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금된 성녀와 비밀의 밤-120화 (12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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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진실을 알고 있다

[120] 물은 진실을 알고 있다

어느덧 하늘이 어두워졌다. 마법 수업을 마치고 이야기를 하느라 시간을 잊고 있던 아리스텔라는 창밖이 어두워진 것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시계는 어느덧 자정을 향해 가고 있었다.

“ 어머,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요. 이자크,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은가요? ”

대신관 히페리온이야 둘째치더라도, 이자크는 기사단 숙소에서 룸메이트와 함께 방을 쓰고 있다. 아리스텔라를 방문한다는 보고를 하고 나왔는지는 몰라도 이 시간까지 돌아가지 않는다면 문제가 될 것이다.

“ 아, 아닙니다. 이제 돌아가 봐야 합니다. ”

룸메이트인 에른스트는 시시콜콜한 것을 묻지 않는 성격이었지만, 자정이 되도록 돌아가지 않는다면 사정을 궁금해 할 것이다.

아무리 대신관 히페리온이 함께였다한들 이자크는 말단 성기사였다. 로이드나 케인처럼 그녀의 시종을 맡은 적이 있었다면 모를까, 성녀의 축복조차 받지 못하고 미사실에서 내쫓겼던 이력이 있는 이자크가 성녀의 방에서 이렇게 늦게까지 시간을 보내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았다.

“ 대신관님의 시종 업무도 끝이로군요. 함께 돌아가시죠. ”

사제들의 숙소는 동쪽이고 성기사들의 숙소는 서쪽이니 <함께>라고 말할 것도 없었지만, 이자크는 일부러 확인하듯 힘주어 말했다. 히페리온을 견제하는 듯한 말투의 기저에는 그에 대한 원망도 깔려 있었다.

‘ 대신관이 없었으면 성녀님과 좀 더 친근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을 텐데. ’

방까지 찾아왔으니 하다못해 손이라도 잡아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했건만, 신께서 제 흑심을 미리 알고 방해를 놓은 것인지 이자크는 아리스텔라의 몸에 손끝하나 대지 못했다.

물론 히페리온이 이자크를 견제한 이유에는 그녀와 단둘이서 보내는 시간을 방해한 것에 대한 원망이 깔려 있었으나, 서로 친분 교류가 없는 두 남자는 대화를 나누지 않고 서로를 방해물로 여겨 속으로 원망하는 선에서 그쳤다.

“ 그럼 성녀님. 저는 이자크와 함께 물러가겠습니다. 그만 쉬십시오. ”

“ 네……. ”

이자크와 히페리온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아리스텔라도 두 사람을 따라 일어났다. 아리스텔라의 방이 넓다고는 해도 세 사람이 앉아있던 테이블에서 방문까지 가는 길은 그리 길지 않았다. 히페리온이 방문을 열고 이자크를 내보내는 것을 보며, 아리스텔라는 어쩐지 가슴이 아릿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 저어, 대신관님! ”

히페리온이 방을 나서며 문을 닫으려는데, 아리스텔라가 갑자기 그를 불렀다.

“ 무슨 일이신지요, 성녀님? ”

“ 저, 그게……. 저기……. ”

시간은 이미 한밤중이었다. 대신관인 히페리온은 새벽 일찍 일어나야 하는 처지니, 그에게도 당연히 휴식이 필요하다. 이제 그만 보내주는 것이 옳을 터인데.

“ 모, 목욕을 아직 하지 않았거든요.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

“ 목욕이요? ”

히페리온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자, 아리스텔라는 갑자기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아침에는 히페리온에게 알몸을 보이는 것이 부끄러워서 목욕을 거절했는데, 이번에는 제 스스로 도움을 요청하다니 참 모를 일이다.

간밤에 로이드가 깨끗이 몸을 씻겨준 덕분에 아침 목욕은 생략할 수 있었지만, 지하 탐방을 마치고 돌아 온데다가 마법 연습을 하면서 땀을 흘리는 바람에 목욕을 하고 싶었다. 아리스텔라는 제 행동의 모순을 합리화할 변명을 마련한 뒤 히페리온의 눈치를 보았다.

“ 예. 그리 하겠습니다. ”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히페리온이 승낙하자, 옆에 서있던 이자크의 표정이 구겨졌다. 아무리 몸을 섞었다고 한들 성녀의 목욕 시중을 들 수 있는 것은 시종뿐이었다. 이제까지 불쾌함과 원망을 담은 시선으로 이자크를 견제하던 히페리온의 얼굴이 여유를 되찾았다.

“ 동행은 하지 못하겠군요. 어두우니 살펴 가십시오, 이자크. ”

황망한 표정의 이자크를 복도에 버려둔 채로, 히페리온은 무거운 방문을 닫았다.

