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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페리온의 개인교습
[118]
“ 늦은 시각에 실례하겠습니다, 성녀님. ”
“ 이자크? ”
늦은 저녁에 방문한 것은 오늘 아리스텔라와 동행하여 지하 탐방을 했던 이자크였다.
이자크의 얼굴은 낮에 보았을 때보다 조금 더 초조한 기색이었다. 아무래도 아리스텔라에게 전할 중요한 용건이 있어 찾아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아리스텔라는 이자크를 안으로 들였다.
“ 들어오세요, 이자크. 무슨 일인가요? ”
성큼. 무장을 한 젊은 기사가 성녀의 방 안으로 들어왔다.
히페리온과 비슷한 정도의 장신에 검은 머리를 하고 있지만 히페리온과 이자크는 미남이라는 것 외에는 별로 공통점이 없었다.
아름다운 장발에 흰 피부를 지닌 조각 같은 미남인 히페리온과, 더벅머리에 구릿빛 피부를 지닌 열혈청년 같은 이미지의 이자크. 두 남자의 묘한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여신의 현신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신전의 관리자와 기사단의 말단 신입기사였지만, 먼저 눈을 피한 것은 히페리온 쪽이었다.
“ 죄송합니다, 성녀님. 피곤하실 텐데……. ”
“ 아, 아뇨. 괜찮아요. 딱히 자려던 것도 아니었으니까. ”
비장하게까지 보이는 그의 표정에, 아리스텔라는 어쩐지 딸꾹질을 할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 뭔가 할 말이 있어서 온 건가요? 일단 좀 앉으세요. ”
“ 성녀님과 둘만 있을 때 드리려고 했는데, 도저히 기회가 오지 않아서……. ”
“ 네? 저와 둘이서만요? ”
그러고 보니 전에 로이드와 함께 기사단의 저녁 훈련을 관람했을 때도, 이자크는 내내 할 말이 있는 듯 아리스텔라 쪽을 힐끔거렸다. 그때는 그가 말하는 < 둘이서 이야기하고 싶다 >는 말을 로이드와 둘이서 있고 싶다는 말로 이해하고 자리를 비켜 주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이자크는 아무래도 로이드가 아니라 아리스텔라에게 용건이 있던 듯했다.
“ 이 자리에서는 하기 어려운 이야기인가요? ”
아리스텔라는 히페리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이자크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날 밤 이후로 이자크는 아리스텔라에게 고분고분해지긴 했어도, 완전히 안심할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녀에게 욕정을 느끼는 젊은 기사가 아닌가.
아리스텔라가 허락했음에도 손을 대지 않았던 히페리온이라면 몰라도, 이자크를 상대로 색정적인 상황이 발생한다면 또 몸을 섞는 분위기로 흘러가버릴 것이다. 적어도 히페리온이 시종으로 있는 오늘 하루 동안은 그런 실수를 하고 싶지 않았다.
“ 사적인 이야기입니다만……. 히페리온 대신관님 앞에서 해도 괜찮겠습니까? ”
“ 으음, 이자크의 사적인 이야기인가요? ”
사적인 이야기라. 기사단의 일이나 개인적인 가정사 같은 것일까. 호적상 남남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클로비스 집행관이 이자크의 형이라고 했지. 이자크가 숨기고 싶어 하는 이야기라면 히페리온이 듣는 자리에서 말하라는 건 조금 가혹할지도 모른다.
“ 이자크. 오늘은 히페리온 대신관님이 제 시종이니, 이분을 내보낼 수는 없어요. 만약 대신관님이 있는 자리에서 하기 어려운 이야기라면 다른 날 다시 오세요. ”
아리스텔라는 히페리온을 믿었다. 히페리온이라면 이자크의 숨기고 싶은 개인사를 알게 되더라도 그것을 가십삼아 떠들어대거나 약점으로 잡고 그를 곤란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들려주기 싫은 이자크의 기분도 존중했다. 그래서 이자크와 둘만 있는 상황이 불안했던 아리스텔라는 선택을 이자크에게 떠넘겼다.
“ ……계속 미루기만 하는 것도 예의가 아닐 듯하니, 그럼 이 자리에서 건네드리겠습니다. ”
“ 네? 뭐를요? ”
사적인 이야기라기에 개인사를 털어놓기라도 하려는 줄 알았건만, 아무래도 이자크는 아리스텔라에게 상담이 아니라 전할 물건이 있어 찾아온 것 같았다.
