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금된 성녀와 비밀의 밤-119화 (119/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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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페리온의 개인교습

[119]

“ 성녀님께서 신성 마법을 익히는 일에 어려움을 겪고 계십니다. 이 신전의 모든 이들은 성녀님의 종이니, 성녀님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요. ”

“ 히페리온 대신관님? ”

“ 그렇지 않습니까, 성녀님? ”

아리스텔라는 이제까지 제 앞에서 조용하고 차분했던 히페리온이 갑자기 이자크에게 이러는 이유를 알지 못하고 당황했다. 아리스텔라를 바라볼 때는 그저 부드럽고 자상하기만 한 눈빛이, 고개를 들어 이자크를 향하자마자 날카롭게 빛났다.

“ 성녀님과 함께 마법을 배우는 영광된 일입니다. 거절하시겠습니까? ”

“ ……아닙니다. 하겠습니다. ”

◇ ◆ ◇ ◆ ◇

이자크는 아리스텔라의 옆에서, 히페리온은 두 사람과 마주보는 자리에서 교습을 시작했다.

“ 신성 마법의 위력은 믿음의 힘에 의해 결정됩니다. ”

“ 믿음의 힘……인가요? ”

“ 예. 신께서 창조하신 이 세계는 믿음으로 이루어져 있으니까요. ”

머릿속에 상상한 것을 구체화하여 현실로 끌어오는 것은, 결국 자신의 상상이 현실에서 일어난다는 믿음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불도 때지 않았는데 물이 끓어오르는 것을 < 있을 수 없는 일 >이라 생각하는 것과, < 가능하다고 믿는 것 >이 마법의 효력을 결정한다고 히페리온은 설명했다.

“ 성녀님. 방금 마법으로 물을 끓였을 때, 어떻게 해낼 수 있었는지 기억하십니까? ”

평범하게 주전자에 담긴 물이 갑자기 끓는 모습을 상상하기란 어렵다. 아니, 상상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실제 가능하다고 믿는 것은 어려웠다. 그래서 아리스텔라는 주전자의 물이 끊는 광경을 먼저 상상하고, 그것을 자신이 본 현실에 겹쳤다.

눈에 보이는 세계와 상상 속의 세계가 일치하는 순간, 주전자의 물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세계에 작용하는 신성력이 그녀 안의 신성력에 감응한 것이다.

“ 끓는 모습을 상상한 후에 현실의 모습을 겹쳤더니, 갑자기 끓기 시작했어요. ”

“ 예. 신성력으로 결정하는 것은 과정이 아니라 결과입니다. ”

현세의 인과는 과정이 있어야 결과가 나온다. 그러나 마법은 결과를 먼저 만들어낸 후, 그것을 세상으로 이끌어낸다. 이미 일어난 결과가 있기에 과정은 인과를 구성하는 강제력에 의해 억지로 만들어진다. 그것이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마법의 힘이었다.

“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무언가를 만드는 것은 상당한 믿음을 필요로 하는 법이지요. 그래서 처음에는 매개가 되는 물건을 변형하는 방식으로 연습을 하고는 한답니다. ”

“ 그렇군요. 그럼 이걸로도 뭔가를 만들 수 있을까요? ”

아리스텔라는 테이블 위에 놓인 제 성의를 집어 들었다. 히페리온이 침대 시트로 그녀의 성의를 만들 수 있었던 것처럼, 이 성의로도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 물론입니다. 성녀님, 무엇을 만들고 싶으신가요? ”

“ 음. 이건 옷이니까, 천으로 이루어진 거죠……. 봉제인형 같은 것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

“ 시험해 보시죠. ”

아리스텔라와 이자크는 하얀 성의의 끝자락을 잡고 마주서서, 옷자락을 변형하여 인형을 만드는 마법을 실행하기로 했다.

“ 눈을 감고, 머릿속에 만들고 싶은 형태를 그리시는 겁니다. ”

아리스텔라는 눈을 감고 머릿속에 인형의 형태를 떠올렸다. 어떤 인형이 좋을까.

‘ 성의는 하얀색이니까 토끼인형을 만들어야겠다. ’

아리스텔라는 머릿속에 토끼모양의 하얀 봉제인형을 떠올리고, 자신이 잡고 있는 성의 자락에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이자크도 뭔가를 떠올리고 있는지, 하얀 옷자락에 주름이 잡힐 정도로 꽉 부여잡고는 신성력을 흘려보내고 있다.

