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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의 성녀, 정화의 조건
[112]
듣기 좋은 목소리와 심장의 고동, 따스한 체온과 부드러운 옷자락. 불안해하는 그녀를 달래듯 천천히 등을 쓸어내리는 손길에 안도한 아리스텔라는 히페리온의 등에 팔을 둘렀다. 옷자락 너머로 두 사람의 가슴이 맞닿아, 서로의 고동이 느껴졌다.
히페리온의 심장이 빠른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성서를 외던 목소리가 끊겼다. 어째서일까. 의문을 느낀 아리스텔라가 고개를 들자, 히페리온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와 함께 밤을 보내던 날도 이렇게 지근거리에서 눈이 마주쳤다. 그때는 아리스텔라도 히페리온도 놀라서, 얼른 시선을 피하며 등을 돌렸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리스텔라도 등을 돌리지 않았고, 히페리온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아리스텔라의 보랏빛 눈동자에 히페리온이 비치고, 히페리온의 붉은색 눈동자에 아리스텔라의 모습이 비쳤다.
“ 으응……. ”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입술이 겹쳤다.
그저 가볍게 맞대기만 한 것뿐이었다. 그런데도 그 입술이 너무나도 부드럽고 달콤해서, 아리스텔라는 무심코 눈을 감고 히페리온에게 매달렸다.
“ ……후아. ”
혀를 섞은 것은 아니었다. 집요하게 입술을 핥고 깨물며 서로를 탐하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입술을 맞댄 채 천천히 부빈 것뿐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토록 숨이 막히는 것일까. 아리스텔라는 알 수가 없었다.
“ 죄송합니다……. ”
양 뺨을 발그레하게 물들이고 촉촉한 눈빛으로 히페리온을 바라보는 아리스텔라의 시선에, 돌연 그가 고개를 돌리며 사과했다.
“ 네? 뭐가요? ”
“ 성녀님께 허락도 구하지 않고, 그만……. ”
히페리온의 목소리에 당혹감이 섞였다. 아무래도 그는 진짜로 곤란해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방금 자신이 저지른 행동에.
충동적으로 입을 맞췄다. 허락도 없이 키스한 것에 대해 사과하는 거라면 그녀의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제대로 사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히페리온은 지금 둔감한 아리스텔라의 눈으로 보아도 확실히 알 만큼 당황하고 있었다. 수려한 눈썹을 찌푸리고, 그의 붉은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잘못을 저지른 것을 사과하는 태도가 아니다. 히페리온은 지금 자신이 왜 이러는지 몰라 진심으로 당황하고 있었다.
“ 죄송합니다. 제가 무슨 짓을……. ”
“ 대신관님. ”
아리스텔라가 히페리온을 부르며 그의 뺨에 가만히 손을 대자, 그가 흠칫 놀라 몸을 뒤로 뺐다. 그 바람에 가볍게 닿았던 손이 떨어졌다. 제가 스스로 물러나 놓고, 가볍게 닿았다 떨어진 손길에 아쉬워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그것을 깨달은 아리스텔라는 문득 히페리온이 귀엽게 느껴졌다.
‘ 대신관님, 키스가 처음이셨구나. ’
사제는 색을 멀리해야 하니, 연애를 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서로 몸을 섞었던 밤은 입을 맞추지 않았으니 당연히 키스는 이번이 처음이겠지만, 스스로 입을 맞춰놓고 눈에 띄게 당황하는 그의 모습에 아리스텔라는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참기 어려웠다.
“ 대신관님. 방금 제게 키스하셨잖아요. ”
“ 죄송합니다. 제가……, 제가 잘못했습니다. ”
마치 어린아이가 잘못을 들킨 것처럼 당황하고 있다.
히페리온은 아리스텔라보다 여덟 살이나 연상이었다. 그런데도 지금은 그녀보다 여덟 살 아래의 어린아이가 더 어른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그에겐 그녀와의 섹스보다도 키스 쪽이 더 충격이 컸던 것일까.
“ 네. 잘못하셨어요. ”
쿡 웃고는, 이번에는 히페리온이 피하지 못하도록 양손으로 그의 뺨을 감쌌다.
“ 성녀님……? ”
“ 키스는 이렇게 하는 거예요. ”
살며시 고개를 기울여 히페리온과 입술을 겹쳤다. 그의 몸이 딱딱하게 굳는 것이 느껴졌다. 아리스텔라는 맞닿은 입술을 떼고 히페리온을 바라보며 생긋 웃고는, 혀를 살짝 내밀어 그의 입술을 핥았다.