‘ 보이기 부끄러운 사적인 물건이라도 되는 걸까? ’
아리스텔라는 의구심에 고개를 갸웃하면서 이자크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자크가 품에서 꺼낸 하얀색의 무언가를 보았을 때, 아리스텔라는 할 말을 잃고 딱딱하게 굳을 수밖에 없었다.
“ 아……! ”
그것은 다름 아닌 아리스텔라의 성의였다.
로이드가 그녀를 범한 죄로 감옥에 갇혀 처형을 기다리고 있을 무렵, 기사단의 성기사들을 설득하러 갔다가 계단에 나와 있는 이자크와 마주쳤다. 그것이 두 사람의 첫 만남이었다.
아리스텔라는 그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도움을 요청했으나 이자크는 그녀를 모욕하고 범했다. 그리고 아리스텔라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맞아. 분명 그때 기사단의 창고에서……. ’
정신을 잃은 순간 몸의 주도권은 여신 위그멘타르에게로 넘어갔을 터였다. 아리스텔라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알몸으로 복도를 걷고 있었으니까.
정신이 나간 사이에 또 처음 보는 남자와 몸을 섞었다는 사실에 패닉에 빠져 울기만 하던 아리스텔라를 발견해 달래준 것이 히페리온이었고, 그날 밤 두 사람은 첫 관계를 가졌다.
‘ 하필이면 히페리온 대신관님이 내 시종을 맡은 날에……. ’
아리스텔라는 당황하여 말을 잇지 못하고 눈만 깜박이며 히페리온의 눈치를 살폈다.
그날 아리스텔라는 이자크와 관계를 가지고, 기사단의 창고에 제 성의를 벗어둔 채로 나와버렸다. 정확히는 알몸으로 돌아다닌 것은 아리스텔라가 아니라 여신 위그멘타르였지만, 이자크는 아리스텔라와 여신 위그멘타르를 구분하지 못할 것이다.
히페리온은 이미 아리스텔라가 몇 번이나 다른 남자와 몸을 섞은 사실을 알고 있고, 이자크 또한 아리스텔라가 섹스에 있어서 초심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문제는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리스텔라는 히페리온 앞에서 이자크와 관계를 가진 증거가 드러나자 적잖이 당황했다.
이자크와의 첫 섹스는 아리스텔라의 기억에도 없는 일인데, 마치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대신관님, 저기. 이건……. ”
“ ……. ”
히페리온은 무표정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실은 그도 무척이나 당황하고 있었다. 누가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맞은 것처럼 얼얼했다.
아무리 아리스텔라가 다른 남자와 밤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 < 다른 남자 >가 막연한 가상의 상대일 때와 구체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누군가, 그것도 눈앞의 상대일 때는 충격의 정도가 달랐다.
이자크는 그저 아리스텔라의 성의를 깨끗하게 세탁해 돌려주러 온 것일 뿐인데, 히페리온은 이자크의 다부진 손에 들린 고운 성의를 보는 것만으로 두 사람이 몸을 섞는 광경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 같아 옷소매를 꽉 부여잡았다.
‘ 침착하자. 내가 간섭할 일이 아니야. ’
아리스텔라는 음욕의 여신을 그 몸에 봉인한 성녀이고, 성녀를 따르는 성기사가 여신의 힘에 이끌려 그녀에게 욕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이자크가 아리스텔라와 몸을 섞었다고 해서 비난하거나 처벌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자신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었다. 아리스텔라의 연인인 것도, 마음을 고백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 성녀님의 성의를 돌려주러 와줘서 고맙습니다, 이자크. ”
히페리온은 최대한 태연한 얼굴로 이자크에게 말을 건넸다. 그러나 그 미묘한 표정 변화로, 이자크는 히페리온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제아무리 혈기왕성한 신입기사라도 상전의 심기가 불편한 것을 모를 만큼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이자크가 훈련소에서 사고를 치고 다니던 것은 눈치가 없어서라기보다는 반쯤 오기로 인한 것이었으니까.
어째서일까. 여기서 물러나는 것이 제 신상에 이로울 거라는 것을 아는데, 이자크는 그러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사제와 성기사를 모두 통솔하는 신전의 관리자 앞에서 오기를 부리기로 했다.
