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금된 성녀와 비밀의 밤-115화 (115/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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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구원으로 이어질 때

[115]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히페리온을 보고, 아리스텔라는 조금 당혹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처음에는 이 신전에 와 적응하기 힘들어하는 그녀를 위로하고 힘이 되어주려 하는 히페리온이 고마웠다. 하지만 오늘의 히페리온은 뭐라고 해야 할까, 대하기 어렵다. 원래도 약간 다가가기 어려운 분위기가 있긴 했지만, 지금은 또 다른 의미의 어려움이 느껴졌다.

분명 태도는 정중하고, 하는 말도 성녀를 모시는 대신관으로서 틀리지 않은 말인데, 이상하게 그 눈빛과 어조가 부담스러웠다.

‘ 대신관님의 몸과 마음이……. ’

자신의 몸과 마음은 자신의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마음 속에 그 사람을 담고 감정을 나눌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몸과 마음을 다 바치는 것은, 아리스텔라에겐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 히페리온 대신관님, 이러지 마세요. ”

여신의 현신이라고는 해도 그녀는 탁월한 신성력을 가지고 있을 뿐, 신과 대화를 하는 것도 아니고 제 안의 여신의 존재를 느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성녀인 그녀를 위해 무조건적으로 헌신하는 사제와 성기사들의 태도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 미사 시간도 아닌데 제 앞에서 그렇게 무릎을 꿇으시거나 하면, 저는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

“ 아무것도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성녀님을 보필하는 것은 제 역할이니까요. ”

그저 운이 좋게 신탁을 받아 성녀가 되었을 뿐, 아리스텔라는 평범하게 시골에서 자라온 여자였다. 성서를 끝까지 읽지도 못했고, 사제들처럼 뛰어난 신성 마법을 행사하지도 못한다. 탁월한 지도력으로 사제나 성기사들을 통솔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고, 여기서 이대로 사제와 성기사들의 보호아래 편안하게 생활하기만 하면 된다. 신전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것과, 가족을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것 외에 아리스텔라는 무엇이든 뜻대로 할 수 있었다.

그 무조건적인 혜택과, 저를 따르는 이들의 호의가 오직 그녀가 성녀라는 이유만으로 주어진다고 생각하니 아리스텔라는 마음이 무거웠다.

“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은 싫어요. ”

“ 성녀님. ”

“ 모르는 채로 있는 것도 싫어요. 오늘도 지하를 보러 나오지 않았더라면, 벽화를 보며 노엘의 설명을 듣지 않았더라면, 저는 이곳에 갇혀 미라가 된 사제들이 있다는 것도 몰랐을 거고, 그들을 정화할 수도 없었을 테니까요. ”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했던가.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매일 일을 해야 했다. 노동의 의무에서 벗어난 지금의 안락한 삶이 싫을 리가 없다. 하지만 마음에 부채감을 지우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기도하는 법을 배우고 미사에 참석하고, 신성 마법을 배우려 한 것이다.

“ 히페리온 대신관님, 가르쳐주세요. 제가 무엇을 하면 되나요? ”

“ 성녀님께서 성녀님으로 있어주시면 충분하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

그저 이 신전 안에 살아있기만 하면 된다는 것인가. 그런 것은 싫었다. 아리스텔라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무릎을 꿇었다. 히페리온의 무릎과 아리스텔라의 무릎이 맞닿았다. 아리스텔라는 히페리온의 손을 마주잡고,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 대신관님께서는 제게 바라는 것이 없나요? 아무것도? ”

대답을 갈구하는 아리스텔라의 눈빛에 히페리온의 가슴이 심하게 울렁였다. 종에게는 주인의 질문에 대답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히페리온은 차마 제가 바라는 것을 그녀에게 전할 수가 없었다.

자신을 사랑해달라고.

자신의 곁에만 있어달라고.

