은 성의 너머로 느껴지는 단단하고 굵은 성기의 감촉은 맞닿은 것만으로 그녀의 몸을 뜨겁게 만들었다. 키스로 붉어진 입술에서 차츰 색스러운 신음이 흐르기 시작하더니, 숨이 가쁜 것도 아닌데 아리스텔라의 가슴이 빠른 속도로 오르내렸다.
“ 아응, 하으응, 하아……. ”
“ 원하시는 것이 있는 모양이군요. ”
“ 네, 네에……. ”
히페리온의 허벅지 위에 걸터앉은 채로, 아리스텔라는 스스로 허리를 움직여 성기를 비비기 시작했다. 히페리온은 그녀의 자세가 무너지지 않도록 엉덩이와 견갑골 아래를 감싸 받치고는, 촉촉하게 젖어 물방울을 떨어뜨리는 옆머리에 입을 맞추고 귓바퀴를 핥았다.
“ 하으, 흑……! ”
아리스텔라가 팔을 허우적거릴 때마다 첨벙이는 물소리가 욕실 안에 울려 퍼졌다. 주홍색의 불빛을 받은 물결이 넘실거리는 모습이 마치 금과 석양을 녹여 만든 것 같았다.
첨벙거리는 물소리, 촉촉한 혀가 제 귀를 핥는 소리, 수증기 때문에 유달리 크게 느껴지는 숨소리와 신음소리가 어우러졌다가 어지럽게 흩어졌다.
“ 아아, 대신관님……. ”
“ 성녀님. 기분이 좋으신가요? ”
“ 흐읏, 아……. 아니요……. ”
처음엔 문지르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았다. 따스한 물이 부드럽게 제 몸을 감싸오는 감각도 편안했다. 그러나 물속에서도 확연이 할 수 있을 만큼 미끈한 액으로 젖어버린 제 음부에, 마찬가지로 성수가 아닌 다른 것으로 축축하게 젖은 성의가 문질러지는 감각은 그녀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 이, 이걸로는……. 부족해요……. ”
아리스텔라가 히페리온의 옷자락을 붙잡고 끌어당겼다. 여자의 손으로 벗길 수 없는 성의는 단지 그녀의 손이 이끄는 대로 이리저리 끌려갈 뿐이었다.
“ 히페리온 대신관님은……. 지금 이대로도, 충분하신가요……? ”
물기어린 눈동자에 조금씩 원망의 빛이 서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흥분한 것을 알고 있으면서, 스스로 보챌 때까지 원하는 것을 주지 않는 것도 야비한 일이리라. 히페리온은 아리스텔라에게 가볍게 키스하고는 빙긋 웃어 보였다.
“ 아니요. ”
제 위에 걸터앉은 아리스텔라의 몸을 살며시 밀어내고, 히페리온은 제 몸을 감싼 성의를 풀어헤쳤다.
성수에 흠뻑 젖어 몸에 달라붙어 있었음에도, 본디 매듭이 없이 허리띠 하나에만 의지하여 여며져 있던 옷자락은 어렵지 않게 주인의 몸을 떠나갔다.
물기를 머금고 축 늘어진 무거운 옷자락을 욕조에 걸쳐두고, 바야흐로 알몸이 된 남자는 욕조 벽에 기댄 채 가늘게 헐떡이는 여자를 끌어안았다.
여자란 어째서 이토록 작고, 가련하며, 부드럽고 따스한 것일까. 힘주어 안으면 부서져 버릴 것 같으면서도, 놓아버리면 손안의 모래알처럼 스르륵 빠져나가 사라져 버릴 것처럼 덧없었다. 사랑스러운 여인은 분명 제 품안에 있는데도, 이상하게 애틋한 느낌이 들었다.
“ 성녀님. 안을 풀지 않아도 괜찮으시겠습니까? ”
“ 네. 괜찮……으니까, 빨리……. ”
언제부터 이렇게 참을성이 없어졌는지 알 수가 없다. 사제처럼 고행을 하는 훈련은 하지 않았어도, 아리스텔라는 비교적 인내심이 강한 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저 닿기만 하는 것만으로 애가 타서 견딜 수가 없었다.
“ 대신관님이, 제게……. 참지 말라고, 했잖아요……! ”
“ 예. 그리, 말씀을 드렸지요……. ”
흥분으로 붉게 물들기 시작한 아리스텔라의 몸을 살짝 일으켜 다시 제 위에 앉힌 뒤, 히페리온은 실룩거리는 그녀의 입구에 제 것을 밀어 넣었다.
“ 아아아! ”
드디어 원하던 것을 얻은 여자의 몸은 마치 굶주린 짐승처럼 남자의 성기를 집어삼켰다. 손가락과 성기로 입구를 문지른 것뿐이고 안을 풀어준 것도 아닌데, 그녀의 속살은 기다렸다는 듯이 꿈틀거리며 제 안에 파고든 굵직한 성기에 달라붙었다.
물속이기 때문일까. 미끈거리는 애액이 흘러내려 삽입을 부드럽게 도우면서도, 뜨거운 속살이 쫀쫀하게 조여들면서 남자의 성기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꽉 억눌렀다.
“ 성녀님. 이……렇게 조이시면,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
“ 흐앗, 아니, 하지만……. ”
간질간질하면서도 오싹오싹한 감각이 음부에서 아랫배로, 척추를 타고 목 뒤에서 정수리까지 슬금슬금 기어 올라왔다. 그 오묘한 감각에 익숙해질 즈음, 겨우 느슨해진 압박에 히페리온이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 아아, 그만, 그만……. ”
“ 읏, 성녀님……. ”
“ 하읏, 조금만 더……! ”
그만 하라는 건지, 더 해달라는 건지. 상반된 말을 되뇌면서 아리스텔라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기분이 좋으면서, 한편으로는 무섭기도 했다. 그래서 더 해줬으면 싶은 동시에 그만둬 주기를 바라기도 했다. 이런 모순된 감정은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
마치 < 열지 마시오 >라고 써진 상자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열어선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본능적인 호기심에 자꾸 시선이 가고 손길이 가는 것. 그 궁극적인 욕망의 근원은 호기심이었다.
히페리온이 만져주는 손길이 전해주는 음란한 쾌감에 머릿속이 녹아버릴 것 같아 두려운데도, 여기서 멈추지 않고 끝까지 계속하면 어떤 쾌감이 밀려올지 궁금했다.
상자의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 아아, 제발……. 제발, 대신관님……. ”
“ 성녀님, 어떻게 할까요. 그만두기를 바라십니까? ”
“ 흣……. 아니, 아아……. ”
어쩌면 그 쾌감은 단지 기분 좋은 것뿐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자신이 자신이 아니게 되어버리는 기묘한 느낌. 한 번 그것을 알아버리면 이제까지 자신이 지켜왔던 여자로서, 인간으로서의 무언가가 무너져 내릴 것 같으면서도, 그 야릇한 충동을 참을 수가 없었다.
“ 끝까지, 끝까지……해주세요……. ”
“ 멈추지 말고 끝까지, 말씀이시군요. ”
“ 흐읏, 네에……. ”
알고 싶다.
이 쾌감의 끝에는, 무언가 보일 듯 말 듯 흐릿한 덮개로 덮인 것 같은 이성의 마지막 저지선 너머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 나, 나를……. 마음대로 해도 좋으니까, 제발 멈추지 마세요……! ”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어리석은 인간은 결국, 상자의 뚜껑을 열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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