◇ ◆ ◇ ◆ ◇

“ 죄송해요. 시간이 늦어서, 돌아가서 쉬고 싶으실 텐데……. ”

“ 아닙니다. 성녀님을 보필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아무 것도 없으니까요. ”

잠 같은 것은 그녀가 부르는 순간 싹 달아나버렸다. 그녀와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을 얻기 위해서라면, 히페리온은 일주일도 밤을 새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 그러면 먼저 탈의를 돕겠습니다. 성녀님, 이리로. ”

“ 앗, 어……. 네. ”

히페리온을 붙들어둘 변명으로 목욕 시중을 요청하긴 했지만, 역시 남자가 옷을 벗겨주는 상황은 적응이 되지를 않았다. 로이드의 시중을 받으면서 타인이 제 옷을 벗겨주는 일에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히페리온의 청렴한 이미지 때문일까. 제 알몸을 그 앞에 드러내는 것이 낯부끄러웠다.

길고 우아한 손가락이 허리띠를 풀고, 옷자락을 벌렸다. 성녀의 몸을 가리던 성의가 스르륵 바닥으로 흘러내리는 모양을 보고, 히페리온은 그녀의 성의가 진정 새의 날개깃털 같다고 생각했다.

아리스텔라의 몸은 그날 밤과 마찬가지로 하얗고 가녀렸다. 창문을 닫기는 했으나 신전의 공기가 비교적 싸늘한 편이라 혹시 아리스텔라가 춥지 않을까 염려되어, 히페리온은 그녀의 몸을 살며시 안아들었다.

“ 저, 대신관님? ”

“ 욕실까지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

“ 제 다리로 걸을 수 있어요. ”

“ 밤이라 추울 테니까요. ”

팔 안의 작고 따스한 몸이 가늘게 떨리더니, 히페리온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벗은 몸을 보이는 것이 처음도 아니건만, 역시 저 혼자 알몸이 되는 것은 부끄러웠다. 그의 시선이 맨몸에 닿는 것이 부끄러워 그에게 매달린 것이지만, 히페리온은 아리스텔라가 추워서 떤다고 생각하여 빠른 걸음으로 욕실로 들어갔다.

◇ ◆ ◇ ◆ ◇

언제든 성녀가 따스한 성수로 목욕을 할 수 있도록 최적의 상태로 맞춰진 욕실은 벽과 천장 사이에 장식된 주홍빛의 조명등 덕분에 넓은 공간임에도 아늑하게 느껴졌다.

“ 이 시간에 목욕을 하는 건 처음이에요. ”

“ 그렇군요. 피곤하실 테니 얼른 끝내겠습니다. ”

히페리온이 아리스텔라의 몸을 추슬러 안고 욕조로 걸어갔다. 욕조 안에 앉혀주려는 것일까, 하고 생각했는데, 히페리온은 아리스텔라를 안은 채로 욕조 안으로 들어왔다.

“ 대신관님? ”

“ 괜찮습니다. 성의는 물에 젖어도 욕조 밖으로 나가면 금세 마르니까요. ”

“ 그, 그게 아니라……. ”

따스한 성수에 몸을 담그자, 히페리온이 입고 있던 새하얀 성의도 물에 젖어 흰 피부가 그대로 비쳤다. 아름다운 검은 머리카락도 물 위로 흘러내려 부드럽게 펼쳐졌다. 목욕 시중을 들으려 들어온 것인데, 히페리온이 욕조에 몸을 담그는 과정 자체가 마치 동화 속 천사들이 목욕하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 아……. ”

보드라운 타올이 등을 쓸어내리자, 아리스텔라는 움찔거리면서 고개를 돌렸다. 똑같이 목욕 시중을 들 뿐이라고 해도, 케인과 로이드와는 또 느낌이 달랐다. 그녀의 몸을 닦아주는 히페리온의 느릿하면서도 우아한 손길에 몸을 맡기고 있으려니 조금씩 긴장이 풀어졌다.

조명이 있다고는 해도 밤이라 욕실은 살짝 어두웠고, 물속에 몸을 담그고 있으니 방 안에서 알몸을 보일 때보다는 부끄러움이 덜했다. 아리스텔라는 나른하게 한숨을 쉬며 욕조 벽에 등을 기댔다.

“ 불편하신 곳이 있으면 말씀하십시오. ”

“ 괜찮아요. ”

누군가 몸을 씻겨주는 것은 어린아이일 때 이후로 다시는 없으리라 생각했다. 처음 아론이 몸을 씻겨줄 때는 무섭고 부끄러웠고, 그 다음 케인이 몸을 씻겨줄 때는 흥분해서 정신이 날아가 버렸지만, 이제 더는 안절부절 못하거나 부끄러워서 미칠 것 같은 기분은 들지 않았다.

