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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구원으로 이어질 때
[114] 사랑이 구원으로 이어질 때
히페리온도 조슈아도, 아리스텔라가 성욕에 미쳐 음란한 짓을 하는 것을 경멸하지 않았다. 욕망을 절제할 수 없는 몸이 되어버린 그녀에게, 부디 자신을 혐오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욕구를 참을 수 없게 되면 도움을 청하라고, 자신들이 힘이 되어주겠다고 말했다.
‘ 어째서 전대 성녀의 사제들은 그렇게 말해주지 않았을까. ’
참을 수 없는 성욕 때문에 괴로워하는 밀리아리아를 감싸주었더라면, 이해해주었더라면, 그녀의 괴로움을 덜어주기 위해 함께 노력했더라면. 그랬더라면 그들이 욕망에 미쳐버릴 일도, 괴물이 되었을 리도 없었을 텐데.
“ 당신이 신의 은총을 받지 못한 것은 성녀가 타락해서 은총을 내려줄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에요. 당신이 타락해서 신의 은총을 받아들일 수 없는 몸이 된 거라고요. ”
아리스텔라의 말에 사제의 얼굴이 굳었다.
<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저는……. >
“ 저를 모욕하면서, 즐거우셨나요? ”
이번엔 그녀의 뒤에 있던 히페리온이 깜짝 놀라 어깨를 움찔거렸다. 아무래도 자신이 이 방에 들어오기 전, 성녀는 이미 거울 너머의 사제와 소통을 했던 것 같았다.
‘ 이곳에 들어왔을 때 무척 괴로운 얼굴로 신음하고 계셨지. 설마……. ’
지하에서 크리스를 공격하고 아리스텔라를 범하려 했던 촉수 괴물은 아마도 전대 성녀의 시종이었을 것이다. 전대 성녀의 곁에서 그녀의 시중을 들며 정화의 의식에도 묵묵히 참관했다던 그는, 성녀에게 정화의 의식을 베풀던 사제들이 전부 살해당한 날 홀연히 사라졌다.
히페리온의 부탁으로 조슈아는 전대 대신관의 일기를 비롯해 다른 신관들의 기록을 조사하면서, 전대 성녀를 따르는 신관과 사제들 가운데 실종된 이들이 있다는 것을 밝혀내었다. 그 보고를 받았을 때 히페리온은 얼굴을 찌푸렸다.
촉수 괴물이 되었다가 아리스텔라에게 정화받은 사제 이외에, 또 다른 실종자가 있었다니.
이곳은 폐쇄된 신전이다.
사망한 것이 아니라 실종된 거라면, 그들은 어디로 갔을 것인가. 이제까지 폐쇄되어있던 지하. 이곳밖에 없지 않을까.
< 저는 그저 성녀님을 위해……. >
“ 당신이 그런 짓을 하면 제 몸의 더러움이 정화되고 깨끗해질 거라고 생각하셨나요? 정말로? ”
사제는 대답하지 못했다. 아리스텔라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불안하게 금색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 ……정화되리라고 생각해서, 한 일이 아닙니다. >
“ 그러면요? ”
< 당신을……. 안고 싶었습니다. >
그제야 솔직한 진심을 털어 놓으며, 사제는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를 모욕하던 무섭고 끔찍한 얼굴이 아니라,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는 얼굴이었다.
아리스텔라는 자신을 안고 있던 히페리온의 손을 살며시 밀어내었다. 히페리온이 그녀를 놓아주자, 천천히 일어나 벽을 향해 다가갔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다. 뒤에 히페리온이 있으니 끌려들어가지 않을 터였다.
“ 성녀님……! ”
“ 괜찮아요. ”
아론을 닮은 저 남자는, 전대 성녀를 사랑한 사제 가운데 한 사람일 것이다. 지하에서 촉수 괴물이 되어버린 전대 성녀의 시종이 아니라, 아직 구원받지 못한 가여운 영혼.
“ 저를 사랑하나요? ”
< ……. >
당돌한 질문에, 사제는 대답하지 못한 채 입술을 깨물었다.