“ 돌려드리는 것이 늦어 죄송합니다. 바로 돌려드리러 왔어야 했는데, 기회가 오지 않아서……. 계속해서 숨겼다가 혹 다른 사람에게 발견되면 그것이 더 큰 폐가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
“ 아……. 그, 그랬군요. ”
기사단은 단체 생활이다. 단장이었던 로이드나 현 단장인 케인쯤 된다면 독방을 쓰지만, 이자크는 동기인 에른스트와 한 방을 쓰고 있었다.
성인 남자들이니 서로의 벽장을 뒤지거나 하지는 않지만, 이자크는 언제까지고 제 방안에 아리스텔라의 성의를 보관하고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아리스텔라와 다시 한 번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성의를 돌려주기 위해서, 라는 명분으로라도 좋으니, 그녀와 천천히 그 날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대신관 히페리온이 듣는 앞에서는 불가능할 것이다.
“ 으음, 이걸로 제 성의가 두 벌이 되었네요. ”
방 안의 공기가 미묘해지는 것을 느낀 아리스텔라가 어떻게든 주위를 환기하기 위해 일부러 헤헤 웃으며 성의를 집어 들었다.
“ 대신관님. 이 옷은 여벌로 남겨두면 되나요? ”
“ 성의는 성녀님께서 입기 위해 지어진 옷입니다. 두 벌이 되었다면 입지 않는 한 벌은 태워서 하늘로 올려보내는 것이 맞습니다. ”
“ 그렇군요……. 그럼 이 옷은 태워야겠네요. ”
히페리온은 아리스텔라가 들고 있는 성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17대 성녀가 탄생했다는 신탁이 내려와, 그녀가 신전에 도착하자마자 입을 수 있도록 미리 지어둔 성의였다. 그 성의를 벗긴 것은 이자크였고, 지금 아리스텔라는 히페리온이 새로이 지어준 성의를 입고 있다.
“ 옷을 돌려줘서 고마워요, 이자크. 더 전할 것이 있나요? ”
이자크는 히페리온의 눈치를 슬쩍 보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 아닙니다. 다른 날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
“ 그래요? 그럼 다음에 만나요. ”
아마도 진짜 사적인 이야기는 히페리온 앞에서 하기 어려운 것이리라. 아리스텔라는 그렇게 생각하고 성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뒤 이자크에게 인사했다. 이자크도 아리스텔라를 향해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돌아서려던 찰나, 히페리온이 그를 불렀다.
“ 성녀님께 신성 마법을 가르치는데, 시범을 보일 대상이 없어 곤란해 하던 참이었습니다만, 이자크.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
“ 예? 제, 제가 말입니까? ”
황당한 얼굴로 묻는 이자크를 향해 히페리온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자크는 히페리온의 앞에서 아리스텔라에게 성의를 건네며 그녀와 자신의 은밀한 관계를 과시했다. 히페리온은 그것이 불쾌했으나 이자크를 지적할 수도, 진실을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히페리온이 자존심을 버리고 순종하는 대상은 오로지 성녀 아리스텔라 한정이었다. 성녀를 지키느라 다리를 다친 크리스를 곧바로 시종에서 물러나게 할 정도로, 히페리온은 칼 같은 성격이었다.
사제의 모범이자 성직자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인 히페리온이었으나, 그가 엄격하고 계율을 잘 지키는 것은 성질이 온순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처럼 자로 잰 듯한 생활을 내면화하려면 강한 고집과 의지, 그리고 실수하는 자신을 용납하지 않는 자존심이 필요했다.
히페리온은 성기사를 낮잡아보지는 않았지만, 말단 성기사와 신전의 대신관 사이에는 엄연히 서열이 존재했다. 히페리온이 불쾌해하는 것을 알면서도 도발을 걸어온 이자크를 내버려둘 만큼 그는 관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에게 다가오는 남자를 손 놓고 바라보고 있을 만큼 멍청하지도 않았다.
“ 대신관님. 저는 신성 마법을 쓸 줄 모릅니다. ”
“ 예. 그러니 이자크에게도 가르쳐 드리지요. 성녀님께서도 비교 대상이 있어야 익히기 쉬우실 게 아닙니까? ”
“ 비교 대상……이요? ”
살짝 눈썹을 찌푸리는 이자크를 향해, 히페리온은 여유롭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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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119화 연참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