“ ……! ”
히페리온의 눈동자가 커졌다. 아리스텔라보다 연상에, 이 신전의 대신관인데, 두 사람은 이미 한 번 서로 몸을 섞은 적도 있는데, 고작 입술을 핥는 키스 정도에 이렇게 당황하는 것도 신기한 일이다.
“ 성녀님……. ”
“ 쉿. ”
천천히 입술을 핥다가, 제 입술로 그의 입술을 감싸 빨아들였다. 마치 사탕을 빨듯이 천천히 음미하며 그 부드러운 감촉을 즐겼다.
‘ 아……. ’
히페리온은 키스하는 법을 몰랐다. 사제들의 의식은 손등에 입을 맞추는 것이었고, 성녀에게 받는 입맞춤조차 가볍게 입술을 스치는 것이었다. 물론 히페리온은 성녀에게 입맞춤을 받았던 적이 없으니, 케인에게 그녀가 키스하는 것을 본 것이 처음이었다.
입맞춤이라는 것은 그저 가볍게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지는 거라고 생각했다. 이런 식으로 입술을 핥고 빠는 행위가 있는 줄 몰랐다.
“ 으음……. ”
히페리온은 서툴게 입술과 혀를 움직여, 혀끝으로 아리스텔라의 입술을 핥고는 조심스럽게 빨아들였다.
“ 응, 하으……. ”
달콤한 신음과 한숨이 섞였다. 아직 본격적인 키스는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히페리온은 그녀와 입술을 부빈 것만으로 정신이 날아갈 것 같았다.
격렬하게 혀를 섞는 키스보다 입술을 비비고 쪽쪽 소리가 나도록 뽀뽀하는 것을 좋아하는 아리스텔라가 그렇게 가르쳤기에, 히페리온의 키스에 대한 지식 또한 여기서 멈춰 있었다.
그에게 혀를 섞는 키스를 가르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으나, 아리스텔라는 곧 머릿속에 떠오른 나쁜 생각을 지워버렸다.
고고하고 우아한 대신관 히페리온. 그녀를 섬기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연인 흉내를 내며 밤 시중을 들었던 남자다. 자신을 도와주고 격려해준 고마운 사람을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주제에 지금 그에게 키스를 가르치고 있는 자신의 행동이 참으로 모순된다고 아리스텔라는 생각했다.
“ 으음, 하아……. ”
히페리온과의 입맞춤은 달콤했다. 혀끝에서 단맛이 느껴지거나 침이 고이면서 배가 꼬르륵거리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달콤하다고 생각했다.
부드러운 입술과 촉촉하고 매끄러운 혀, 입술 사이로 넘나드는 더운 숨결. 그와 키스하는 것은 기분이 좋았다. 그저 기분이 좋은 것이 아니라, 가슴이 간질간질하면서 머릿속이 멍해지는 느낌이었다.
“ 대신관님. 한 번 더……. ”
“ 성녀님……. ”
입술을 겹치고, 갈증 난 사람이 물을 마시는 것처럼 서로의 입술을 핥았다. 마치 중독된 것 같았다. 섹스할 때처럼 지극한 쾌락을 느끼는 것도 아닌데, 어째서 이렇게 행복한 기분이 드는 것일까.
아리스텔라는 히페리온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모아 쥐었다. 찰랑찰랑 윤이 나는 매끄러운 머리카락이 그녀의 손가락에 감겨 흘러내렸다. 신전의 공기 때문일까, 히페리온의 머리카락은 살짝 차가우면서도 촉촉했다.
“ 하응, 하아……. ”
입술 사이를 혀로 슥 핥고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빨아들이자, 벌어진 입술에서 단 한숨이 흘렀다. 부드러우면서도 청량한 느낌이었다.
사탕을 빨 듯 혀끝으로 입술을 쿡쿡 찌르다가 쪽 하는 소리와 함께 놓아주자, 히페리온도 방금 아리스텔라가 한 것처럼 그녀의 입술을 핥고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 대신관님, 금방 배우는구나……. ’
그 두꺼운 성서를 줄줄 외는 것으로도 짐작했지만, 역시 신전의 대신관쯤 되면 기억력이 남다른 것 같다.