“ 됐습니다. 눈을 뜨십시오. ”

“ 어머……. ”

히페리온의 말에 눈을 뜨자, 아리스텔라의 손안에 작은 봉제인형이 들려 있었다. 구체적인 형태를 떠올리는 데 실패해서 눈은 달려있지 않지만, 그건 분명히 토끼 모양의 인형이었다.

“ 굉장해요. 이렇게 간단하게……. ”

“ 요령을 터득하면, 나머지는 금방이니까요. 성녀님이라면 쉬이 해내시리라 믿었습니다. ”

“ 고마워요, 대신관님. 이자크는 뭘 만들었나요? ”

아리스텔라는 히페리온에게 인사하고 이자크 쪽을 바라보았다. 붉어진 얼굴로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이자크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하얀 색의,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였다.

“ 이게 뭐예요? ”

“ 저, 그게……. ”

“ 이리 주시죠. ”

이자크가 당황하며 하얀 무언가를 가리려 했지만, 히페리온이 얼른 그의 손에서 그것을 빼앗아가버렸다.

“ 앗! ”

이자크가 당황해서 소리를 높였다. 히페리온으로부터 돌려받으려는 듯 손을 뻗었다가, 얼른 당황해서 손을 내렸다.

“ 죄, 죄송합니다. ”

히페리온은 하얀 천으로 만든 흐믈흐믈한 무언가를 내려다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 뭐를 만드신 건지 모르겠군요. ”

“ 으윽……. ”

아리스텔라의 성의였다. 비록 깨끗하게 세탁해 그녀의 온기도 체취도 남아있지 않지만, 이자크는 그 옷자락을 붙잡는 순간 머릿속에 아리스텔라의 모습이 떠올라 어쩔 줄 몰라 했다. 히페리온은 그에게 봉제인형을 떠올리라고 했지만 이자크의 머릿속에는 성의를 벗고 알몸이 된 아리스텔라의 모습만이 가득했다.

혹여 제 상상을 누군가 눈치챌까 두려워 상상 속의 아리스텔라에게 간신히 옷을 입히고 나자, 손안에는 아리스텔라의 형상을 한 인형이 추욱 늘어져 있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인형의 모습이 너무도 조악하여 아무도 아리스텔라의 모습을 한 인형이라는 것을 못 알아보는 것일까.

“ 뭘까요, 이건? 뭔가 팔랑팔랑한 게……. ”

“ 꽃도 아니고, 뭔가 생물의 형태를 한 것 같기는 합니다만. ”

“ 으으……. ”

상상을 들키지 않은 것은 다행이지만, 아리스텔라는 예쁜 봉제인형을 만들어냈는데 자신은 무엇인지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조악한 형태의 무언가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에 이자크는 민망해서 귀까지 붉어졌다.

“ 아! 혹시 이건, 새가 아닐까요? ”

“ 새요? ”

“ 네. 여기 이 부분이 새의 날개고, 아래쪽의 이게 꼬리인 거죠. 그러면 전체적인 모습이 이렇게……. ”

아리스텔라는 인형의 넓은 옷소매 부분을 날개로, 치맛자락을 새의 꼬리로 연상했다. 인형의 코와 턱 부분이 새의 윗부리와 아랫부리가 되었다.

“ 그렇군요. 새라……. 이자크. 새를 만들려 한 것이 맞습니까? ”

확실히 형태가 이상하긴 하지만, 새의 모습으로 보지 못할 것도 없긴 했다. 차마 그것이 아리스텔라의 모습을 한 인형이라고 말할 수 없었던 이자크는 망설이다가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 이자크는 새를 좋아하는군요. ”

“ 아, 아닙니다. 그건 그저……. ”

“ 후후. 새를 보니까 옛날 생각이 나네요. ”

“ 옛날 생각……이요? ”

“ 네. 고향에 있을 때는 동물을 많이 돌봤거든요. ”

아리스텔라의 집안은 시골 마을의 소작농이었다. 봄과 여름에는 밭일을 하고 가을에는 수확을 도왔다. 겨울에는 밭일을 할 수 없어 농장에 출근해 가축을 돌보고 급료를 받았다. 양을 치기도 하고 닭장을 청소하고 말의 목욕을 돕기도 했다.