“ 저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
< 성녀님……. >
아리스텔라는 거울 속의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거울 너머로 그의 얼굴을 쓰다듬자, 손이 닿은 것도 아닌데 온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 하지만 당신이 구원받지 못하고, 영원히 불행해지기를 바라지도 않아요. ”
아리스텔라의 말에, 사제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 읏……. >
울컥거리는 감정을 간신히 참아내려는 듯이, 사제의 어깨가 떨렸다. 아리스텔라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이 착잡해졌다.
흉흉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을 무섭다고 여겨, 그 뒤편에 숨겨진 마음을 헤아리려 하지 않은 것이 실수였다. 성녀가 타락했다고 해서, 그녀가 음란하다고 해서 그토록 분노하며 그녀를 범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 있단 말인가.
진정 음란한 성녀를 더럽다 여겼으면 차라리 멀리하거나 끔찍이 여겨 처벌했을 일이다. 더러운 여자와 매일같이 몸을 섞을 리가 없었다. 성녀를 직접 범하는, 정화의 의식을 사용해서라도 원래대로 되돌리고 싶어 했던 건 분명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아리스텔라는 생각했다.
‘ 이제야 사제들이 타락한 이유를 알겠어. ’
신의 사랑을 세상에 전파하기 위해 육신과 영혼을 모두 바친 그들. 그러나 그 사제들 가운데, 진정으로 < 사랑 >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도 그들에게 어떻게 사랑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사랑하는 여인에게 어떻게 마음을 전하고, 어떻게 사랑을 나누면 되는지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다.
올바른 사랑의 형태를 배우기는커녕 진짜 사랑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사제들이 성녀와 사랑에 빠져버렸다. 본능대로 그녀를 범하고 또 범하면서, 그녀의 눈물에 괴로워하고 서로를 원망했다.
그리고 자신 이외의 남자를 받아들이는 그녀를 보고 질투에 미쳐 서로를 죽이는 괴물이 되어버렸다.
‘ 정말 어리석은 사람들이야. 신은 왜 이 사람들을 구해주지 않았을까? ’
제대로 사랑하는 법을 알았더라면, 이들이 괴물이 되어 성녀를 괴롭히고 신전을 지옥으로 만들지 않았을 텐데.
< 성녀님, 사랑합니다. >
“ 저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
< 그래도 사랑하고 있습니다. 진심으로……. >
이제 와서 고백한다 한들 아리스텔라는 밀리아리아가 아니다. 그의 고백은 전대 성녀에게는 닿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그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자신을 그런 모습으로 만들고 괴롭힌 신전의 사제들을 밀리아리아가 용서할지 저주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니 아리스텔라가 밀리아리아를 대신해 그의 고백에 대답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그저 17대 성녀 아리스텔라로서 오직 하나의 대답을 들려줄 수 있을 뿐이다.
“ 저를 사랑한다면, 제가 바라는 것을 들어주세요. ”
< 성녀님께서, 바라시는 것……. >
사제가 고개를 들어 아리스텔라를 바라보았다. 눈물이 어른거리는 금색의 눈동자에, 더 이상 그녀를 원망하는 빛은 없었다.
“ 더는 이곳에서 괴로워하지 말고, 신의 품으로 돌아가세요. 그곳에서 당신이 안식을 얻기를 바랍니다. ”
그렇게 대답하고, 아리스텔라는 가슴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거울 저편에서 울고 있는 사제를 향해 기도했다.
히페리온은 거울 저편의 사제를 향해 기도하는 아리스텔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바람도 불지 않는데 그녀의 물빛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이어서 새하얀 성의가 펄럭거리며 떠올랐다가, 바닥에 넓게 펼쳐졌다. 성녀의 몸에서 성스러운 신성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성녀로부터 눈을 돌려, 건너편의 사제를 바라보았다. 사제에게 아리스텔라의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분명, 처음 만났을 때보다 평온해 보였다.
< 그리 하겠습니다. >
사제는 아리스텔라를 향해 대답하고, 그녀의 뒤편에 있는 히페리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성녀를 사랑하였으나 제 마음을 깨닫지 못해 그녀에게 고백하지 못했던 남자와, 성녀를 사랑하지만 용기가 없어 고백하지 못하고 있는 남자의 시선이 엷은 빛으로 빛나는 거울을 사이에 두고 부딪쳤다.