아리스텔라가 가르쳐준 키스의 스킬을 금세 익힌 히페리온은 그녀가 가르쳐준 것을 잊지 않고 충실히 복습하는 착실한 학생이었다. 거기에 아리스텔라의 반응을 확인해가며 그녀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입술을 애무해주기까지 하니, 놀랍고 기특한 생각마저 들었다.
‘ 연상인 대신관님께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실례일지도 모르지만. ’
아리스텔라에게는 케인과의 키스가 처음이었다. 처음부터 격정적으로 혀를 섞는 입맞춤을 배운 아리스텔라에게 이렇게 가볍게 핥고 빨기만 하는 키스는 조금 심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리스텔라는 이런 간지러운 키스를 좋아했다. 정신을 놓을 것처럼 아찔한 키스보다, 장난치듯이 천천히 달콤하게 애정을 나누는 행위를 좋아했다.
비록 진짜 연인이 아니라도 이렇게 키스하고 있으면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과 키스하는 듯한, 두근두근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깊은 입맞춤을 나눌 때는 금방 정신을 잃고 흥분해버려 이 기분 좋은 두근거림을 즐길 수가 없었다. 그러니 키스는 달콤한 것이 좋았다.
“ 하아. 하아……. ”
혀를 섞지 않아도 이렇게 숨이 찰 수 있구나. 아리스텔라는 새로운 체험을 한 것 같은 신기한 느낌이 들었다.
‘ 이제 더는 무섭지 않아. ’
결계로 둘러싸인 지하의 방 안. 또 어디서 아까처럼 모르는 사람이 나타나 그들을 끌고 들어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더 이상 들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히페리온이 그녀를 끌어안고 키스하는 순간, 더는 위험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 꿈속의 사제는 나를 전대 성녀로 착각하는 것 같았으니까……. 대신관님과 키스하는 것을 보고, 내가 자기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는지도 모르지. ’
그렇게 생각하니 충동적으로 저지른 행위의 죄책감도 조금 상쇄되는 듯했다. 그녀를 위협하는 공포스러운 경험을 히페리온과의 키스가 물리쳐줬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지만, 그런 확신을 가진 것만으로 마음이 가벼워졌다.
“ 히페리온 대신관님, 입술이 붉어요. ”
“ 성녀님의 입술도 그렇습니다. ”
검은 머리에 흰 피부. 붉은 입술. 이렇게만 늘어놓으니 그가 마치 동화 속의 백설공주라도 되는 것 같다. 확실히 남자다운 뚜렷한 이목구비지만, 성직자이기 때문일까. 고결하고 신비로운 인상임에도 어딘가 순수한 느낌이 남아 있다.
손끝으로 히페리온의 붉고 촉촉한 입술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히페리온도 조심스럽게 아리스텔라의 입술에 손을 올려 더듬었다. 아리스텔라의 손가락이 턱선을 더듬어 내려가 목울대를 스치자, 히페리온도 손을 내려 그녀의 가느다란 목을 쓰다듬었다.
‘ 내가 하는 대로 따라하려는 걸까. ’
또다시 가슴이 간질간질해지면서, 못된 생각이 들었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던 아리스텔라가 양손을 들어 히페리온의 가슴을 더듬자, 그가 조금 당황한 듯 얼굴을 붉혔다.
“ 성녀님……? ”
“ 만지셔도……돼요……. ”
사랑하는 사이도 아니면서 몸을 만지고, 만져달라고 청하는 이 상황이 얼마나 황당한 일인지는 알고 있다. 그러나 아리스텔라는 주인이었고 대신관 히페리온은 그녀의 종이었다. 주인과 종의 관계는 싫다고 말해놓고서, 아리스텔라는 제 지위를 이용해 그를 보채고 있었다.
‘ 난 정말 어쩔 수 없나봐. ’
자기혐오가 밀려와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의 표정을 재촉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는지, 히페리온의 손이 조금 다급하게 아리스텔라의 가슴을 감쌌다.
“ 하읏……! ”
생각에 잠겨있느라 무방비했던 아리스텔라는 갑자기 남자의 손이 제 가슴을 만져주자 몸을 떨며 신음했다. 섹스에 서투른 히페리온은 아리스텔라의 반응에 그대로 손을 멈춰버렸다.
“ 죄송합니다, 성녀님. 그만두겠습니다. ”
============================ 작품 후기 ============================
112, 113화 연참합니다. 감사합니다.