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금된 성녀와 비밀의 밤-116화 (116/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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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페리온의 개인교습

[116] 히페리온의 개인교습

아리스텔라와 네 사람은 신전의 지하를 거닐면서 보수가 부실하거나 정화가 미처 이루어지지 않은 부분이 있는지를 살폈다. 다행히도 복원된 신전의 지하는 무척 넓고 깨끗했으며, 또한 조용했다.

히페리온이 보았다는 촉수 괴물 또한 더는 나오지 않았다. 물론 촉수 괴물에게 테라가 범해질 뻔했던 것이나, 크리스가 괴물로 변해버린 이야기를 아론이나 노엘 앞에서는 할 수 없었으므로, 히페리온은 그저 < 사악한 괴물 >이라고만 설명했다.

‘ 괴물이라……. ’

아론은 제 뒤에서 따라오는 어두운 얼굴의 히페리온을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분명 아까 성녀가 사라지면서, 그녀의 신성력을 감지할 수 없게 되었다. 사라진 성녀를 찾기 위해 네 사람은 뿔뿔이 흩어졌다. 아론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상대의 기척을 감지하는 능력이 탁월했기에 떨어져서 찾아보자는 히페리온의 말에 수긍했다.

그러나 히페리온이 시야에서 멀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신성력마저 느낄 수 없게 되었다.

성녀와 대신관의 신성력이 차례로 사라졌다가, 갑자기 동시에 나타났다. 아론은 그 간극을 이상하다고 여겼다. 게다가 아론은 성녀의 신성력을 전혀 감지할 수 없었는데, 히페리온은 어떻게 그녀를 찾아내 함께 있었던 것인가.

아론이 신성력을 감지할 수 없었던 그 사이에,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 성녀님이 정말로 타락했다면, 여신에게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대신관 또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아론은 아리스텔라가 갑자기 사라진 이유를 타락한 성녀가 보낸 어떠한 신호라고 생각했다. 대신관 히페리온은 그녀의 부름을 받고 타락한 성녀가 만든 어떤 별개의 공간―이를테면 결계로 만들어진―으로 가버렸던 것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두 사람이 신성력을 차단하는 결계에 갇혀있다가 나온 것은 맞지만, 그 결계를 친 것은 타락한 성녀가 아니라 타락한 사제였다. 그러나 아론은 그 점을 간과하고, 아리스텔라가 히페리온과 함께 미심쩍은 짓을 저지른 것이라고 추측했다.

‘ 추측이 진짜일지 거짓일지는, 차차 밝혀지겠지. ’

히페리온은 공명정대한 대신관이었다. 아론처럼 인맥을 동원하지 않아도 신관이 되고, 이 신전의 최고관리직인 대신관에까지 올라간 그였다.

그런 히페리온이 어느 날부턴가 사제와 성기사 사이의 조율을 하는 것을 넘어 성기사의 편을 들기 시작했다. 더욱이 이번에는 마치 제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것처럼 성녀의 시종을 자처하지 않았나. 오랜 시간동안 곁에서 히페리온을 지켜봐온 아론은 그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내심 당황했다.

그것을 자연스러운 것이라 여길 수는 없었다. 히페리온 정도의 성직자가 신앙심 없는 필부 같은 행동을 할 리가 없다. 아론은 그 이유를 성녀의 타락에서 찾으려 했다.

성녀의 모습은 여전히 청초하였고 신성력도 깨끗했다. 몸에서 나는 달콤한 향기가 조금 신경이 쓰이긴 하였으나 후식으로 나온 달콤한 과일을 먹었기에 그런 것이리라 넘겨짚었다. 처음 이 신전에 왔을 때보다 확실히 안정된 분위기의 성녀는, 조금도 타락한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 하지만 악마는 가장 선량한 이의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

성서에서 악마는 그 모습이 마치 천사와 같다고 서술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론은 성녀의 겉모습에 현혹되지 않고, 그녀가 타락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기로 했다.

◇ ◆ ◇ ◆ ◇

신전 지하 탐방이 끝났다.

사제들의 미라를 정화한 이후로, 부정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리스텔라를 끌어들였던 수상한 벽화는 아마도 남아있는 사제들의 원념이었을 것이다. 아리스텔라는 지상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면서 오늘 제 옆을 지켜준 세 사람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히페리온과 함께 방으로 돌아왔다.

“ 후우, 피곤하다……. ”

“ 성녀님. 주무실 거라면 침대를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

“ 네? 아, 아니에요! ”

시간은 아직 저녁이었다. 취침을 하기에는 이른 시간이다. 그렇지만 지하에서 결계에 갇혔다가 정화를 하느라 신성력을 많이 소모한 탓일까, 산책을 나가거나 성서 공부를 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 피곤하긴 하지만 졸리진 않아요. 그냥……. 조금 쉬고 싶어서요. ”

“ 그렇다면 차라도 드시겠습니까? ”

“ 차요? 으음……. ”

차라고 하면, 예전에 클로비스와 있었던 일이 떠오른다. 진실을 말하게 하는 꽃, <카루스 엔타타>를 띄운 꽃차를 마시게 하고는 그의 앞에서 불가항력으로 진실을 쏟아내고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되찾았을 때는, 이미 그 남자와 몸을 섞은 후였다.