이제까지 그 어떤 성직자도 신을 독점하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히페리온은 신을 소유하고 싶은 제 마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의 주인, 여신의 현신이면서, 남자인 자신이 처음으로 품에 안은 여자.

“ 대신관님이 제게 용기를 주셨어요. ”

“ 성녀님, 저는……. ”

“ 그러니 저도 당신의 도움이 되고 싶어요. ”

히페리온은 충동적으로 아리스텔라를 끌어안았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 성녀님……! ”

히페리온이 갑자기 끌어안자 아리스텔라는 놀란 것 같았지만, 그를 밀어내려 하지는 않았다. 품안에서 살짝 꼼지락거리더니 작은 손이 빠져나와 그의 등에 둘러졌다.

아리스텔라의 이마에 히페리온의 이마가 닿았다. 그녀가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리자, 두 사람의 코끝이 맞닿았다. 영롱하게 빛나는 보라색 눈동자에 비치는 남자의 모습은 그녀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했다.

먼저 눈을 감은 것은 아리스텔라 쪽이었다. 히페리온은 그녀의 보드라운 뺨을 쓰다듬고는, 살며시 고개를 기울여 그녀와 입술을 겹치려 했다.

“ 성녀님! ”

뒤에서 들려온 노엘의 외침에, 히페리온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고 뒤를 돌아보았다. 결계 속의 하얀 방과는 달리, 사제들이 죽음을 맞이한 이 방에는 문이 있었다. 그리고 그 문은 지금 열린 채였다.

“ 노, 노엘. ”

“ 아론 신관님! 역시 이곳이 맞습니다. 성녀님과 대신관님을 찾았습니다! ”

노엘은 문 너머를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설마 아론이 신성력을 감지해 아리스텔라의 위치를 찾아낸 것일까. 히페리온의 가슴이 쿵쿵 뛰면서 얼굴이 뜨거워졌다. 만약 노엘이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분명 두 사람은 이곳에서 몸을 섞고 있을 터였다.

‘ 성녀님……. ’

‘ 어쩔 수 없네요. ’

아리스텔라는 노엘의 시선이 문 밖을 향한 틈을 타, 살짝 몸을 일으켜 히페리온의 입술을 핥았다.

“ ……! ”

작고 촉촉한 혀가 그의 입술을 가볍게 훑고 떨어졌다. 생긋 웃으며 몸을 일으키는 아리스텔라를 보고도, 히페리온은 마치 그 자리에 못이 박힌 것처럼 얼어붙어 일어날 수가 없었다. 굳어있는 히페리온을 뒤로하고 아리스텔라는 노엘을 향해 다가갔다.

“ 노엘. 저를 어떻게 찾으셨나요? ”

“ 아론 신관님께서는 타인의 신성력을 감지해 위치를 찾아내는 능력이 뛰어나시거든요. ”

“ 아……. ”

“ 성녀님의 신성력이 사라지고 대신관님의 신성력까지 사라져서 저희도 불안해했습니다. 계속 뭔가에 가로막힌 듯 성녀님의 신성력을 감지할 수 없었는데, 갑자기 안개가 걷히듯 주위의 기운이 맑아지면서, 두 분의 신성력을 느낄 수 있게 되었어요. ”

결계에 있는 동안은 신성력을 감지하지 못했다가, 결계가 사라지고 죽은 전대 성녀의 사제들을 정화하자 두 사람의 신성력을 감지할 수 있게 된 것일까. 사제들에게는 참으로 편리한 능력이 있다고 아리스텔라는 생각했다.

‘ 그러면 히페리온 대신관님은 어떻게 결계 속에 갇힌 나를 알아보신 걸까? ’

아리스텔라는 고개를 갸웃하며 히페리온을 바라보았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일어선 히페리온은 아리스텔라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뒤에 서있었지만, 고개를 돌리고 있어서 표정을 파악할 수는 없었다.