‘ 신분이 높은 귀부인이나 공주님들은 꼭 시녀들이 목욕 시중을 든다고 하던데. ’

평범한 시골 아가씨였던 자신이 뭔가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것 같아서 아리스텔라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신전의 주인이자 여신의 현신인 성녀가 되었으니 어느 의미로는 공주보다 대단한 신분이지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아리스텔라는 기분 좋은 따스한 욕조 물과 섬세한 히페리온의 손길에 몸 안쪽부터 따끈따끈하게 풀어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 아응……. ”

가슴을 닦던 히페리온의 손이 아래로 향하자, 아리스텔라는 아랫배가 살짝 간질거리는 느낌에 몸을 비척거렸다.

“ 대신관님, 잠깐……. ”

“ 아래는 씻지 않으시려는 겁니까? ”

“ 거기는 제가……. ”

성교 중에는 남자의 손길이 닿는 것이 익숙한 부위지만, 목욕할 때는 아리스텔라가 스스로 밑을 닦았다. 기사인 케인이나 로이드에게 그런 시중까지 맡기는 것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 예민한 곳이라서, 타올로 하면……아파요. ”

스스로 하겠다고 말하려 했는데, 자신의 입에서 나온 것은 전혀 다른 말이었다. 아리스텔라는 제가 말해놓고도 지금 무슨 소리를 한 건가 싶어 아차 싶었지만, 말을 수습하지는 않았다.

히페리온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타올을 선반 위에 얹어놓고 아리스텔라의 몸을 살짝 끌어당겨 제 무릎 위에 앉혔다. 그의 긴 손가락이 음부에 닿자, 아리스텔라는 짧게 신음하며 몸을 떨었다.

“ 앗……! ”

“ 손으로 하는 것도 아프신지요? ”

“ 아뇨, 괜찮……으응. ”

보드라운 음순 사이를 훑으며 올라온 손가락이 클리토리스를 가볍게 문지르자, 아리스텔라는 저도 모르게 허리를 움찔거렸다. 찰랑찰랑. 두 사람이 앉은 자리 주위로 맑은 물이 일렁이는 소리가 들렸다.

“ 아, 대신관님……. ”

“ 부족한 곳이 있으신가요? ”

“ 하읏, 거, 거기……. ”

명확히 지칭하지 못하고 눈빛만 보냈음에도, 히페리온은 아리스텔라의 요구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녀의 클리토리스를 천천히 문질렀다.

“ 아, 아……. ”

그것은 씻기기 위한 동작이 아니었다. 아리스텔라의 요구대로, 그녀에게 쾌감을 주기 위한 동작이었다.

지하에서 아리스텔라와 키스했을 때, 히페리온은 분명 그녀를 안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성욕을 느낀 성녀가 안아달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는 한, 참을 생각이라고.

이자크와 함께 돌아가겠다고 방을 나설 때까지만 하더라도, 히페리온은 아리스텔라에게 손을 댈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그녀가 목욕 시중을 요구하고, 함께 욕조에 들어와 몸을 닦는 순간까지도.

‘ 대신관님은 그럴 생각도 없는데, 내가 너무 밝히는 거 아닐까. ’

아리스텔라는 그저 히페리온과 금방 헤어지는 것이 아쉬웠다. 지하실에서 그녀에게 키스할 때, 그리고 주전자의 물을 끓이다 데인 손을 핥아줄 때 그가 자신을 바라보던 시선은 분명 욕망의 빛을 띠고 있었다.

그것이 단순히 그녀와의 입맞춤에 욕정한 때문인지, 아니면 그 이상의 감정을 담고 있는지, 아리스텔라는 그것이 궁금했다. 알고 싶었다.

“ 대신관님. 제가……원하지 않으면, 하지 않겠다고, 하셨잖아요……. ”

“ ……예. ”

“ 지금 멈추시면, 저도 참을 수 있을 것 같아요……. ”

은근한 손길로 성감대를 만져주니 기분 좋은 느낌이 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몸이 흥분한 것은 아니었다. 평소엔 남자가 손을 대기만 해도 야릇한 기분이 들면서 쉬이 흥분했는데, 어째서일까.

어쩌면 그의 촉촉한 눈빛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깨끗해지는 느낌이 들어서인지도 모른다. 루비처럼 붉은 눈동자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은 아직 주저하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 어, 어떻게 하시겠어요……? ”

대답의 책임을 상대에게 전가하는 것은 비겁한 짓이다. 그러나 아리스텔라는 굳이 비겁한 질문을 던지길 택했다. 그의 대답을 듣고 싶었기 때문에.

얼굴을 붉히면서 던진 질문에, 히페리온이 답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 참지 마십시오. ”

투명한 물에 잉크를 떨어뜨린 것처럼, 그의 맑은 눈빛에 욕망의 빛이 꽉 차올랐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원고료 쿠폰 모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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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페리온과 아론, 이자크는 흑발입니다.

로이드는 은발, 케인과 크리스는 금발, 조슈아는 갈색, 노엘은 진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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