‘ 대신관님은……. 대신관님은 괜찮겠지. 클로비스 집행관처럼 내게 이상한 짓을 하지는 않을 거야. ’

지하에서 서로 몸을 만지는 분위기가 되었음에도 아리스텔라에게 손을 대지 않았던 히페리온이다. 수상한 차를 권할 리도, 저항하는 그녀를 억지로 덮칠 리도 없을 것이다. 아리스텔라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히페리온은 찻주전자에 물을 따르고 뚜껑 위에 손을 살포시 올렸다.

―파앗.

그의 손끝에서 흰 빛이 흘러나와 주전자를 감싸더니, 모락모락 김이 나기 시작했다. 신성력으로 물을 끓인 것이다.

“ 굉장하다……. 대신관님은 정말 못 하시는 게 없네요. ”

“ 과찬이십니다. ”

클로비스가 찻주전자 안에 붉은 마력석을 넣고 물을 끓이는 것도 신기했지만, 이렇게 신성력으로 삽시간에 물을 끓이는 것은 더욱 신기했다.

그러고 보니 아리스텔라가 지금 입고 있는 성의는 히페리온과 밤을 보낸 다음날 아침, 침대 시트를 그의 신성력으로 변형해 지어준 옷이었다.

‘ 대신관님은 정말 굉장한 분이구나. ’

젊은 나이에 이 커다란 신전의 관리인이 되고, 괴물을 물리치고 신기한 것을 만들어낼 만큼 수준 높은 신성 마법을 구사할 수 있으며, 기억력도 뛰어났다.

예전 크리스와 산책을 하던 중 들은 말로는, 히페리온은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사제로서 따라야 할 계율을 어긴 적이 없다고 했다. 아마도 아리스텔라의 명령을 따라 밤 시중을 들었던 것을 제외한다면, 그는 완전무결한 사제일 터였다.

“ ……입에 맞지 않으십니까? ”

“ 네? ”

“ 차를 드시지 않고 계속 저를 보고 계신 듯해서요. ”

“ 아! ”

어느새 히페리온이 따른 차가 아리스텔라의 앞에 놓여 있었다.

“ 잠시 딴생각을 하느라 잊고 있었어요. 잘 마시겠습니다. ”

아리스텔라는 히페리온이 따라준 따뜻한 차를 호로록 마셨다. 따뜻한 차를 마시니 피로하고 울적했던 마음이 가라앉고 기분이 풀어지는 것 같았다.

아리스텔라가 차를 마시는 것을 보고, 히페리온도 찻잔을 들어 가볍게 차를 음미했다. 온도도 향도 딱 좋았다.

“ 그런데 성녀님. 아까는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고 계셨습니까? ”

“ 어, 음……. 대신관님 생각이요. ”

“ ……예? ”

순간 찻물을 뿜을 뻔했다. 향을 음미하느라 몇 모금 마시지 않았던 것이 천만 다행이다. 히페리온은 최대한 태연하게 보이도록 표정을 수습하고는 아리스텔라를 향해 가볍게 웃어 보였다. 그러자 아리스텔라도 따라 웃었다.

“ 대신관님의 신성 마법은 정말로 신기해요. 이렇게 간단하게 물을 끓이고, 옷을 만들고……. 정말 마법 같아요. 아니, 그, 신성 마법이니까 마법이 맞지만요. ”

“ 간단한 술법입니다. 성녀님께서도 요령만 터득하시면 하실 수 있을 겁니다. ”

“ 저는 집중력이 부족해서, 잘 되지 않는걸요. ”

아리스텔라의 눈썹이 우울하게 축 처졌다. 오늘 아침에도 신성력으로 빛의 구슬을 만들어 크게 만들려다가 현기증을 느끼고 쓰러지는 바람에 실패했다. 장시간 집중력을 발휘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어서 자신도 히페리온처럼 마법으로 뭔가 신기한 것도 만들어내고, 그걸 사제들과 성기사들에게 보여줘서 놀라는 얼굴을 보고 싶은데, 빛을 밝히는 것부터가 난관이니 갈 길이 요원했다.

“ 성녀님. 마법 수업이 힘드신가요? ”

“ 으음……. 조금요. ”

“ 노엘이 가르치는 방식이 이해하기 어려우신가요? ”

히페리온의 질문에 노엘과의 마법 수업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린 아리스텔라는 잠시 얼굴을 붉혔다가, 얼른 고개를 털었다.

“ 아, 아뇨. 그건 아닌데요……. ”

집중력을 기르기 위한 훈련이라며 몸을 더듬다니,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어이없는 변명인데 왜 속았는지 모르겠다. 그런데다 노엘이 만져주자 금방 흥분해서 그와 몸을 겹쳐버렸다. 두 번은 겪고 싶지 않은 사고였다.

“ 저도 얼른 신성 마법을 능숙하게 다루고 싶은데, 잘 되지 않아서요. ”

“ 마법을 익혀서 뭔가 하고 싶은 것이 있으신 모양이군요. ”

“ 네……. ”

아리스텔라는 성녀. 타고난 신성력의 총량만은 히페리온 이상일 터였다. 단지 신성마법은 신성력만 월등히 많다고 해서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법에 능숙해지려면 기술과 훈련이 필요했다.

히페리온이 들은 노엘의 보고로는 아리스텔라의 숙련 속도는 비교적 빠른 편에 속했다. 그녀가 신성마법을 배워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는 모르지만, 찻물을 끓이는 정도라면 요령만 터득해도 금방 할 수 있을 터였다.

“ 그렇다면 제가 가르쳐 드릴까요? ”

“ 네? 대신관님께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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