먹고살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하는 삶은 고되었지만, 어린 양을 끌어안거나 말의 눈을 보는 것은 좋아했다. 말이 통하지 않더라도 감정이 있는 짐승이기 때문일까, 동물을 돌보는 것은 힘들어도 괴롭지는 않았다.

성질이 난폭한 말들도 아리스텔라가 몸을 씻겨줄 때면 얌전히 몸을 맡기고는 했다. 농장주인 아저씨가 종종 짐승도 미인은 알아본다며 아리스텔라에게 농담을 건네고는 했다.

동물들이 아리스텔라를 잘 따르는 것은 사실이었으므로 농장주인은 진심으로 한 말이었지만, 아리스텔라는 그 말을 그저 농담으로 흘려들었다.

“ 농장에 들어서면 새들이 저를 알아보고 날아오고는 했어요. 이제는 제가 없어서 누가 모이를 주는지 모르겠네요. ”

아리스텔라의 쓸쓸한 미소를 보고 히페리온은 가슴이 아릿했다.

‘ 신전에 오기 전, 고향에서 돌보던 새들을 그리워하시는 것일까. ’

아리스텔라는 그저 이자크가 만든 새 모양의 인형―사실 그것은 새가 아니라 아리스텔라였지만 이자크가 말하지 않았으니 알 길이 없었다―을 보고 문득 생각난 것을 말했을 뿐이지만, 히페리온은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의미 깊게 받아들였다.

고향에서의 일을 떠올린 그녀가 우울해하지 않도록 위로의 말을 건넬까 하다가, 혹시라도 이자크 앞에서 제 마음을 들킬까 걱정이 되었던 히페리온은 결국 담담하게 말하는 방법을 택했다.

“ 고향에서 돌보신 새들을, 아직도 생각하고 계시는군요. ”

“ 네. 그때는 그게 일상이었거든요. 새들에게 모이를 주고 나면 마구간 청소를 하고, 여물을 주고……. ”

< 마구간 >이라는 단어에 반응한 이자크가 아리스텔라에게 물었다.

“ 성녀님. 말을 타보신 적도 있습니까? ”

“ 아뇨, 저는 그냥 청소하고 먹이를 주는 일만 했거든요. 한 번도 타본 적은 없어요. ”

마차를 타본 것조차 그녀를 데리러 온 백금마차를 탔을 때가 처음이었다. 농장의 말들은 전부 갈색 말과 검은 말뿐이라, 아리스텔라는 그날 처음으로 백마를 보았다.

‘ 그러고 보니 마차를 몰던 말들은 어디에 있는 걸까. ’

신전의 사람들이 쓰는 데 필요한 물자는 무인 마차로 나른다고 들었다. 아예 신전 안에서 기르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마차로 물자를 실어 나르는 말을 잠시 쉬게 할 마구간은 있을 것이다.

그 마구간에서 쉬는 말들은 누가 돌보는 것일까. 그것도 골렘이나 요정들의 일일까. 말들이 골렘을 무서워하거나 요정이 날파리인 줄 알고 꼬리로 확 쳐내면 어떻게 될 지를 상상하며 아리스텔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리스텔라가 무엇을 상상하는지 모르는 이자크는 그녀가 고향에 있을 적 말을 돌보기만 하고 타보지 못해 아쉬워한다고 넘겨짚었다.

마구간 청소는 마법으로 만든 요정들이 대신했지만 말은 물건이 아니라 살아있는 짐승이었다. 사람의 손길로 돌볼 필요가 분명히 있었다. 그래서 기사단의 성기사들에게는 순찰 외에도 돌아가며 말을 돌보는 임무가 있었다.

‘ 성녀님께서 승마에 흥미를 붙이시면, 함께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지 않을까. ’

노엘이 성녀에게 신성 마법을 가르치고 대신관 히페리온이 그녀에게 기도를 가르치면 성기사인 자신은 무엇을 해야 하나 전전긍긍하던 이자크는 드디어 답을 찾은 기분이 들어 기뻐했다.

‘ 성녀님은 동물을 좋아하시는 것 같으니, 분명 승마에도 관심을 보이실 거야. ’

아리스텔라는 신전에 말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는데, 이자크는 혼자 머릿속으로 그녀에게 승마를 가르칠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기사단에 돌아가는 대로 오늘의 말 당번인 에른스트에게 승마 초심자도 탈 수 있을 만큼 온순한 말이 있는지도 물어보기로 결심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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