< 이제는 제가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
성녀를 범한 죄책감에 사로잡혀 이 지하에 남아 괴로워하다가, 성녀에게 구원받기를 기다렸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히페리온이 보기에 사제의 표정은 성녀의 기도에 감격한 것이 아니라 마음의 짐을 벗고 개운해진 것처럼 보였다.
차마 말하지 못하고 가슴 속에 묻어두어 응어리진 제 본심을 드디어 고백하고 홀가분해진 이의 얼굴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제 감정에 치중한 판단일까.
새하얀 방안을 아리스텔라의 신성력이 가득 채우자, 천장에서부터 마치 눈이 녹아내리듯이 빛이 반짝이며 방이 허물어졌다.
거울이 사라지고, 새하얀 천장이 산산이 부서지며 빈틈없이 꼭 닫혀 있던 하얀 벽이 벌어지더니 넓은 공간이 나왔다.
“ 이곳은……. ”
아무것도 없는 빈 의자를 둘러싼 하얀 성의를 입은 미라들. 그것은 전대 성녀를 모시다가 도망친 < 실종자 >들이 죽음을 맞이한 방이었다. 그들은 존재하지 않는 성녀를 그리워하며 벽화에 그려진 모습 그대로 미라가 되어버린 것이다.
벽화를 보고도 무서워했던 아리스텔라다. 그녀가 미라를 보고 놀라 두려워하지 않을까 하여 안색을 살폈지만, 뜻밖에도 아리스텔라의 표정은 담담했다.
“ 이 새하얀 방의 결계는 사제들이 자신의 육신과 혼을 매개로 쳐둔 거로군요. ”
“ 예……. 아마도 이들이, 전대 대신관의 일기에 기록되어 있던 실종자들일 겁니다. ”
“ 성녀도 없는 이런 곳에서, 지하가 폐쇄되어 은총은커녕 신전의 기운이나 햇빛조차 받지 못하고……. ”
아리스텔라는 그들을 안쓰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 이 사람들을 신의 품으로 돌려보내면, 밀리아리아 성녀님이 저를 원망할까요? ”
“ 예? ”
“ 밀리아리아 성녀님을 범한 남자들이잖아요. 영원히 구원받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괴로워하기를 바라셨는지도 몰라요. ”
아리스텔라는 아름다운 눈썹을 찌푸리며 빈 의자를 둘러싼 사제들의 미라 주위를 천천히 돌았다. 죽은 사제들은 전대 성녀를 모시던 이들. 그들이 구원받든, 지옥에 떨어지든 그것은 아리스텔라가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아리스텔라의 역할은 이 신전에 평생 감금된 채, 재앙의 여신이 세상에 나가지 못하도록 몸 안에 봉인하고 있는 것이니까.
분명 히페리온은 처음에 성녀의 역할을 그것으로 규정했다. 아리스텔라가 위그멘타르에게 마음을 먹히든 말든 상관없다고 했던 그였다.
“ 성녀님은 저희들의 주인, 그리고 이 신전의 절대자십니다. ”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히페리온은 그녀가 그녀 자신으로 있기를, 이 신전의 주인이자 그의 주인으로 있어주기를 바랐다.
“ 그들을 처벌하든, 용서하든, 이대로 남겨두든. 그것은 오직 성녀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
“ 저는 이 사람들을 신의 품으로 돌려보내고 싶어요. ”
“ 그렇다면 그렇게 하시면 됩니다. ”
히페리온이 다가와 살며시 허리를 굽혀, 아리스텔라에게 키스했다. 이번에는 애정을 나누기 위한 입맞춤이 아니었다. 성녀의 축복을 나누어 받기 위한 행동이었다.
성녀의 축복을 받은 히페리온은 미라가 된 사제의 이마에 축복을 나누어 주었다. 히페리온이 손끝으로 사제의 이마를 짚자, 사제의 미라가 빛에 휘감겨 사라졌다. 다음 사제에게도 역시 축복을 나누기 위해 이마에 손을 대자 빛으로 화했다. 히페리온은 그렇게 총 여섯 개의 미라를 빛으로 정화했다.
“ 정화가 되면, 흔적조차 남지 않고 사라져 버리는군요. ”
“ 사제의 육신과 영혼은 모두 신의 것이니까요. ”
정화를 마친 히페리온은 아리스텔라에게 다가와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 제 몸과 마음 역시, 당신의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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