“ 대신관님. 아까는……. ”

“ 성녀님! ”

아리스텔라의 말을 끊으며 이자크가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 이, 이자크? ”

“ 하아……! 정말 걱정했습니다. ”

이자크는 붉어진 얼굴로 숨을 몰아쉬면서 아리스텔라의 상태를 살폈다. 머리카락도 흐트러짐 없이 단정하고 옷차림도 말끔했다. 상처를 입거나 한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이자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아리스텔라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 성녀님의 호위로 동행한 것인데, 곁을 지키지 못해 죄송합니다. ”

“ 괜찮아요. 제가 떨어진 것은 사고였고, 다친 곳도 없이 무사하니까요. ”

“ 케인 단장님은 이런 일이 일어나지 말라고 저를 보내신 것인데, 저는……. ”

“ 이자크? 저는 정말 괜찮다니까요? ”

성녀가 갑자기 사라졌으니 놀라지 않을 리가 없다. 게다가 신성력을 감지할 수 있는 사제들과는 달리, 이자크는 넓은 지하를 샅샅이 뒤지며 아리스텔라를 찾아다닐 수밖에 없었다. 필사적으로 아리스텔라를 찾다가 뭔가 소득이 있나 싶어 아론을 찾으러 간 순간, 그가 아리스텔라와 히페리온의 신성력을 감지한 것이었다.

“ 감사합니다, 아론 신관. ”

이자크는 아론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여전히 사제는 싫지만, 그가 아니었더라면 성녀를 찾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론은 이자크의 진심을 담은 감사의 인사에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아리스텔라를 내려다보았다.

“ 성녀님, 무사하셨군요. ”

“ 네, 네! ”

꿈속에서 아론을 닮은 남자에게 범해진 기억 때문일까, 아리스텔라는 어쩐지 아론을 평소처럼 대할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꿈속에서도 정화의 의식 마지막 순간에 아론이 나타나 그녀를 범했다. 어쩌면 그것도 전대 성녀의 기억 때문에 꾼 꿈이었던 걸까.

‘ 우연히 닮은 것뿐일까? 아니면 먼 친척일지도……. ’

아론은 신실한 사제였다. 성녀의 목욕을 도울 때조차 아무렇지 않은 태도로 그녀를 대했다. 그에게 전대 성녀를 범한 사제의 일을 말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 아론은 아직 여신 위그멘타르가 음욕의 여신이라는 것을 모르지. ’

히페리온 이상으로 금욕적으로 보이는 그에게 사실을 밝히기는 어려웠다. 아리스텔라는 결계 안에서 있었던 일을 생략하고 짧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 고마워요, 아론. ”

“ 성녀님을 보필하는 것이 저희 사제의 일입니다. ”

<사제의 일>.

그것은 성기사인 이자크를 노골적으로 배제하는 말이었다. 아론의 언사에 이자크가 표정을 굳혔지만 성녀가 사라지는 사고를 겪고도 그녀를 찾아내지 못한 젊은 성기사는 할 말이 없어 입술을 깨물었다.

아론의 언사와 태도에 당황한 아리스텔라는 뭔가 말하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갑자기 사라지는 바람에 걱정을 끼친 처지에 자신을 찾느라 수고한 아론에게 왜 이자크를 따돌리느냐며 따져 물을 수는 없었다. 아리스텔라는 작게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들었다. 노엘과 눈이 마주치자, 그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 노엘? ”

“ 아, 어흠! ”

노엘은 크게 헛기침을 하고는 앞으로 척척 걸어갔다.

“ 그럼 마저 둘러볼까요? 다른 곳은 이상이 없는지 보셔야지요. ”

사라진 성녀를 찾아낸 아론, 그런 성녀의 곁을 지킨 히페리온. 두 신관에게 질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노엘이 의욕적으로 안내를 시작했다.

이번에는 노엘이 앞장서고, 아론이 아리스텔라의 바로 옆에 섰다. 그리고 어쩐지 우중충한 얼굴의 두 남자가 아리스텔라의 뒤를 따랐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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